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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옥 / 생태주의 조각 이후 성정체성과 자기정체성

고충환

Hussom. 인간을 의미하는 human과 개화를 의미하는 blossom을 결합시켜, 작가는 개화하는 인간이며 꽃처럼 피어나는 인간을 만들었다. 여기서 인간은 외관상 꽃으로 피어나지만, 그러나 인간으로 피어나는 것 혹은 인간이 피워 올리는 것이 반드시 꽃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으로 대리되는 존재의 무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여기서 꽃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변화무상하고 천변만화한 잠정적이고 가변적인 형태를 상징한다. 그 꼴이며 생리 그대로 생명 혹은 생명원리의 꼴이며 형태에 부합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작가는 선인장을 의미하는 cactus와 문어를 의미하는 octopus를 결합시켜 문어처럼 8개의 발이 달린 선인장 Cacpus를 빗어냈다. 여기서 무려 8개의 발은 여성 혹은 생명의 다산성을 상징하며, 선인장의 형태는 응축된 에너지를 상징한다. 알다시피 선인장의 몸통은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에 유리하도록 진화한 몸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만큼 생존전략의 결과로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이 선인장의 생리며 형태를 빌려 에너지를 응축하는 생명원리와 다산성을 상징케 한 것이다. 


그리고 민들레꽃과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신체를 결합시켜 호흡을 표상했다(Breath). 알다시피 호흡은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하게 해주는 생물학적 조건이다. 그리고 민들레 홀씨는 가벼운 탓에 멀리까지 퍼져나가 생명을 퍼트린다. 생명이 호흡을 매개로 대기와 우주 그리고 존재의 자궁에 연속되고 연장돼 있음을 빗대어 설명한 것이다. 호흡의 또 다른 말인 아니마가 우주의 근원적인 호흡을, 호흡의 호흡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근과 여성의 가슴 그리고 탯줄을 결합시켜 무성생식을 상형했다(ag.a.mous). 무성생식이라는 말처럼 자체적으로 혹은 자족적으로 생식이 가능해지는 존재의 원리를 표상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다른 작업들도 그렇지만, 이 일련의 작업들엔 두드러진 특징이 드러나 보이는데, 바로 결합이다. 때론 이질적이다 싶은 의외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결합이 시도되고 있는데, 신체와 꽃이 결합하고, 동물과 식물이 결합하고, 남근과 여근이 결합하고, 남성과 여성의 성적 기호가 결합한다. 결합은 관계다. 이것과 저것이 결합하고, 주체와 타자가 관계 맺어진다. 결합도 관계도 생명이 가능해지는 전제조건이다. 양이 없으면 음은 존재의 층위로 드러나 보일 수가 없고, 음이 없는 양은 자기모순이며 자가당착이다. 나를 정의해주는 타자의 존재가 없으면 주체는 설 수가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생식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이렇게 잉태된 생명을 무성생식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이 합체된 존재의 자체적이고 자족적인 생식의 결과로 본다는 사실이다. 

남성과 여성이 합체된 존재란 무슨 의미인가. 바로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들고 있는 것이며, 남성원리(혹은 남성성)와 여성원리(혹은 여성성)를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가능해지기위해선 남성과 여성이 결합되어져야 한다는 생물학적 사실과 함께, 의외의 성결정론을 건드린다. 성에 관한한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자체 결정적인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며, 다만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운동성의 계기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행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스며들고, 너는 나의 일부로 흡수된다. 랭보는 나는 신이고 악마며 타자라고 했다. 나는 결코 고정된 실체로서 붙잡을 수는 없는, 항상적으로 이행하는 자임을 정의하고 선언한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합체된 존재는 이처럼 존재의 이중성이며 다의성을 말해준다. 야누스가 그 선조 격에 해당하겠다. 그리고 존재의 분열을 말해준다. 물거울에서 주체(동일성의 논리)가 아닌 타자(비동일성의 논리)를 발견한 나르시스에 의해 예시되는. 

정리를 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결합과 관계,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운동성의 계기, 이행과 존재의 비결정성 개념을 토대로 생명과 생명원리를 주제화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생명 자체는 천변만화의 꽃을 피워 올리는 존재처럼 결정적이지가 않다는 것이며, 그저 지속적인 이행의 과정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얼추 설명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생명 혹은 생명원리를 표상하는 또 다른 경우로서 제안되고 있는 것이 다산성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다산성은 하나의 몸통에서 유래한 여러 개의 가슴이 달린 형상으로 나타난다(Eva).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그렇고 루이스 부르주아의 소녀가 그랬다. 작가의 작업은 가슴을 다산의 표상으로 본 도상학적 예시를 자기 식의 버전으로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슴은 여성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몸통 바깥으로 돌출돼 나온 돌기 형상이 남근을 연상시킴으로 인해 다시금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처음의 주제의식으로 되돌려진다. 이처럼 여성과 남성이 합체된 존재의 몸통에서 유래한 여러 개의 가슴(혹은 남근들)은 그저 생물학적 사실로서의 다산성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무한 팽창되고 확장되는, 그렇게 타자를 아우르고 통합하는 생명과 생명원리를 표상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른 작업들에 비해 여성의 성적 도상학을 비교적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바로 Vagiloom이다. 이번엔 여성의 성기(vagina)를 개화하는 꽃(bloom)과 결합시켰다. 꽃처럼 피어나는 성기라고나 할까. 꽃처럼 피어나는 성기? 조지아 오키프가 화면을 가득 채워 그린 꽃 그림으로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표상한 이후 여성 성기의 도상학은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반영하고 극대화하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만개한 꽃처럼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성기의 도상은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고 우주적 자궁을 상징한다. 세계의 배꼽(옴파로스)으로부터 유래한 탯줄에 연결된 타자를 아우르는 무궁한 포용력을 상징하며, 타자를 존재 속에 아울러 들이는 통합의 원리를 상징한다. 이로써 여성(아님 존재)을 생명의 기원이며 생명을 주관하는 자라는 자의식의 토대 위에 재설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도판 위에 겔 상태의 흙을 일일이 짜서 고착시키는 방법으로 그 표면에 무수한 미세 돌기들을 가지고 있는 세라믹 소재의 형상을 빗었다. 피부를 확대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피부를 뒤집어놓은 것 같기도 한 형상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을 피부로 볼 수가 있다면, 지금껏 주로 가슴과 성기 그리고 남근을 아우르는 성기의 도상학의 언저리에서 모티브를 끌어오던 경우와는 구별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피부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촉각적이라는 말이다. 더욱이 작가는 여기에 털 소재의 가죽을 동원해 이런 촉각적인 성질을 강조하고 강화한다. 털 소재의 재질은 이처럼 촉각적인 성질과 함께 성적 암시를 환기시키는 성질을 내재하고 있기도 하다. 성 정체성을, 아니 엄밀하게는 성 정체성을 계기로 본 생명과 생명원리를 표상하고 싶은 작가의 주제의식에 걸 맞는 소재며 배합이랄 수 있겠다. 


여하튼, 보통 조각이 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만질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만질 수 있는 조각은 명분으로만 그렇지, 실제로 촉각을 연상시키지는 않는다. 회화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각이라는 감각센서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런 저간의 변화에 대해선 신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성적 정체성 문제라고 하는 보다 포괄적인 문제의식으로부터 피부라고 하는 상대적으로 더 국지적이고 지엽적인, 그 만큼 더 그 실체가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자의식의 수준으로 이행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게다가 작가가 재현한 피부며 디테일이 보여주고 있는 자잘한 돌기들은 자가생식하고 무성 생식하는, 그렇게 무한 팽창하고 무한 확장되는 세포분열을 연상시키고, 생명과 존재와 우주의 즉물적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다. 

성적 정체성 문제는 자기 정체성 문제와 별 개일 수가 없다. 신체로부터 성기의 도상학으로 그리고 재차 피부로 연이어지면서 변주되고 있는 작가의 조각은 성정체성과 아마도 자기정체성 문제의 자의식을 매개로 생명과 생명원리를 주제화한다. 보통 관념적으로 흐르기 쉬운 주제의식을 몸이라는, 신체라고 하는 구체적인 실물을 근거로 풀어낸 것이란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작가의 작업은 감각적이기 조차 하다. 돌이라는 소재를, 세라믹이라는 소재를 넘어서 부드럽고 유기적인 형상을 빗어낸다. 작가의 작업은 무슨 살색의 살덩어리며 살점을 보는 것 같고, 소름 돋은 피부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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