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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경 / 표면과 깊이, 풍경과 공간 너머로 열리는 전망

고충환


이나경의 작업은 평면으로 정의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을 평면으로 정의하는 것은 단순한 장르 내지 양식상의 구분을 위한 편의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작가의 작업은 시종 평면에로의 환원과 함께 그 경계와 영역을 확장하는 운동성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고, 그 계기로부터 특유의 긴장감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평면은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회화적 조건이었고, 사사로운 경험과 서사를 투사하고 반영하는 장이며 거울이었다. 자신의 작업을 끊임없이 평면(평면성의 조건?) 에로 소환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로서의 기질을 타고 났지만, 동시에 엄격한 형식주의자는 체질에 맞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인 것 같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를 베이스로 견지하면서도 그 바운더리 안에서 개인사를 이야기하고 세상사를 풀어내는 것이며, 형식논리와 서사적 재현이 만나지는 접점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아낸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찾아낸 접점이며 좌표를 풍경이라고 부른다. 풍경은 자연이 아니다. 풍경은 인문학적 지평이며, 그 인문학적 지평을 배경으로 열리는 전망이다. 해석된 자연(혹은 자연적 사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이때 작가로 하여금 자연을 해석하게 해주는 도구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형식논리를 도구 삼아 내적 질서의 메타포를 구축한다. 내적 질서의 메타포, 이를테면 자기 내면에 일종의 상징적 풍경이며 공간을 마련하고 이를 전망으로 열어 놓는 일이 작가의 회화의 과업이다. 


이렇게 작가의 전망 속에 도심의 건축물이며 가로가 들어온다. 기하학적 형식으로 해석되고 환원된 이 소재들은 건축투시도법 내지 청사진과의 영향관계를 읽게 한다. 내적 질서의 메타포를 구축하는 일이란 실상 자기 내면에 집을 짓는 일이며, 건축물을 건립하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투시도 내지 청사진 역시 작가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평면 위에 집이며 건축물과 같은 입체를 건립하는 일이다. 


그리고 각종 크고 작은 창문들이 들어온다. 그림 속에서 창문은 기하학적 형태와 패턴으로 번역된다. 창문은 형식논리 외에 일정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데, 작가의 내면과 외면을 이어주는 통로며 채널 역할을 한다. 창문은 틀이다. 주체가 세계를 보는 관습(관념화된 습성이며 습관)이다. 작가에게 그 관습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이며 평면이란 조건이다. 이처럼 외계는 그저 소재로서보다는 작가의 인식론적 멘탈리티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작가가 세계를 보는 눈이며 관성의 메타포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물망이 소재로서 도입된다. 건축물도, 창문도, 그물망도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형태들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같이 외계를 형식논리로 번역하려는 작가의 기획에 걸 맞는 소재들이지만, 그 자체 추상적인 형태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물망은 상대적으로 실제를 상기시키는 건축물이나 창문과는 구별된다. 건축물과 창문을 지나 마침내 자기다운 소재를, 좀 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에 부합하는 소재를 찾아낸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도 그물망의 망구조는 일정한 곡선의 도입을 가능하게 해주고, 하나의 단위구조가 반복 변주되는 패턴의 도입을 가능하게 해주고, 유기적인 기하학의 형식을 빌린 회화적 화면의 심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특히 그물망의 도입을 계기로 이후 작가의 작업에서 패턴화의 경향성이 뚜렷한 한 특징으로서 자리 잡는다. 이렇게 작가는 화면에다 크고 작은 그물망을 중첩시킨다. 층층이 겹쳐 보이는 중층화된 그물망이 화면에 레이어를 만들고, 결을 만들고, 겹을 만든다. 화면 내부의 심층에서 발원한 내적 울림을 만든다. 내진감이며 공간적 깊이감을 조성하고, 망과 망 사이로 은근한 빛이 지나가는 길을 낸다. 이로써 감각적 닮은꼴에 근거한 재현회화와는 또 다른 일루전의 환경이 열린다. 그 환경이 열어주는 전망은 중첩과 패턴과 반복과 리듬이라는 형식논리의 소산이지만, 그 소산이 떠올려주는 의미는 내용적이고 존재론적이다. 이를테면 그물은 망과 망으로 끝도 없이 연결돼 있다.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연과 연으로 끝도 없이 연속된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 헤아릴 수도 없는 연의 계기들을 지나 지금 나는 비로소 여기에 있다. 나는 너에게 연결돼 있고, 너는 나로부터 연장된다. 그렇게 망 위에 망이 있고, 망 속에 망이 있다. 망이나 연의 계기가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된다는 점에서, 그렇게 반복되는 궤도 속의 한 점으로 미아처럼 떠도는 존재감 없는 존재를 주지시킨다는 점에서 연기설과 매트릭스가 하나로 만나진다. 


이처럼 중첩된 그물망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색과 색을 중첩시켜야 하는데, 이렇게 중첩된 색 층이 시각적임을 넘어 촉각적으로 어필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 경험을 시촉각성이라고 부른다. 보는 것이 만지는 것이고, 보면서 만지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그저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가는 것이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실은 몸으로 본다는 것이다. 보면서 만져지는 차원, 눈이 아닌 몸으로 보는 경지를 작가는 적어도 자신의 작업의 또 다른 화두로서 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작가는 종이꽃을 도입한다. 종이꽃은 꽃이나 조화와 다르다. 조화의 목적이 실제와의 닮은꼴을 겨냥하고 있다면, 종이꽃은 형식이나 외관보다는 그기에 탑재된 의미에 비중이 실린다. 그런 만큼 그 모양은 겨우 꽃을 상기시킬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 그런 만큼 문양이나 패턴의 외양을 취해도 별반 상관이 없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처럼 패턴화된 종이꽃은 흔히 사자를 기리기 위해서 제작되는 것인 만큼 그 존재의미가 현세보다는 내세에, 현실보다는 비현실에 속해있다. 그리고 대개는 축제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인 만큼 순수한 놀이와 유희의 영역에 속한다. 그 의미론적 영역과 범주가 예술이 지향하는 세계와 통하고, 전통적인 멘탈리티와도 통한다. 종이꽃을 매개로 제의의 영역이, 순수한 놀이와 유희의 범주가, 그리고 전통에 연유한 정신세계가 작업의 일부로서 흡수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종이꽃을 접으면 입체가 되고 펼치면 평면이 된다. 이런 양가성 내지 이중성이 작가의 지향과도 통하는데, 이를테면 망 위의 망, 망 속의 망구조를 통해서 화면에 어떤 내적울림과 함께 일종의 유사 공간을 조성하려는 기획과 통한다. 그리고 마치 투시원근법을 통해 본 공간에 부유하는 사물을 평면에 안착시킨 도형으로 나타난,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구현하고 있는 또 다른 작업과도 통한다. 실제로 작가는 오브제(예컨대 플라스틱 마개와 같은)를 이용해 화면에다 대고 그 단면을 찍어낸다. 그렇게 찍혀 나온 단면의 도형 이미지들이 화면에 유영하면서 또 다른 공간감을 조성한다. 그리기 외에 일종의 판법을 도입한 것인데, 종이꽃 역시 스텐실 기법을 이용해 그 펼쳐진 이미지 그대로를 찍어낸다. 그리기와 찍어내기, 그리고 부분적으로 도입된 목탄 스케치의 부드럽고 유기적인 선이 어우러져 화면에 풍부한 질감을 연출해낸다. 


화면 속에 미세한 색 층의 변화를 준 것이나 레이어를 조성한 것, 평면 속에 입체를 불러들인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일종의 유사 공간감을 조성한 것이 모두 평면에로의 환원을 견지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평면의 영역과 범주를 확장하려는 기획에 그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평면에 완전하게 귀속되지도 않으면서 평면을 벗어나지도 않는, 평면이 보이는가 하면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런 이중적인 관계와 태도로부터 작가의 작업에 고유한 긴장감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된, 여러 이질적인 재료와 기법이 하나로 중첩된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화면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오브제를 회화의 한 요소로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화면의 일부로서 도입하고 차용한다. 작가의 그림에 흔히 엿보이는 망구조 그대로의 철망이다. 미세한 망이나 무채색이 기왕의 단색조 화면과 무리 없이 어우러져 보인다. 평면을 유지하면서 확장하게 해주는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더불어 작가의 그림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로는 특유의 색채감정을 들 수가 있다. 그 색채감정은 얼핏 원색적이고 장식적이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채도가 조절된 탓에 두드러지기보다는 다운돼 보이고, 색 층이 중첩된 탓에 일정한 깊이감과 함께 촉각적으로 보인다. 원색보다는 간색에 가까운 색채감정이 숙성되고 내밀한, 그리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무수하게 그리고 바르고 찍고 덧그리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유래한, 여러 이질적인 색의 기미를 품고 있는 미묘한 색이다. 어쩌면 평면성과 함께 이런 색채감정이야말로 작가가 물려받은 모더니즘 형식논리의 진정한 유산이며 자산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근작을 <풍경.공간, 그 너머>로 명명한다. 작가에게 그림 그리기는 내적 질서의 메타포로서의 풍경을 그리는 일이다. 자기 내면에 집을 짓는 일이며, 내면의 집을 건립하는 일이다. 풍경 너머에는 내면풍경이 있고, 공간 건너편에는 내적공간이 있을 것이다. 내면풍경은 무한하고, 내적공간은 무궁하다. 밑도 끝도 없는 심부에, 심층에, 심연에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평면은 표면이고, 심연은 깊이이다. 표면과 깊이, 만약 작가가 이 두 계기를 지향하는 것이 맞다면, 외관상 서로 쉽게 섞일 것 같지 않은 이 두 계기가 차후의 그림에서도 여전히 화두로 남겨질 것이고, 계속해서 새로운 그림을 낳는 동력이며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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