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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희 / 새벽의 색깔과 깊이

고충환

작가가 하나의 장르와 하나의 기법에 천착하면서 중견 내지 중진에 이른다는 것은 대단한 일도 내세울 만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유독 판화에서만큼은 예외인 것 같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국내에서 판화에 올인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연유로 판화에 입문했던 많은 작가들이 도중하차하거나 다른 장르로 이행하거나 병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하면 천연기념물이라는 자조 섞인 말도 있다. 천연기념물은 보호종이다. 희소가치가 높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강승희를 비롯한 판화 중진 작가들은 어느덧 이런 희소가치를 인정받는 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강승희의 주제는 시종 새벽이었다. 새벽은 어두운 시대를 지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고의 세월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일반적 의미는 아무래도 휴식과 쉼의 계기에서 찾아질 수가 있을 것이다. 새벽은 밤의 끝자락이며 아침의 첫 자락에 해당하는 막간과도 같은 시간이다.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미몽의 시간이며 미혹의 시간이다. 여전히 깨어있는 자는 그 시간을 맞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다. 막간과 경계와 사이, 이는 실상 인식의 문제다. 경계 위에 자의식의 표석을 세우는 일이다. 판화를 매개로 새벽을 여는 강승희의 작업은 이처럼 휴식과 쉼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 위로 호출하는 자의식 내지 인문학적 성찰을 위한 구실이기도 하다. 남을 위해 그리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에게 판화는 수신을 위한 의미기능도 도맡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처음에 도시의 새벽을 그렸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한강변의 새벽을 그리다가 최근에는 백두산과 독도 그리고 제주 오름과 같은 전국에서 채집된 자연의 새벽을 그린다. 엄밀하게 현대도시는 밤도 없고 새벽도 없다. 하루 24시간 풀타임으로 활성을 지속하기 위해 동원된 인공조명의 현란함과 심란함이 있을 뿐. 그리고 새벽 대신 밤의 희미한 그림자가 있을 뿐. 하지만 적어도 자연에는 새벽이 남아있다. 도시에서 한강변으로 그리고 재차 자연으로 이어지는 소재의 변화는 아마도 진정한 새벽을 맞고 싶은, 그리고 종래에는 의식의 새벽에 이르고 싶은 작가의 열망의 여정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송곳이나 칼을 이용해 필요한 도구를 직접 만든다. 기성 도구로는 어려운 섬세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위해서다. 이를테면 끝이 뾰족한 니들을 수도 없이 내려쳐 일일이 점을 새겨 넣는 방식으로 색이 짙은 어두운 부분을 표현한다. 점들이 밀집된 정도에 따라서 성긴 들판이나 빽빽한 수목이 오롯해진다. 여기서 점을 찍는 과정 자체는 물론 모티브의 표현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비우는 수신의 시간이기도 하다. 판에 새긴 선 가장자리로 잉크가 넘쳐나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질감도 인상적이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그리고 하프톤이 어우러져 대비를 강조하기도 하고 내면적인 격조를 느끼게도 한다. 특히 하프톤에서 미세 얼룩과 같은 디테일한 색감이며 질감을 되살려낸 것에서는 작가의 남다른 감각과 공력을 읽을 수가 있다. 이를테면 구름과 같은, 공기의 질감과 같은, 대기의 습윤한 기운과 같은 자연의 물성이 만져질 것 같다. 허허로운 여백과 단출한 구도, 그 속에 섬세한 세부를 품고 있는 깊이, 그리고 농과 담이 어우러진 정경이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이 모든 정경과 인상의 이면에는 새벽의 색깔이랄 수 있는 청색의 범주와 깊이와 차이를 감지해내는 남다른 감각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정적이고 고즈넉한 새벽의 정기를 흡입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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