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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 트라우마, 상처와 대면하다

고충환


낙오자의 TV. TV속에서 여자들이 모여 수다를 떤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불현듯 화면 밖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나를 쳐다보면서 비웃고 저네들끼리 속삭인다. TV는 일방매체다. 상호작용이 아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나를 쳐다보는 것은 실제로는 내가 쳐다보는 것이며, 나를 보면서 비웃는 것은 나의 일방적인 느낌이며, 나를 보고 속삭이는 것은 스스로의 판단이며 진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힐끔힐끔 본다고(감시한다고) 생각하고, 나를 비웃는다고(나는 사람들이 폭력욕망을 투사하는 희생양이다!) 판단하고, 내 말을 한다고(사람들은 나에게 과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진단한다. 나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고, 혼자 진단한다(그리고 처방마저도. 자가진단?). 그러므로 나에게 소통은 어쩌면 진즉에 거세된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불통인 나는 온통 적들의 사회에 둘러싸여 있다. 나는 포위당했다. 제발 나에게 향한 관심의 레이더를 이제 좀 그만 꺼줬으면 좋겠다. 나는 공황장애다. 잉여인간이다. 히키코모리다.




냄새. 히키코모리의 전형적인 특징은 방콕 한다는 것이다(나는 자신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 감옥은 나를 보호하면서 격리시킨다). 방콕 하는 만큼 잘 씻지 않는 편이고, 그래서 몸에선 항상 냄새가 난다(사실은 스스로의 생각이며 판단이며 진단일 것). 항상, 언제나, 심지어는 꿈에서마저(그리고 무의식에서도) 냄새가 난다. 어쩌면 냄새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고 귓속말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냄새는 나의 몸이며 생각이며 의식이며 이성이며 감성이며 느낌이며 존재다. 냄새는 나 자신이다. 이렇듯 나는 곧 냄새이므로 냄새로부터 달아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냄새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은 나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이며(나로부터 달아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또한 어떻게 가능한가. 조르주 바타이유는 어떻게 이 인간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냄새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강박증이다. 


나는 이 강박증으로부터의 엑소더스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깨끗하다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취해서 틈나는 대로(어쩌면 항상) 온몸 구석구석을 닦는다. 그렇게 닦는다고 심지어 꿈(그리고 무의식)에서마저 나는 냄새를 세척하고 세정하고 소독하고 정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 냄새는 죄의식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가 지은 죄가 정확하게 무슨 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모르긴 해도 자신이 사람들에게 거부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냄새를 풍기는 죄(냄새 곧 죄의식에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죄?)일 것이다. 여하튼 이처럼 닦고 씻고 하는 행위며 강박이 냄새며 죄의식을 해소할 수야 없겠지만, 마치 지우개처럼 나를 지우고 종래에는 사라지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냄새와 동격인)로부터의 엑소더스를 감행하고 실현해 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의 엑소더스란 무슨 의미인가? 




정갈함에 대한 찢고 싶은 욕구. 그렇게 나는 적들의 사회에 둘러싸여 있다. 적들은 깨끗하고 순수하고 정갈하다. 그들의 잘 갖춰 입은 정장 스타일은 그들이 정갈하다는 증거다. 도덕적으로 무장돼 있는 질서의 숭배자들이며, 기계부속처럼 제도에 길들여진 삶의 증표이기도 하다. 심지어 군복이나 유니폼과 같은 또 다른 유형의 정복(사회적 정복?)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미셀 푸코는 군대와 감옥을 없는 장소며 부재하는 장소, 초 장소를 뜻하는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그리고 물론 당연하게도) 제도는 이런 군대와 감옥을 가장 이상적인 사회(유토피아?)로 보는 것 같다. 이름 대신 넘버(주민등록번호와 각종 비밀번호)로 호명되는 익명적인 개인들이 기계부속처럼 착착 돌아가는 사회다. 그런 익명적인 주체며 상식과 합리로 무장한 사람들의 기호인, 그러면서 정상성의 기표이기도 한 정장(정장으로 무장한 모습)을 보면 불현듯 찢고 싶어진다. 그 깨끗함을, 순수함을, 정갈함을 훼손하고 싶어진다. 


로트레아몽이 남긴 유일한 장시인 <말도로르의 노래>에는 갓난쟁이의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를 보면 긴 손톱으로 할퀴고 싶다는 욕망이 나온다. 모든 순수한 것들은 훼손하고 싶은 욕망을 부른다. 원래 제사 때는 가장 순수한 것(자신이 소유한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희생양으로 바치는 법이다. 희생양이 순수한 만큼 치유도, 용서도 크기 때문이다. 순수한 것은 신의 속성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신의 영역과 범주를 제도가 탈취하고 전유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도덕적으로 무장한, 상식과 합리를 내재화한, 그래서 정상성의 레테르를 배지처럼 달고 다니는 익명적 주체를 순수와 동의어로 보는 것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정장을 찢고 싶은 나의 욕구는 사실은 이런 정상성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들, 이를테면 도덕과 상식과 합리로 무장된 제도의 성채를 훼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아마도 성을 속으로 끌어내리는 불경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천원. 어릴 때 곧잘 아저씨와 병원놀이를 하곤 했다. 병원놀이가 끝나면 아저씨는 천원을 주면서 같이 병원놀이를 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천원을 줬다는 사실도 비밀로 간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저씨와 병원놀이와 천원은 하나의 똑같은 기호로 기억되지만, 정작 그 기호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 나에게 천원은 깨끗하게 씻어내야 하는 강박으로 남았다. 나는 더럽혀졌고, 그렇게 더럽혀진 내 몸과 의식에선 더러운 냄새가 난다. 그리고 냄새가 난다는 강박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닦고 씻어내는 또 다른 강박을 불러왔다. 그래서 나는 몸을 씻고 천 원짜리 지폐를 씻는다. 


강박은 상처의 일종이다. 그리고 모든 상처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그 원인에 해당하는 사건 당시에는 그것이 상처임을 모른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밝혀지는 것(인식되는 것)은 사후적이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사후판명성이라고 했다. 천 원짜리 지폐에 아저씨와 병원놀이가 들러붙는다. 아저씨와 병원놀이가 천 원짜리 지폐에 옮겨 붙는다(전치). 천 원짜리 지폐는 돈이라는 기호를 밀어내고, 그 빈자리에 더러운 무의식이라는 또 다른 기호가 들어앉는다. 그래서 나에게 천 원짜리 지폐는 더러운 것이고, 그 더러움을 씻어내야 하는 강박을 의미한다. 




참외. 여기에 또 다른 강박이 있다. 참외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 아버지가 주범이고 나는 공범이다. 엄밀하게는 공범이라기보다는 방관자다. 아버지가 엄마를 죽였고 나는 그 죽임을 방관했다는 사실이 죄의식이 돼 참외에 투사된다(전치). 참외가 그 죽임의 도구며 구실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참외만 보면 무조건 먹는다. 먹는다기보다는 먹어 없앤다. 참외는 죄(혹은 죄의식)를 의미하므로 모든 참외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모든 참외를 없앨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의식 역시 결코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참외를 게걸스럽게 먹어 없애는 행위는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닦아 냄새를 없애는 행위와 같다.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없애고, 더러운 무의식을 없애는 것. 그러나 정작 그 없앰은 결코 실현되지가 않고, 다만 없애야한다는 강박으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영화 <301 302>에 보면 포식증 환자와 거식증 환자가 나온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음식을 거부하는 것도 정작 음식에 대한, 음식에서 유래한, 음식이 원인인 증상이며 징후가 아니다. 다른 결핍의식(예컨대 성적 결핍의식)이 가장 손쉬운 대상인 음식에 들러붙은 것이다. 이처럼 기호는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기호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저마다의 주관적인 기억과 사건과 경험, 특히 무의식과 상처의 층위에서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호의 의미가 다층적인 만큼 소통은 요원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축.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입으로 불어 불을 끈다. 그리고 칼을 들어 마지막 남은 조각까지 남김없이 케이크를 잘라 먹는다. 나 자신을 축하하고 축복하고 위로하는 의식이다. 모든 의식에는 정해진 양식이 있기 마련이고, 그 양식을 따라야 하고,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그러면 의식은 그 의식을 집전한 사람에게 최면을 돌려준다. 자기최면이며 자기암시다. 결국 자축이란 사실은 자기최면이며 자기암시를 위한 독백이다. 여하튼, 이렇듯 몸을 닦다 보면 마침내는 냄새가 거짓말같이 사라질 거야. 이처럼 천 원짜리 지폐를 씻어내다 보면 종래에는 더러운 무의식이 거짓말처럼 없어질 거야. 이토록 참외를 열심히 먹어치우다 보면 죽은 엄마에 대한 죄의식이 조금이나마 덜어지겠지. 그리고 자신을 축복하면 실제로도 행복해지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고도 당연하게도 자기최면이며 자기암시란 사실은 착각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런 만큼 이때의 현실은 행복한 의식이 아닌, 불행한 의식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김수연은 트라우마를 주제화한다. 트라우마는 너무나 깊숙이 숨겨져 있어서 심지어는 주체에게마저도 그 온전한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조형으로 옮기는 언어형식은 암시적이고 불완전하다(그리고 그 불완전언어는 예술언어에 적격이다). 또한 트라우마는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어서 공감할 수는 있지만 공유할 수는 없다(상처를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하튼 트라우마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다(당연히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트라우마를 강도로 변질시켜 어떻게 자의식의 층위로 불러오느냐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를 일종의 결여의식이며 결핍의식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만은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고 했다. 예술은 곧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는 말이다. 트라우마는 작가의 힘이며, 예술의, 창작의 동력이다. 작가는 상처에 집착하고 그 집착이 강박으로 천착된다. 그리고 이는 자기 반성적이라는 미덕으로 되돌려진다. 때론 자기 자신을 찌를지도 모를 내면의 칼날과 무기를 미덕으로서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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