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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 한국성을 위한 소고

고충환

한국적인 것, 한국적인 이미지며 미의식, 한국성은 어떻게 찾아질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적인 것을 감각적인 표면의 층위에서, 현상적이고 사건적이고 소재적인 차원에서 찾아질 수는 없는 일이다. 표면의 일이란 변화무상한 것이고 그 이면에는 표면을 밀어올린 원인 내지 원동력에 해당하는 무엇, 항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무엇, 원형으로 부를 만한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편안한 옷처럼 자연스럽고 몸에 밴 습관처럼 관성적인 어떤 층위가 있기 마련인 것이며, 한국적인 것은 바로 그 층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충분히 스며들어 체화된, 그래서 미처 의식할 새도 필요도 없이 저절로 배어져 나오는 어떤 차원, 자기를 내려놓은 수동적인 어떤 층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화이부동, 더불어 어울리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김선두, 김택상, 송수련, 유인수, 이종목, 조순호, 차명희, 황창배, 이상 8명의 작가들이 화이부동의 주제를 매개로 한국적인 것의 원형으로 부를 만한 형식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김선두는 이름 모를 들풀을 그린다. 들풀은 그가 전에 그리던 반편을 닮았다. 잘 난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낸 보통사람들에게 작가는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봐주는 사람도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지만 그런 세상의 인심에 아랑곳하지 않는 들풀들에 애정이 오버랩 된다. 그림에서 들풀은 허허로운 여백 위로 무심한 듯 그어진 몇 개의 선들과 찍혀진 점들로 환생한다. 그리고 때깔 좋은 색 띠 속에 수놓듯 촘촘하게 기호를 아로새겨 그네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가 소소하고 정겹다.





김택상은 숨 빛을 그린다. 숨 빛? 호흡과 숨결 같은 생기를 머금은 빛이다. 호흡과 숨결은 들락거리고 그렇게 들고 날 수 있는 통로(숨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통로는 투과하는 성질과 투명한 화면 위로 열린다. 작가는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만큼 섬세한 얼룩과 함께 물빛을 머금은 색감 위로 생기를 머금은 빛이 지나가도록 길을 내어준다. 얼룩이 반(半)가시적인 것은 시간이 비가시적인 것과 같다. 말하자면 중첩된 얼룩은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의 표상인 것. 그렇게 작가는 오로지 물빛만으로, 색감만으로 투명하고 섬세한 빛의 질감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송수련은 심안을 그린다. 마음의 눈을 통해 보면 무엇이 보일까. 자기 내면을 통해 보면 무엇이 보일까. 형상이 없는 형상이 보이고 색감이 없는 색감이 보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순수한 관념이 아니라면 형태도 색감도 영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다만 암시적일 뿐인 형태를 그리고 색감을 그린다. 비정형의 얼룩들과 섬세한 스크래치가 어우러진 화면 위로 때론 흐릿하게 그리고 더러는 분명하게 광점들이 점멸한다. 그렇게 작가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자기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유인수는 얼기설기 연이어진 집들을 그린다. 골목길을 사이로 잇대어진 집들이 도시적이라기보다는 도시의 변방 같고 변두리 풍경 같다. 어떤 집은 투명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집 한 쪽에 심겨진 나무며 조는 듯 가물거리는 가로등이 도시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동네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부재하는 풍경이나 부재중인 정경이 어떤 알 수 없는 향수에 젖게 만들고 가없는 그리움 앞에 서게 만든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풍경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작가는 집이 아닌 동네를 그리고 있었고, 집이 아닌 집이라는 이상을 그리고 있었다.





이종목은 먹그림을 화면 밖으로 불러낸다. 먹그림 그대로를 정교하게 따낸 연후에 그렇게 오려낸 모티브를 벽 위에다 건다. 가장자리(일종의 가둠 틀)로부터 해방된 모티브가 자족성을 획득하면서 그림을 공간설치 작업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이렇듯 공간을 차지한 모티브들이 그림과 조각의 경계를 허물면서, 벽 위에 그림자를 만들면서 일종의 유사 실제 환경을 연출한다. 돌이켜보면 그의 그림은 진즉에 이런 식의 공간 연출을 예고하고 있었지 싶다. 무슨 알 수 없는 기호나 심볼처럼 화면을 유영하는 모티브들을 따로 오려 내는 식의 방법에 용이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변화는 자연스럽다.

조순호는 먹의 본성에 자기를 내맡기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을 통해 먹의 본성이 오롯해진다는 말이다. 특정의 무엇을 그린다는 의지 없이 그저 무심하게 붓을 놀린 것 같은데, 비정형의 얼룩들 위로 새가 보이고 꽃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고 잡풀이 보인다. 이 의외의 형상들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만큼 자연스럽다. 결정적인 형상이라기보다는 비결정적인 형상처럼 보이고, 그만큼 암시적이다. 암시적인 얼룩들이며, 자기 속에 세상만사를 거두어들이는 잠재적인 얼룩들을 그린다고나 할까. 그 얼룩들이 자연의 본성을 닮았고 먹의 본성을 닮았다.

차명희의 그림은 목탄과 아크릴 고유의 물성이 두드러져 보이고 극대화된다는 점에서 회화의 형식논리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계승하고 심화하는 것 같다. 비록 재현적인 그림은 아니지만 그 형식논리의 결과가 어떤 의외의 재현적인 형상을 암시한다. 목탄으로 길고 짧은 선들을 북북 그으면 그 선 가장자리로 목탄 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고 그 위에 아크릴로 덧칠하면 그렇게 떨어진 가루가 가려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하면서 회화적인, 마치 회화의 본성을 실현하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리고 그 화면 위로 마치 눈밭 사이로 희끗희끗 드러나 보이는 잡풀 같은, 강변 위로 부유하는 수초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심의적이고 암시적인 풍경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생전에 황창배의 그림은 한국화와 관련한 형식실험의 첨단이었다. 그리고 그 첨단은 지금 봐도 조금도 퇴색되지가 않았다. 먹그림과 아크릴이 서로의 경계 너머로 어우러지는가 하면 그림 속으로 문자가 거침없이 들어오고, 그렇게 문자는 조형의 한 요소가 된다. 설화와 현실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몸을 섞는가 하면 사사로운 이야기가 서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는다. 경계에 대한 의심과 실천논리가 한국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무색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현재 당연시되고 있는, 한국화단에서의 성과들 중 상당부분이 그의 회화에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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