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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 스타를 그리다가 스스로 스타가 된 사람

고충환

스타는 이미지를 먹고 산다. 스타는 일종의 이미지라는 말이다. 스타 자신이 하나의 이미지로 구축된 것이며, 거기에는 최소한의 실재마저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스타들은 그 이미지의 틈새로 자신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부지불식간에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 사람들에게 코드화된 자신의 스타 이미지가 파열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라캉(Jacques Lacan)은 실재계가 상징계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했는데, 자신의 실재가 자신의 상징을 훼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결국 스타가 이미지라는 말은 곧 상징이며 페르소나 곧 일종의 가면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스타를 열망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스타가 된 사람이 있다. 앤디 워홀이다. 아마도 미술사를 통 털어 앤디 워홀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예술가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예술의 경계를 넘어 대중적인 스타랄 만하고, 그 인기는 살아생전과 마찬가지로 죽은 이후에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의 스타 열망은 자신의 신화 만들기에 의해 뒷받침되고, 신화는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를테면 워홀은 자신이 물려받은 실제 이름인 워홀라(Warhola)를 워홀(Warhol)로 개명했고, 성공한 이후에는 더 큰 성공을 위해 자신의 코를 성형 수술했고, 사람들은 워홀의 생일을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워홀은 특히 초상화가로 유명한데, 주로 대중적인 스타를 소재로 한 것으로서 자신의 스타 열망과 무관하지가 않다. 워홀은 어렸을 적부터 말론 브랜도의 초상사진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대중스타에 관심이 많았다. 1962년 8월 사망 이후부터는 마릴린 먼로를, 그리고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직후부터는 재클린 오나시스(일명 재키)를 비롯해 죽을 때까지 약 600여명의 초상화를 남겼다. 초상화의 소재로는 단연 대중스타들이 많았고, 각종 문화계 인사와 예술가들 그리고 정치인들을 망라하는 것이었으며, 죽기 직전에는 레닌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심지어는 미키마우스와 같은 허구적인 캐릭터를, 그리고 모나리자와 같은 미술사적 소재를 차용하는 등 그 폭은 실로 광범위한 것이었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유독 자신의 자화상에 천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양한 버전 가운데는 여장한 모습도 보인다. 남다른 자의식과 함께 동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워홀은 1957년 주식회사 앤디 워홀(Andy Warhol Enterprises. Inc.)을 설립하고, 1963년에는 뉴욕 87번가에 스튜디오 팩토리를 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나 스튜디오를 팩토리 곧 공장으로 명명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은 예술에 대한 선입견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생산에 의해 견인되던 산업자본주의로부터 소비가 핵심논리로 작동하는 상업자본주의로 진화한 당시 시대정황에 걸맞게 마치 상품처럼 소비되는 미술을 지향한 것이며, 그 원천으로서 대중문화에 눈을 돌림으로써 종래에는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와의 경계를 허문 것이며, 이로써 대중에게 더 깊이 파고들 수가 있었다. 예술 다음에 오는 단계로서 비즈니스 아트를 규정한 것이나, 스스로를 상업적 예술가로 자처한 것, 그리고 훌륭한 사업을 최상의 예술로 본 것에서 엿볼 수 있듯 그에게 예술은 비즈니스였고, 팩토리는 그 비즈니스를 실천하는 장이었고, 파티가 그 비즈니스를 현실화해주는 계기였다.

이처럼 워홀의 예술은 자신의 팩토리에서 생산되었는데, 이따금씩 팩토리에서는 비밀스런 파티가 열리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섹시한 유명 인사들만이 이 폐쇄적인 파티에 참석할 수가 있었고, 워홀은 당연히 이 기회를 이용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제작해 그들에게 비싼 가격으로 되판 것이다. 초상화는 대개 똑같은 이미지를 색깔만 약간씩 바꿔가며 몇 장씩 복제한 것이기 마련인데, 워홀 특유의 이미지 생산방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다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팩토리를 드나들었던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 600여점이 제작될 수가 있었다. 이 외에도 워홀은 무려 280여 점의 실험영화를, 그리고 근 500점에 달하는 스크린 테스트를 남기기도 했다. 스크린 테스트는 팩토리를 방문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한 필름으로서 각 약 3분가량의 분량을 담고 있는 일종의 영상 방명인 셈이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워홀은 1969년 실제로 <인터뷰>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유명 인사들이 자신들만큼이나 유명한 다른 사람들을 인터뷰한 기사와 사진을 실은 잡지로서, 기사의 길이는 750단어를 넘지 못하도록 했는데, 사람들이 더 이상 읽지 않고 보기만 할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워홀은 매체에 실린 자신의 기사와 관련해 다만 그 길이와 분량에만 신경을 썼지 정작 내용이 악평인지 호평인지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았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워홀은 이 많은 초상화들을 하나같이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생산기법으로 제작했다. 물론 일부 그림의 경우에 그 위에 아크릴로 덧그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론 판화에 의한 대량복제 방식을 따른 것이다. 대개는 똑같은 이미지가 반복 나열되는 이 이미지들에서 우리는 다만 스타들의 표면적이고 표피적인 이미지만을 접할 수가 있을 뿐, 결코 그 표면을 뚫고 이면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워홀의 천재성이 빛난다. 워홀은 이 소비지향적인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아이콘인 스타의 존재에 대해서 고심했고, 스타는 철저하게 표면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임을 간파했고, 바로 그 표면적인 이미지를 화려하지만 무미건조한 또 다른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다. 묘하게도 똑같은 이미지가 반복 열거되면서 실제로도 표면적인 이미지가 강화되고 강조된다는 느낌이다. 거기에는 스타들 나름의 인격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려는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실크스크린 기법 자체도 그렇지만 그림들은 하나같이 기계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생전에 기계가 되고 싶어 한 워홀 자신의 욕망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워홀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스타란 실재도 없고 인격도 없는 것 같다. 철저하게 표면적인 이미지며 코드화된 상징이 있을 뿐, 그 이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이미지며 상징이 의심받는 순간, 상징의 틈새로 실재가 고개를 내미는 순간 스타는 허물어지고 만다. 어쩌면 워홀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철저하게 스타로 살다간 사람일지도 모르고, 표면적인 이미지로만 살다간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 한 번도 자신의 속을 내어준 적이 없으므로 그의 신화가 지속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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