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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 고양이 나나의 눈에 비친 세계

고충환

이경미 / 고양이 나나의 눈에 비친 세계





작가 이경미에게 고양이 나나는 각별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태어난 나나는 방광결석으로 총 세 번의 수술을 받고 되살아났다. 주변에서의 안락사 권유도 있었지만, 매번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와 준 나나에게 작가는 각별한 애정을 넘어 자기 자신과의 닮은꼴을 본다. 자신과 나나를 동일시한 것이며, 나나에게서 자신의 분신을, 일종의 아바타를 본 것이다. 이를테면 곧잘 우두커니 웅크리고 있는 나나를 보고 있으면 유년시절 엄마를 기다리며 어두운 방안을 저 홀로 지키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나나의 모습 속엔 작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고스란히 탑재돼 있다. 그리고 이렇듯 자기를 대리하는 나나를 자신의 삶의 전망 위로 내보낸다. 대개 그렇듯 암울했던 유년시절로 내보내고, 그 유년시절이 키워준 무의식의 정경 속으로 내보내고, 성장한 이후 여행했던 세계의 도시들이며 풍경들 위로 내보내고, 달 여행과 그 이후와 같은 현실과 공상의 모호한 경계 위로 내보낸다.

그 전망이 열어놓는 비전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방을 매개로 이쪽 공간과 저쪽 공간이 구분되고, 안쪽과 바깥쪽이 나눠진다. 방 안쪽은 마치 자궁과도 같이 안온한 엄마의 세계이며, 방 바깥쪽은 거친 세파가 휘몰아치는 아버지의 세계다. 각각 자크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에 해당한다. 구분과 차별이 없는 자족적인 세계와, 구분과 차별이 삶의 냉엄한 준칙으로서 요구되는 상대적인 세계가 대비된다. 언어와 상징, 기호와 개념으로 재편된 아버지의 정언명법이 지배하는 상징계로의 성공적인 이주를 위해 유아는 상상계에서의 자족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포기된(사실상 억압된) 욕망이 최초의 무의식을 형성시킨다. 이처럼 포기되고 억압된 욕망이 형성시킨 무의식이 원형이며, 이렇듯 잃어버린 원형을 되찾는 일이 예술의 과제로서 주어지는데, 아마도 이경미의 작업은 그 과제와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방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 경계 위에는 물이 흐른다. 물은 무의식을 상징하며, 생명을 상징하며, 특히 파도가 일렁이는 물은 세파를 상징한다. 그 물이 바깥쪽에서 방 안쪽으로 범람하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범람된 물은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를 지우면서 더 이상 파고를 만들지 않는다. 엄마의 세계와 아버지의 세계가 화해하고, 상상계와 상징계가 화합한 것이다. 비록 이처럼 상상계가 상징계를 포용하는 일은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예술가는 자신의 상상력 속으로 도피할 수가 있고 그 상상력과 더불어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은 경계를 지운다고 했다. 제도가 그어놓은 일체의 이분법적인 금들의 경계 너머로 범람하는 물(생명을, 화해를, 통섭의 원리를 매개하는) 위로 고양이 나나는 이제 마침내 발을 디딜 수가 있게 됐고,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게 됐다.




작가의 그림은 자전적이고 보편적이다. 비록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삶의 경험이 대동소이한 점이 있고, 특히 현실세계에 상상력이 만든 비전을 대질시켜 현실원칙을 넘어서려는 기획이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사적인 경험을 넘어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좀 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존재론적이고 문명사적인 주제의식으로 심화되고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사의 경계를 넘어 타자와의 관계를 아우르는 좀 더 거시적인 주제의식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이 사실은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비전임을 암시하는 회화적 장치를 그림 속에 숨겨놓는다. 그림이 그려진 일종의 배경 역할을 하는 모티브들, 이를테면 테이블과 테이블 보, 그리고 그 위에 쌓여있는 크고 작은 책들의 더미가 그렇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책상머리에서의 상상력이 불러낸 비전임을 알 수 있고, 현실공간과 상상공간이 하나의 결로 삼투되고 직조된 이미지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모티브들 중 특히 테이블보는 의미심장하다. 이를테면 작가는 유년시절 한복 박음질로 날밤을 새곤 했던 엄마를 떠올린다. 형형색색의 색깔과 문양들과 더불어 천 자락 위로 세계가 펼쳐지고 접혀지던, 생성되고 오롯해지던 기억을 떠올린다. 유년시절 작가에게 그 천 자락에 박음질된 비전은 그대로 세계 자체였다. 그리고 그 세계 그대로 책상머리 위로 옮겨져 자신만의 또 다른 세계를 그려내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테이블과 테이블보 그리고 책들의 더미가 없어도 그림은 가능하지만, 굳이 이 모티브들을 그림의 일부로서 그려 넣은 데에는 좀 더 복잡한, 그리고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다. 그림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자기 자신의 위치(사실은 그림 바깥에 속해져 있는)에 대한 의식 곧 자의식을 확인하고 주지하려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고, 이와 더불어 그림 자체의 현실감 내지는 실체감을 더하려는 기획의 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사실 이런 현실감 내지는 실체감으로 치자면 작가의 그림은 묘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작가는 여기에 일종의 저부조 형식의 입체를 부가해 이런 사실감을 더한다. 캔버스 위에 부분적으로 저부조 형식의 입체 구조물을 부착해 그리는데, 주로 그림 전면의 책 더미나 투시도법으로 잡은 건축물의 모서리, 그리고 문짝과 문틀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의 구조물에 적용된다. 이렇게 그림에 덧대진 구조물은 그림자를 만들고, 그 그림자가 사실적인 묘사와 어우러져서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서는 사실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가상공간(그림 속 상황)과 현실공간(그림 속 상황이 펼쳐지는 책상머리)이 어우러지고, 일루전(그림)과 실제(입체 구조물과 특히 그림자)가 직조되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경계를 지우는 물에 대한 인식 이후, 재차 탈경계의 인식과 만나진다. 나아가 작가는 아예 오브제를 도입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각종 크고 작은 병의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에게 그림은 어쩌면 가상공간과 현실공간, 일루전과 실제와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한, 그 긴밀한 상호작용을 모색하기 위한 형식실험의 장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개인사적이고 보편적인 그리고 서사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이렇듯 형식실험을 위한 계기를 열어 놓는다. 저부조 형식의 입체 구조물이 사실적인 묘사와 어우러져서 마치 책장을 열면 책속의 이미지가 입체로 일어서는 팝업 북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리고 나아가 오브제의 도입으로 인해 입체와 평면의 경계를 허물면서 그림의 외연을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의미내용과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동시에 특히 형식적인 면에서 또 다른 복선이 수행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제는 거의 아무도, 심지어는 철학자들조차도 이성의 명징성과 정직성을 믿지 않는다>, <어떤 재능도 추구할 미션도 추구할 열정도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자격도 없지만 그러나 보상받길 바란다>. 각각 아홉 개의 풍선 표면에, 그리고 스물다섯 개의 풍선 표면에 다양한 이미지와 함께 이상과 같은 텍스트가 기입된 일종의 모자이크 회화다. 모자이크 회화란 일종의 편집된 회화로서 편집하기에 따라서 완전한 문장이 되기도 하고 오문이 되기도 한다. 부분(텍스트)과 전체(콘텍스트)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그리고 하나의 문장이 가능해지는 문법에 대한 인식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정작 완전한 문장보다는 오문의 경우이다. 오문이 문법의 실체를 더 잘 드러내기 때문이며, 문법 자체에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며, 문법으로 대리되는 인위적인 질서의 틀을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문법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엄밀하게 오문 같은 것은 없다. 문법이 소위 정상성 언어를 위한 것이라면, 그 문법이 파열된 틈으로부터 비정상성 언어(이를테면 시)가 생성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이처럼 언어를 매개로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림은 일종의 개념미술처럼 읽힌다.

더불어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아버지와 관련한 추억을 되불러온다. 살아생전 온갖 직업을 전전하시던 아버지가 가장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오래 하신 일이 바로 풍선 판매였다. 작가는 유년시절 스카치테이프로 풍선 끝에 가녀린 실을 매달아 붙였던 일을, 그리고 풍선에 일일이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부풀리던 일을 기억해낸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형형색색의 알루미늄 호일 재질로 만든 풍선은 작가에게 곧잘 꿈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수입산 풍선이 이국적인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는 비록 풍선을 파셨지만, 사실은 꿈을 파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가는 아마도 오문과 비정상성 언어를 통해서 오히려 더 오롯해지는 유년시절의 꿈을, 자신의 꿈이면서 어느 정도는 아버지의 것이기도 한 꿈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 대부분은 맥락 속에서 그것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원하는 그것을 모른다>. 가운데 미금역이 있고 홍콩과 뉴욕 등 세계도시들에서 발췌해온 총 다섯 개의 빌딩들이 투시도법으로 그려진 대형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작가는 일종의 문명사적 논평을 시도한다. 어슷비슷한 도시들. 겉으로는 차이를 내세우지만, 사실은 서로 닮아가는 도시들. 그 닮은꼴의 도시들을 견인하는 계기는 후기 자본주의와 다국적 기업이다. 현대도시는 사실상 후기자본주의 풍경이며 다국적(기업) 풍경이며 전광판 풍경이다. 이 그림은 자본이 그려낸 현란한(유혹적인) 풍경 속에서 소외되는 현대인의 초상을 암시한다.




<우주인과 두 신>. 쌍을 이루는 두 그림으로서, 각각 터키 이스탄불 소재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내부와 외부의 정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작가는 또 다른 문명사적 논평을 시도한다. 역사적으로 소피아 성당은 동서양 문명의, 종교의 충돌과 대립과 융합을 상징하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비잔틴 양식 건축물이다. 두 신이라는 제목에서 암시되듯 이질적인 두 자장(이념과 이데올로기, 가치관과 세계관 등 정신문명의 개념을 대리하고 아우르는)이 하나로 만나지는 접점에 대한 코멘트를 함축하고 있다.

더불어 그림 양쪽 전방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저부조 형식의 책들의 칼럼(원주)이 그림을 전면과 후면으로 구분하면서, 내진감 곧 그림 안쪽에 깊숙한 공간을 만든다. 그 자체가 마치 무대의 커튼을 연상시키며, 그렇게 열려진 커튼 안쪽으로 보이는 무대를, 무대 위에서 상연 중인 연극 내지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작가의 다른 그림들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성질로서, 작가 자신의 삶의 전망을 객관화시키고 대상화시키는(무대 위에 올려놓는) 경향과 태도를 엿보게 한다.

<당신은 달에 다녀온 이후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뉴욕 빌딩 사이로 우주인과 버스가 있는 그림이다. 달은 인류에게 꿈과 희망과 이상을 상징했다. 그런데 막상 그토록 고대했던 달 여행을 실현한 이후에 인류의 꿈과 희망과 이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중세 기사도 문학의 한 형식으로서 연애시라는 장르가 있다. 그런데 그 생성배경이 흥미롭다. 기혼부인을 애인으로 삼아 그 애인을 상대로 구애의 편지를 주고받는 것인데,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사랑을 전제한 것인 만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자기연민의 정서를 모드로 승화시킨 경우이다. 소위 궁정풍의 사랑으로 알려진 이 현상에 프로이트는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특정 시대의 소산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임에 주목한다. 즉 사람들은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고, 그 실현 불가능성으로 아파한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손에 쥐어주면 그 게임은 끝이 나야 하는데, 다른 대상을 그 자리에 재설정함으로써 그 게임을 유지한다는 것. 아마도 현실원칙이 현실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과 이상과 꿈이 현실을 견인하는 부조리한 인간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 그림은 달 여행 이후 지금껏 달에 투사했던 인류의 욕망의 질이 달라졌음을 주지시키며, 적어도 달에 대해 꿈꿀 수 있었던 달 여행 이전이 더 행복할 수도 있었겠다 싶은 역설을 주지시킨다. 이로써 작가는 현실원칙의 대상으로서보다는 꿈의 대상으로서의 달에, 그리고 그 달로 대리되는 인간의 욕망에 주목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간파한 것처럼 꿈을 실현한 순간은 혹 꿈이 상실되는 순간이며, 하나의 꿈이 다른 꿈으로 대체(전이)되는 순간은 아닐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가라>. 여러 개의 문이 점차 좁아지는 투시도법으로 그려져 있고, 입체 구조물로 덧붙여진 맨 앞쪽 문을 열면 눈이 내리는 풍경의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는 설치작업이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그 제목을 발췌해온 이 작품에서 문은 경계를 상징하며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문을 열면 보이는 방들은 작가의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는 추억의 방이며 기억의 방이며 무의식의 방이다. 그런가하면 흡사 프로스트의 <두 갈래의 길>에서처럼 미처 가보지 못한 내 삶에 제시된 길들을, 미지의 미답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저마다의 무의식의 실체(방)에 직면하게 하고, 삶의 메타포로서의 경계 앞에 서게 한다.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선반 위에 채색된 병들이 진열돼 있는 설치작품이다. 병들의 표면에는 각종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병의 구획된 형태 탓에 마치 동물들이 병 속에 밀봉된 듯한 느낌이다. 동물들로 대리되는 자연을 인간 위주의 편의에 따라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채집하고 분류하는, 명명하고 재단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타자, 나와 너와의 일그러진 관계를 풍자하는 것 같다. 이와 함께 구획된 형태의 병은 제도를 상징하며, 그 제도에 자기를 맞추는 현대인의 초상(제도적 인간)을 보는 것도 같다.

<당신의 승리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와인 병위에 퀸과 킹이 그려진 체스 마개가 있는 설치 작업이다. 서양에서 체스 판은 동양에서의 바둑판이 그런 것처럼 세계의 축소판을 상징한다.

. 눈 내리는 풍경 속에 교회와 쌓인 책들 위로 우주인이 발 딛고 서 있는 테이블 그림이다. 테이블 위에서의 우수, 정도를 의미할 이 제목처럼 작가의 모든 그림은 사실 테이블 위에서의 공상을 옮겨 그린 것이다. 작가는 개인사와 보편사를, 유년시절의 추억을, 문명사적 비전을 책상 위로 호출한다. 이렇게 호출된 것들에게서 알 수 없는 우수가 감지된다. 진즉에 예술가를 우울한 기질의 소유자로서 알아본 알브레히트 뒤러에게 예술가는 사색가를 의미했다. 그가 우울한 것이 사색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작가가 책상머리로 불러들인 사색의 정경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사색의 나래를 펴게 하고, 또 다른 세계에 대해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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