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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만 / 자연 속에 늙은 몸을 누이다

고충환

김중만 / 자연 속에 늙은 몸을 누이다



심적 거리 혹은 미적 거리라는 말이 있다. 사물을 더 잘 볼 수 있고 사태를 더 잘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적당한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거리 여하에 따라서 사물이 다르게 보이고 사태가 다르게 읽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멀리 떨어져서 사물을 보면 분위기가 보이고(숫제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동떨어지면 사물은 기억처럼 흐릿해지고 애잔해질 것이다. 그 극단에서 사물은 그리움으로 변한다), 가까이서 보면 사물의 형태가 보이고, 다가가서 보면 사물의 질감이 보인다. 이렇듯 사물의 됨됨이를 스펙트럼(주름?)으로 그려볼 수가 있을 것인데, 한쪽 끝으로 갈수록 사물은 흐릿해지고, 반대편에 가까워지면서 사물은 오롯해지고 즉물적이게 되고 변태된다. 알만한 됨됨이와는 다른 종류의 비전을 열어 보이고 다른 표정을 연출해 보이는 것이다. 결국 거리는 사람의 문제이며,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가, 사물에 감정이입한 정도와 교감의 강도가 이 모든 비전의 스펙트럼을 분기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김중만이 한국의 자연을 소재로 한 사진으로는 처음으로 전시를 열었다. 그동안 아프리카의 야생에서부터 문명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있는 패션과 대중적인 스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종횡 무진하다가 불현듯 한국의 자연에 주목하게 된 것이며,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구가하다가 마침내 뿌리의식에 정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연스런 변화로 볼 수도 있겠고, 잠시 호흡을 고르기 위한 쉼표 정도로 볼 수도 있겠다. 아니, 적어도 피날레 내지는 피니시 만큼은, 이라는 식의 어떤 절실함의 계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그의 전작에 절실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야생과 꽃, 패션과 인물사진 등 그동안 그가 지나쳐온 모든 사진들은 절실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었고, 매 순간을 정점으로 이끄는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문제는 소재가 아니라, 그 소재의 어떤 순간(소재의 소재다움이 오롯해지는 순간)을 보아내고 불러내는 작가의 눈(감각?)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의 눈이 한국의 자연이란 소재에, 뿌리의식에 꽂혔다.

근작에서 작가는 요선암, 광대곡, 한탄강, 해인사, 남한강, 북한산 등 한국의 산하를 배경으로 돌, 물, 나무, 풀 등의 자연소재를 카메라에 담았다. 뿌리의식이 절실해서일까, 사진들 중에는 피사체와 직면(독대?)하는 식의 근접 촬영한 사진들이 많고, 이 사진들이 묘하게도 뿌리의식을 더 잘 반영하고 더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사물을 멀리서 보면 형태가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질감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변태된다고도 했다. 바위를 근접 촬영한 작가의 사진에선 바위의 질감이 보이고 몸의 질감이 감지된다. 안쪽에 적당한 그림자 내지는 어둠을 품고 있는, 마치 은밀한 신체의 일부인 것 같은, 청년이나 처녀의 것이라기보다는 청년이나 처녀를 지나쳐온 노년의 것인 것 같은 몸의 질감이 바위의 질감에 포개진다.

그런가하면 사물들을 멀리서 보면 관계가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얽힘이 눈에 들어온다. 관계의 개념이 저마다의 개체성을 유지하는 한에서 서로 대면하거나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얽힘이란 개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해체되는, 그리고 그 지경 그대로 서로에게 동화되고 동질화되는 차원을 말한다. 이렇게 바위의 틈새에 둥지를 튼 이름 모를 풀꽃은 그대로 바위의 일부인 것 같고 신체의 부분인 것 같다.
자연에는 주역이 따로 없지만 사진에는 주연이 있다. 작가의 사진에선 바위가 주연에 해당하는데, 사진에서 바위는 풀과 어우러지고 나무와 하나가 된다. 때로 나무는 화면 속에 직접 들어오는 대신 바위 위에 길게 드러누운 그림자의 형태로 암시되는데, 부드러운 톤의 음영이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지운 잎사귀들을 수런거리게 하는 미풍을 느끼게 한다(그림자의 속삭임). 그리고 바위는 특히 물과 어울린다. 물은 때로 작가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투영하는 거울이 되고(시간의 투영), 더러는 작가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어둠의 역할을 도맡는다(나의 어두운 면). 수면에 미동처럼 잔잔한 파문이 이는, 그래서 그 잔잔함으로 인해 오히려 그 이면의 거센 파고를 더 강하게 환기시키는 물의 심성이 어머니를 닮았고(나의 어머니의 마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물 알갱이가 부서진 마음을 떠올려준다(부서진 마음 후의 추적). 이처럼 물은 그 속에 격정을 품는데, 잔잔한 수면과 수평으로 면해있는 절벽이 통곡의 벽을 떠올려주고(눈물의 벽), 그 물 색깔 그대로 눈물의 색깔을 닮았다(눈물의 색상). 이렇듯 충분히 늙어 밋밋해지고 둥그스름해진 바위의 미덕은 포용력이랄 만하고, 그 깊게 패인 주름 속에 화려하고 아팠던 시간을, 더러는 산산이 부서지기도 했던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조금은 수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변명을 하자면 사진을 읽는 방법과 관련해서 일정한 수사는 피할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다큐멘터리나 르포처럼 기록성이 강한 경우나(그런 경우라면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의미맥락을 짚어주면 될 일이다) 콜라주나 합성사진처럼 조작과정이 개입되거나 두드러진 경우(이 경우 역시 매체특정성과 더불어 조형적이고 미학적인 의미맥락을 짚으면 될 일)라면 모를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사진은 원체 문학적 속성이 강한 장르라는 생각이고, 흡사 문학적인 서사를 압축해놓은 이미지라는 생각이다. 작가가 부쳐놓은 제목과 사진에서 받은 인상을 결부시켜 풀어본 것이지만, 의외로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심성이 심리적이고 유비적이고 조금은 어둡다(?)는 생각이 든다.
어둡다? 자연에 심성 같은 것이 있다면, 모르긴 해도 그 심성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가까운 것일 터이다. 빛은 청명한 이성처럼 명명백백하지만, 명명백백하지 않은 것을 위한 자리가 없고 무엇보다도 우수가 없다. 우수는 어둠의 몫이다. 그렇게 작가는 한국의 자연에서 어둠을 봤고, 우수를 봤고, 늙은 어머니의 품(몸)을 봤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서는 자연의 품성이며, 지모이며, 원형적인 어떤 실체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뿌리의식의 실체와 교감하는 것이다.
작가는 인물사진을 찍을 때 특히 모델의 눈빛과 손 표정에 주목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심지어는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스타들마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 것이며, 대개는 그 혹은 그녀의 콤플렉스가 눈빛과 손에 표정으로 반영된다고 본 것이다. 콤플렉스를 캐내려는 악취미가 아니라, 콤플렉스가 오히려 그 혹은 그녀의 인간미를 돋보이게 하고, 이로써 자연스런 포즈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본 것이다. 그 혹은 그녀만의 존재감이 오롯해진다고나 할까. 겉보기에 화려한(혹은 연출된) 외장이 아니라 그 이면의 몸 언어를 캐내려는 것인데, 소재가 달라졌다고 해서 이런 작가의 의도와 감각이 덩달아 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한국의 자연을 소재로 한 일련의 사진들에서 작가는 단순한 외장 즉 자연의 감각적 닮은꼴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원형적 질감 같은 어떤 것, 자신의 뿌리의식이 잇대어져 있는 어떤 실체에 그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대로 <침묵의 시간들-바위>라는 주제에서도 확인된다. 주지하다시피 침묵은 말 이전의 차원에 속한다. 말로 한정되거나 환원될 수는 없는 차원, 오직 느낌으로서만 교감되고 공유되는 차원, 말의 원천으로서 의미가 자유롭게 재정의되고 재규정될 수 있는 차원이다. 그 차원으로부터 작가는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순간이 영원으로, 무의미가 의미로 바뀌는 찰나를 탐색한다. 그 찰나를 보아내고 불러낸 사진은 어쩌면 마술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 그대로를 빼닮았지만, 사실은 사진 속 실제는 그 어디에도 없는 부재하는 것이며, 이처럼 부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또 다른 환영의 기술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아이러니가 아니라면 사진은 좀 김이 빠진다. 허구적 실제를 생생한 실제로 바꿔놓는 사진 고유의 아우라랄 만하다.

작가는 이 모든 사진들을 흑백으로 찍었다. 이 흑백사진들은 왠지 관념적으로 보이고 관조적으로 보인다. 현란한 색감 탓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잘 보이는데, 특히 질감이 그렇다. 흡사 늙은 노년의 피부와 깊고 짙게 패인 주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흑백 모노톤의 음영이, 그리고 그 속에 거울처럼 자리한 물웅덩이가 작가가 천착한 뿌리의식의 실체를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 실체 그대로 전통적인 수묵 산수화를 떠올려준다. 대개는 피사체로 화면을 가득 채운 근접촬영 탓에 정작 화면 어디에도 여백은 없지만, 작가의 사진에서 여백은 또 다른 형태와 경우로서 존재한다. 근접촬영은 피사체를 변태시킨다고 했다. 피사체를 다른 의미로 보게 하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자연의 질료가 해체되고 재편되는, 그럼으로써 정서적 환기가 배가되는 또 다른 시지각적 경험 속에, 그 비결정적인 계기 속에 일종의 여백이 작동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정리를 하자면 여백은 그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인식 혹은 지각적인 공간을 의미할 수 있다. 아마도 이렇듯 결정적인 의미로는 고정되지 않는 여백이, 그리고 그 여백이 품고 있는 정서적 환기야말로 다름 아닌 작가가 그토록 찾고 싶은 뿌리의식의 실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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