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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 반기능주의와 재정의되는 사물들

고충환

최승호 / 반기능주의와 재정의되는 사물들




가장 기능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 일체의 장식미를 배제한 기능주의의 산물이며 모토다. 사물의 가장 기능적인 정점을 겨냥한 사물의 경제학이다. 그렇다면 사물이 기능을 상실했을 때에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적어도 기능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사물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덩달아 아름다움도 상실되고 만다. 과연 그럴까. 기능적인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기능 위주로 사물을 재는 논리이며, 기능적이지 못한 것을 억압하는 배제의 논리이다. 도대체 기능적이란 무슨 의미인가. 기능적인 사물, 기능적인 인간, 기능적인 세계는 어쩌면 제도주의와 자본주의가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한 욕망이며 도덕률이며 경제학일지도 모른다. 기능의 대상범주를 사물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장시켜놓고 보면 이렇듯 제도의 기획이 보이고 자본의 욕망이 보인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기능적인 인간은 군대이며 로봇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기능적인 세계는 다국적 기업의 기획인 전 지구의 시장화를 의미한다. 뭔가 세기말적인 비전이 떠오르지 않은가. 기능적인 것이 아름답다는 모토 속에서 사회학과 미학은 하나로 만난다. 혹은 공모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기능에 대한 이야기는 기능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능에 종속된 인간학과 분리될 수가 없다.




여기에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이 있다. 아니, 최승호에 의해 일부러 의도적으로 기능을 박탈당한 사물들이다. 절반으로 절개된 세면대와 십자가, 평형자와 카메라, 해머와 라이플총, 바벨과 기타 강철 소재의 연장들, 가운데 부분이 없는, 양쪽 가장자리 부분만이 하나로 접붙여진 액자와 테이블, 표면에 구멍이 뚫린 탁구대, 속을 따낸 가스통, 그 표면에 세계지도가 뚫려있는 칠판이다. 기능주의에 의하면 사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기능 탓이지만, 이처럼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도 여전히 아름답다. 더욱이 상식적인 어디에도 등재되지 못할 이 기묘한 사물들은 기능주의에 내장된 억압의 논리와 배제의 논리를 폭로시키고, 사물이 아름다운 이유가 기능이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사물의 다른 기능을 주지시키고, 그 기능이 달라지면서 의미도 덩달아 달라진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기능주의 시각이 폐기된 공백으로부터 사물의 다른 기능들이, 다른 의미들이 전망으로 열린다. 그럼으로써 사물들의 기능과 의미가 졸지에 애매모호해진다. 사물들이 상식으로부터 일탈되면서 어떤 미증유의 아우라를 덧입는다고나 할까. 다시 태어난 사물들? 아니면, 원래 잠재돼 있던 기능과 의미들이 발굴되고 복원된 사물들? 이 기묘한 오브제들은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발하면서, 이처럼 사물의 존재의미가 재규정되고 재정의되는 지점 앞에 서게 만든다.

더욱이 작가는 아이러니한 제목을 부쳐 이 알 수 없는 사물들로 하여금 알레고리에 빠지게 만든다. 자기 외적인 다른 의미들을 파생시키게 만든다. 도대체 이 사물들의 자기적인 의미, 결정적인 의미, 최종적인 의미 같은 것은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자기적이고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의미(혹 의미부여)를 거부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처럼 다른 의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면서 결정적인 의미를 거부하는 사물들이야 말로 작가 최승호의 근작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절반으로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거운 해머를 <아버지의 발>이라고 부르고, 절반만의 평형자를 <물을 싣고 가는 기차>라고 명명한다. 쇠잔한 아버지의 삶은 여전히 무겁고, 평형자 속엔 물이 담겨져 있다. 절반만의 평형에 대한 논평? 평형의 의미의 재규정? 그리고 속을 파낸 가스통을 <세월>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세월이란 주어진 삶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과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칠판에 세계지도를 그리는 대신 아예 뚫어놓았다(세계사). 세계가 자꾸 이미지화되면서 정작 그 실체는 오히려 더 희미해져가는 형국(이미지만 있고 실체는 없는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근작에 대해서 작가는 사물을 절개한다고, 수술한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기능주의 시각을 절개하고 수술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물의 숨은 기능(시적 기능?)을 발굴하고, 잠재적인 의미(비정상성 언어 내지는 일탈적 의미?)를 복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어의 의미는 용법에 따른다고 했다. 언어의 쓰임새가 달라지면 그 의미도 덩달아 달라진다는 말이다. 기능주의 시각을 걷어내고 보면 사물의 기능은 졸지에 오리무중에 빠지고 그 의미는 풍부해진다. 최승호의 기묘한 오브제들은 이렇듯 풍부한 의미다발과 함께 재정의를 요구해오는 낯 설은 사물들이며 세계 앞에 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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