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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희 / 회화의 논리

고충환

유주희, 회화의 논리



형-태 시리즈(2001-2004), Landscape over being 시리즈(2005-2008), 무제 시리즈(2010-2011). 그동안 유주희가 그린 그림들이다. 물론 시리즈가 제작된 연도가 결정적이지는 않다. 시리즈별로 나타난 유형화된 패턴이 특정 시기를 넘나들면서 서로 호환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 제작된 근작에서도 그렇지만, 그 경우의 가능성은 앞으로도 계속 열려있다. 이 가운데 Landscape over being 시리즈를 통해서 유주희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제목이 암시적일 뿐만 아니라, 그림의 형식이 작가의 다른 그림들을 풀어내는 실마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Landscape over being이란 제목을 풀어보면 대략 존재 저편 혹은 존재 너머의 풍경을 의미한다. 풍경은 존재가 속해져 있는 곳과 존재가 속해져 있지 않은 곳으로 갈린다. 현실 속에서 이렇듯 존재가 갈리고 풍경이 나뉘는 지정학적 장소로는 수평선과 지평선이 있다. 그 앞에 서면 아득해진다. 내가 속해져 있는 세계에 다른 세계가 연이어진 접경을 볼 수가 있고, 그렇게 미지의 세계가 열어놓는 전망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접경이며 전망 위로 시가 나오고 예술이 샘솟는다. 그 전망 위로 파스칼은 신을 봤고, 칸트는 자연의 숭고를 봤다. 혹자는 절대고독이나 완전한 좌절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신이며 숭고며 고독이며 좌절은 다 무엇인가. 그것들은 알고 보면 그 전망 앞에 선 주체가 자기 내면으로부터 끄집어 올린 것들이다. 실제 풍경이 내면 풍경을 불러내는 일종의 주술적 계기로서 작동한 것이다. 그래서 종래에는 실제 풍경과 내면 풍경이 서로를 불러들여 혼연일체가 되고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나는 풍경의 일부로서 스며든다. 마침내 그 다른 세계며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이 시리즈로 제작된 작가의 그림은 어떤가. 작가는 화면을 양분하는데, 풍경처럼 화면의 아래쪽에 치우쳐 양분한다. 그리고 화면 아래쪽 면을 단색의 전면이 균질한 화면으로 밋밋하고 중성적이고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하게 처리한다. 그리고 아래쪽 화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면을 차지하고 있는 위쪽 화면을 이와는 다르게 처리하는데, 무작위로 흘린 흰색과 검은색 안료를 스퀴지를 사용해 화면의 가장자리 끝까지 밀어 붙인다.

그 과정에서 흰색과 검은색 안료가 서로 섞이는데, 그 형태가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다. 여기까지는 분명 재현논리보다는 형식논리가 작용한다. 이를테면 결정적인 화면과 우연적인 화면이 대비되고, 부동의 화면과 유동의 화면이 비교되는 식의.
이처럼 형식논리가 만든 그림은 그러나 놀랍게도 어떤 재현적인 성질을 불러들인다. 마치 내가 속해져 있는 정적인 화면 위에서 동적인 화면 저편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구름의 형상을 보는 것도 같고, 조작되고 왜곡된, 우연을 가장해 연출한 흑백사진 이미지를 보는 것도 같다. 이를테면 옆으로 퍼지면서 부분적으로 뭉개진 얼굴 이미지 같은. 기본적으로 그 형상은 우연적이어서 사실은 보는 사람들 저마다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그 풍경에서 존재의 저편을 쳐다보고 아득해질지도 모르겠다.
이와 함께 화면 아래쪽이 무표정하다고는 했지만, 여기에 작가는 여러 다양한 단색을 끌어들여 감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색채로는 원색보다는 간색을 선호하는 편인데, 짙은 군청색이 칠흑 같은 밤의 서정을 불러일으킨다면, 그래서 고독하고 아득한 심연 속에 빠트린다면, 하늘하늘한 파스텔 톤의 간색이 여성스러움을 더한다. 그리고 그 분위기 그대로 위쪽 화면에서 암시되는 일루전에 부응하면서 형식적인 그림을 재현적인 그림으로 탈바꿈시키고, 무표정한 그림을 풍경적인 그림으로 바꿔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그림 자체는 재현논리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형식논리의 소산이다. 다시, Landscape over being이라는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제목이 떠올려주는 재현적인 성질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사실 형식논리로 읽혀져야 한다. 이를테면 존재는 감각적이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재현적인 지평에 속해져 있다. 그리고 존재 저편은 재현적인 현실과는 다른 곳, 예술의 자율성과 회화의 내재율이 준칙으로서 작동하는 곳, 회화의 본성(본질)이 풍경으로 열리는 곳이며, 형식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전망으로서 열리는 곳이다. 작가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전망을 쳐다보고(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폈듯 그 전망이 재현적인 성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형식논리와 재현논리가 길항하고 부침하는, 무슨 회화의 방정식 같고 변증법 같다. 그리고 그 방정식이며 변증법 그대로 비교적 형식논리에 엄격한 편인 작가의 추후 그림을, 가능한 변화를 예시해주는 예고편 같다.

그리고 또 다른 시리즈 그림을 보자. 이를테면 무제 시리즈에서 작가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형식논리를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해 그리는 편이다. 그림은 한눈에도 반복과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화면 위에 흰색과 검은 색, 흰색과 갈색, 흰색과 파란색을 무작위로 흘려놓고 마치 드로잉 하듯 혹은 붓질 하듯 스퀴지로 긋는데, 이번에는 길게 긋지 않고 짧게 긋는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밑칠과 덧칠이 하나로 섞이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 형상은 비정형이고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다. 흔히 회화에서 볼 법한 중첩된 터치가 짧게 끊어 친 중첩된 스퀴지 자국으로 대체됐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차이가 있다면 보통 그림에서 중첩된 터치는 가까이서 보면 무분별하게 보이다가도 일정한 거리(심적 거리 혹은 미적 거리)를 두고 보면 어떤 재현적인 형상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은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그저 무분별한 스퀴지 자국만이 눈에 들어올 뿐, 알만한 어떤 형상도 암시하지 않는다.
이번에야 말로 작가는 최소한 우연적으로라도 재현적인 형상을 암시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심지어 스퀴지 자국을 한쪽 방향으로 적용하게 되면 속도감이나 방향성이 감지되기 마련인데, 스퀴지 자국을 균등하게 남겨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은 오히려 스퀴지 자국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일말의 운동성마저 화면 전체에 공평하게 퍼트려 평면성에로 환원되도록, 평면적 화면이 유지되도록 의도하거나 조율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주지하다시피 평면성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결정적인 키워드 중 하나이다. 가급적 재현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운동성마저도 암시하지 않으려는, 그럼으로써 모든 회화의 계기들로 하여금 종래에는 평면성의 조건에로 되돌려지게 하려는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논리(엄밀하게는 클레멘테 그린버그 식의)를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준수? 회화가 무슨 답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준수란 표현은 좀 그렇다. 준수가 아니라면 수행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그림에 무슨 개성이 끼어들 여지도 없거니와, 아예 개성을 발휘할만한 그런 종류의 그림도 아니다. 무색과 무취 그리고 몰개성이 열어놓는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무의미한 어떤 경지야말로 모더니즘 형식논리의 지향이 아닌가(이를 통해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진정 무엇을 추구하는가. 회화의 분석철학? 금욕주의가 주는 쾌락? 정신적인 고양?).
그렇다면 작가는 왜 스스로를 이런 회화의 영도지점에다 세우는가. 수행이라고 했다. 엄밀하게는 반복수행이며, 그렇게 반복되는 수행과정 속에서 자기가 지워지고 행위가 투명해진다. 그렇게 오로지 순수한 행위만이 오롯해지는 차원 속에서 작가는 또 다른 차원이 열리는 것을 볼 수가 있을까. 작가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회화가 시작되는 시점 앞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회화의 의미를(아마도 저마다 다른 답을 얻게 될), 본질을(회화의 본질이며 객관 같은 것이 있을까. 여하튼) 자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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