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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욱 / 의식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청색

고충환

그림과 관련한 속설 중 온몸으로 그린다는 표현이 있다. 온몸으로 그린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면 온몸으로 그릴 수가 있을까? 온몸으로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대개는 수사적 표현으로 쓰이는 이 말은 그러나 한정욱의 경우에 말 그대로를 의미한다. 한정욱은 온몸으로 그린다. 온몸으로 그리기 위해선 화면과 주체를 매개시켜주는 장치가 없어야 한다. 이를테면 붓과 같은. 직접적이어야 한다. 주체의 온몸이 화면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 화면에 직접 부닥치고 화면의 일부가 돼 화면 속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해체되고 흔적도 없이 녹아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주체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워져야 한다. 아니, 그렇게 부닥치고 부서지고 녹아든 흔적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여하한 경우에도 흔적이 없으면 치열했던 과정도 손에 잡히는 물성도 그림 속에 들어가 한바탕 휘젓고 살을 풀었던 증거도 없을 것이므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은 낯설지가 않다. 옛날 사람들은 산수를 그릴 때 곧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산수 속을 거닌다고 했다. 반쯤은 정신 줄을 놓고 소요한다고 했다. 그림과 주체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물아일체가 된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림 속으로 불러들여진 산수는 관상용이며, 감정이입과 관념화의 과정으로부터 추상해낸, 그래서 결국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수사적 표현의 한계 내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잭슨 폴록도 바닥에 깔아놓은 화면 속에 들어간 이력으로 곧잘 호출된다. 그러나 기운을 몰아내고 풀어헤치는 살풀이는 아니었다. 얽히고설킨 기운의 매듭을 실타래를 풀듯 술술 풀어내는 방기와 방출과 방전의 과정은 아니었다. 물감이 담긴 깡통과 드리핑이라는 도구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라는 도구가 작가와 화면을 매개시켜주는, 주체와 객체가 구별되는 한에서만 폴록은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도대체 물아일체의 경지며 주체가 지워질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액션 페인팅 역시 그림에 선명한 자국(흔적)을 남기지만, 그것은 몸 자국이 아닌 붓 자국일 뿐이다. 붓이 몸을 대리하고 매개하는 한, 몸 자국이 그대로 붓 자국 쪽으로 건너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붓이 매개가 되지 않은 그림, 이를테면 몸으로 그린 그림이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고 대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이를테면 발로 그리거나 풀어헤친 머리칼로 그리거나 혀로 그리거나 심지어 성기로 그린 그림이 그저 무의미한 기행에 그칠 수도 있고, 아님 한갓 원숭이가 그린 그림과 다를 바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굳이 몸으로 그리는 이유와, 그 과정이며 행위가 겨냥한 감각적이고 실존적이고 미학적인 지점에 대한 물음이 물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정욱은 그림을 그릴 때 시종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는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음악이 귀에 들어올 때도 있고 무심결에 흘러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을 만들자면, 귀에 들어오는 음악은 의식적인 음악이요 흘러 지나가는 음악은 무의식적인 음악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음악과 하나가 된다. 음악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하나로 넘나들어진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태가 꼭 그렇다. 작가가 그림 그리는 행위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는 허물어져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며 흐름으로 녹아든다. 어쩌면 음악은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며 과정에서 꼭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작가의 작업실을 찾은 날에도, 작업에 대한 꽤나 진지한 얘기가 오가고 있는 와중에도 다만 소리를 조금 조절할 뿐 음악을 끄지 않았다. 작가에게 매개가 있고 도구가 있다면 아마도 음악일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작가는 손가락으로, 손바닥으로, 손등으로, 손톱으로, 그리고 때론 팔로 그림을 그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주로 가장 독성이 강하다는 청색 안료를 겔 상태의 젯소에 버무려 사용하는데, 젯소가 혼합된 비율 정도에 따라서 청색은 선명하기도 하고 투명하기도 하고 짙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화면 위엔 청색의 스펙트럼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손바닥을 무슨 팔레트처럼 사용한다는 점이다. 젯소에 갠(정확하게 개는 것 같지도 않지만, 여하튼) 안료를 손바닥에 되는대로 퍼 담아 다른 손가락으로 찍어 바르는데, 팔레트가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없어진다. 그렇게 작가는 화면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 손가락으로 그리고 손바닥으로 뭉개고 손등으로 비비고 손톱으로 할퀴고 팔로 스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어어서 정해진 순서도 기능(이를테면 손가락이 하는 기능과 손톱이 하는 기능)도 패턴도 없다. 매번 새롭게 그리고 매 순간 다르게 시작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음악이 느리게 흐르면 손동작도 느리게 흐르고, 음악이 빨라지면 호흡도 덩달아 가팔라질 것이다. 음악에 맞춘다기보다는 마치 음악처럼 흐르고 그릴 것이다. 그렇게 뭉개고 스치다가 우루루 쏟아낼 것이다. 우루루 쏟아낸다? 기를 쏟아내고 무의식을 쏟아낸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쏟아져 나온 기와 무의식으로 질펀하고 낭자하고 투명하고 깊고 아득하고 멀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안한다. 의식은 정해진 순서도 기능도 패턴도 없다. 다만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다른 순간들이 있을 뿐. 그렇게 자유자재로 분절되고 접합되는 흐름이 있을 뿐. 의식은 최소한의 계기만으로도, 그리고 때로는 터무니없어 보이거나 실제로도 터무니없는 계기만으로도 쉽게 일탈되고 이탈한다. 비약하고 도약한다. 비록 프루스트는 의식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꼴이 꼭 무의식 같다. 여하튼 한정욱의 그림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에 비교될 만한 무의식의 흐름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그림은 꼭 무의식이 그린 그림 같다. 여기서 무의식은 몸과 통한다. 무의식이 그린 그림이라는 말은 곧 몸이 그린 그림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면 무의식이 그린 그림이며 몸이 그린 그림은 무슨 의미일까. 무의식은 의식과는 다르게 정해진 순서도 기능도 패턴도 없다. 부지불식간의 일탈과 예기치 못한 도약과 비약이 있을 뿐. 일종의 몸의 기억이랄 수 있는 관성은 어느 정도 배어있고 간여될 수는 있겠다. 여하튼, 무의식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는 어둠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실제로 컴컴해서 어둡다기보다는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아서 어두운 영역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말이 생성되는 곳, 미처 의미화 되기 이전의 선의미들이 웅얼대는 곳, 느낌과 감각과 감수성의 씨앗들이 발아되는 곳, 언어가 배양되는 곳, 의미와 개념과 논리를 키우는 인큐베이터 속으로 추락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현상학적 에포케, 말하자면 의식의 바닥에서, 의식의 영도지점에서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의식을 잠정적으로 봉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닥에선 당연하게도 정해진 룰이 없으므로 모든 가능성이 현실화된다. 바로, 이행이다. 그 바닥에서 의미는 항상적으로 이행 중에 있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으로써 결정적인 의미를 대체한다. 다시,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세계가 열린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가 개시되는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열린 세계는 불안정하다.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채 여전히 이행 중에 있으므로. 바로, 생성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그 의미가(어쩌면 형태마저도) 이행 중에 있고 생성 중에 있으므로 불안정한 대신 아우라가 풍부한 편이다. 비결정적인 아우라로 충만하고 암시적인 아우라로 팽배하다. 작가의 그림은 특히 자연 이미지를 암시한다. 산이나 계곡 같은 결정적인 의미 대신 그 실체가 희박한 것들, 이를테면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 그렇게 흐르면서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 물웅덩이의 어둑한 곳에 숨겨 놓고 있는 수초와 음영, 으스름한 빛과 몸을 섞는 대기와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이 어우러져 숲을 밀어올리고 자연을 밀어 올린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생기랄 수 있겠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은 다시, 기의 분출을 보는 것 같고 생명 에너지의 흐름을 보는 것 같다. 

작가는 가장 독성이 강한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그것도 몸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플라톤의 파르마콘은 독약이면서 동시에 묘약(아님 미약?)을 의미한다. 낭만주의에서 청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랑 블루는 대양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우울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의미들은 청색의 색감이 깊어서이다. 여기에 청색은 투명하기조차 하다. 청색은 그 투명한 깊이 속에 측량할 수 없는 것들, 헤아릴 수 없는 것들,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 독약과 묘약을, 의미의 모태를 숨겨놓고 있다. 작가의 그림에 모네의 수련 그림에서와 같은 산들바람이 부는가. 아님, 터너의 바다 그림에서와 같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가. 고요한가. 아님, 격정적인가. 작가의 그림 속에서 독약을 찾거나 묘약을 발견하는 것, 취하고 싶거나 자기치유를 위한 계기를 캐내는 것, 무슨 요람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맞기거나 광폭한 음률에 사로잡히는 것이 관객의 몫으로 주어진다.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고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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