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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연 / 상처와 치유

고충환

강이연, 상처와 치유



사이와 탈경계. 강이연의 경우도 그렇지만, 동시대 작가들의 두드러진 한 특징이 있다면 가상현실을 기정사실화한다는 것이다.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을 뚜렷하게 구별하던 것에서, 감각적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호작용성과 탈경계에의 인식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 이런 인식의 변화에는 당연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 저마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비전을 즉각적인 가상현실로 아웃풋 시켜주는 것. 이렇게 출력된 가상현실은 감각적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감각적 현실과는 전혀 다른(혹은 아예 최소한의 의미연관도 찾아볼 수가 없는) 종류의 비전을, 정체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어둑한 공간 여기저기에 캔버스들이 놓여 있다. 캔버스의 표면에는 빛과 그림자가 길항하고 부침하면서 만들어낸 움직이는 신체의 실루엣 형상이 보인다. 흡사 캔버스 뒤에서 누군가가 온몸으로 부딪쳐오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 같다. 그래서 캔버스 뒤쪽을 확인해보면 사람도 무엇도 없다. 심지어 캔버스 표면에 돌출돼 나오는 신체의 실루엣을 따라 손으로 더듬어보면 거짓말 같은 평면이 감지될 뿐이다. 평면이면서 돌출된 것 같은 느낌, 부동이면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 없으면서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실제가 착각임이 드러나고 착각이 효과임이 드러나는 반전이 일어난다. 실제처럼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일루전이 사실은 영상효과였음이 드러난다. 미리 제작된 영상을 캔버스의 표면에 정교하게 핀을 맞춰 투사한 것. 그래서 영상을 거두어들이면 캔버스 표면의 일루전도 거짓말 같이 사라져버린다. 마치 모더니즘 패러다임(엄밀하게는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텅 빈 캔버스 이후를 보는 것 같다. 부재를 통해 존재(혹은 존재의 흔적?)를 증명하는 존재의 역설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존재란 사실은 하나의 상이며 일루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불통과 상처. 크고 작은 캔버스들이 벽면 위에 걸려있다. 캔버스 뒤쪽에선 누군가가 표면 위로 온몸을 부닥쳐온다. 마치 캔버스 표면을 뚫고 나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캔버스의 표면은 견고한 막과도 같아서 결코 쉽게 찢어질 것 같지는 않다. 이로써 나는 진정 너와 소통하고 싶지만, 나와 너를 가로 막고 있는 막이 소통을 가로 막는다. 그래서 불통이 상처가 된다. 캔버스 뒤쪽에 상처가 된 불통이 차곡차곡 쟁여지고, 그 상처의 강도에 따라 나의 몸부림도 덩달아 격렬해지고 잦아든다. 이렇듯 몸부림은 상처를 표상한다. 그리고 나는 몸부림과 함께 말이라는, 어쩌면 더 실체적으로 와 닿을지도 모를 신호를 내보내 너와의 소통열망을 표현한다. 그러나 막 안쪽에서 내가 하는 말은 막 밖에 있는 너에게 들릴 수는 있어도 알아들을 수는 없다. 너는 결코 몸부림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고, 말에 실린 메시지를 해독할 수가 없다. 이렇듯 너를 향한 나의 소통열망은 불통으로 되돌아오고, 대화하고픈 소망은 하릴없는 독백으로 흩어질 뿐이다. 너에게 나는 온통 애매하고 모호하고 흐릿한, 중의적이고 다의적인 무슨 모르스부호 같은 추상적 기호며 알 수 없는 기호, 오리무중의 기호로 읽혀질 따름이다.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는 영상의 막이지만 어떤 단단한 벽보다도 견고한 캔버스 뒤에 갇혀 갑갑해하는 너, 어쩌면 보이지 않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를 너는 꼭 나를 보는 것 같다.

따뜻한 치유. 어둑한 공간 여기저기에 알 수 없는 오브제들이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다. 그 오브제들은 사실 반투명한 종이 재질로 정교하게 만든 것들인데, 무슨 꽃 같기도 하고 해파리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꽃 같기도 하고 해파리 같기도 한 오브제에 다가가면 오브제가 따뜻하게 불을 밝힌다. 오브제 속에 타이머 기능이 내장된 조명등이 숨어 있어서 관객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 센서의 작동으로 불이 서서히 밝혀지는 것. 그렇게 공간은 관객이 없으면 어둑했다가도 관객이 다가서면 마치 관객을 맞아들이기라도 하듯 가만히 불을 밝힌다. 바로 상호작용성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캔버스 작업이 불통에 의한 상처를 다루고 있다면, 이 오브제 작업들은 그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고 보듬고 치유해준다.
더불어 그 오브제들을 무엇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공간의 성질이 바뀐다. 이를테면 종이꽃은 흔히 죽음과 관련이 깊다. 그 경우에 처음의 어둑한 공간은 죽음을 상징하며, 관객에 대한 반응으로 불 밝혀진 종이꽃이 죽음의 공간을 삶의 공간이며 재생의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그럼으로써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공간경험을 안겨준다. 그리고 오브제를 해파리로 읽으면 공간은 바다가 되고, 심연과도 같은 무의식의 공간으로 바뀐다. 그럼으로써 사유의 바다며 존재의 바다 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가하면 그 오브제는 다만 꽃처럼 보일 뿐 꽃이 아니며 해파리처럼 보일 뿐 해파리는 아니다. 이런 애매한 오브제가 야외의 나뭇가지에 매달리면 알 수 없는 오브제, 오리무중의 오브제, 정체불명의 오브제, 일종의 변종(혹은 변이 생명체?)의 출현이라고 하는 의외의 상황을 열어 놓는다. 무엇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는, 그러면서도 타자에 대해 열려 있는 이 오브제와 그 의미와 정체성(그 속에 타자를, 차이를 내포한)이야말로 작가가 시종 천착해온 주제인 사이와 탈경계에의 인식을 표상하는 것이 아닐까.

미디어 이론과 관련해 신기원을 연 경우로서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연이은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벤야민을 따라 전자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정식화하게 해준)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곧 디지털환경이 열어놓은 가상현실 이론은 현대미술의 풍경을 눈에 띄게 바꿔놓았다. 이로써 현대 미술가는 가히 가상현실 시대에 살고 있고 창작을 한다고 할 만하다. 강이연의 작업은 컴퓨터와 디지털 프로세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서 기술적인 정교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출력된 결과물은 시적이고 정적이고 따뜻한 감성으로서 다가온다.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디지털 프로세스가 호출되고, 감각적 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가상현실이 호명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작업이 갖는 미덕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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