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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 / 얼굴 없는 얼굴 위로 부유하는 주체의 기호들

고충환

<Long_Moment>(2007). 긴_순간. 모순어법이고 역설이다. 주체란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되는 전체나 총체 같지만 사실은 분절된 순간들의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가 사는 일상 역시 그렇게 분절된 우연한 순간들의 무한반복일지도 모른다. <Live Project_Looking at yourself>(2009). 거울과 모니터와 같은 재현장치를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재현장치가 재현하는 자기와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의 사이엔 차이며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음을 실감한다. 재현장치에도 불구하고, 혹은 재현장치라서 오히려 더 주체는 주체 그대로 재현되지도 복원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 상황논리를 다룬다. <face, face, face>(2010). 얼굴 없는 초상을 통해서 얼굴을 재현한다는, 역시 역설적 상황논리를 다루고 있다. 

뭔가 공통점이나 최소한 일관된 주제의식이 발견되지 않는가. 정강은 사진과 영상을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일련의 작업들에서 주체를 주제화한다. 그리고 주체를 재현하면 할수록 주체가 복원되기는커녕 오히려 차이와 간극을 확인할 뿐이라는 역설에 빠진다. 그리고 역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주체와 재현된 주체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 그 사이엔 주체가 재현되는 방법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재현되는 양상이며 상황논리에 따라서 주체는 주체의 실체에 근접할 수도 무미건조한 개념으로 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하한 경우에도 주체를 실체로서 거머쥘 수도 순수한 개념으로 경험할 수도 없다. 개념화된 주체 곧 주체의 개념 속엔 여전히 주체의 흔적이 묻어있기 때문이고 그 흔적이 매개되지 않은 주체(주체의 개념)는 떠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와 세계의 개념은 다르다.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엄밀하게 세계와 세계의 개념,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 다른 영역이며 별개의 범주에 속한다. 세계를 개념화한다고 해서 세계가 복원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재현한다고 해서 세계가 복원되지도 않는다. 개념장치는 개념장치일 뿐. 재현장치는 재현장치일 뿐. 

그렇다면 재현장치가 재현한 재현물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모조리 실재의 이미지들이며 허상들이다. 그렇다면 재현장치는 자신이 철저하게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주체를 주체로서 경험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주체를 재현하고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체와 주체의 개념 사이엔 주체를 재현하는 방법의 지평이 펼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재현하기에 따라서 주체의 실체에 근접할 수 있다고 했다. 주체를 실체로서 거머쥘 수는 없지만 실체를 실감할 수는 있다. 

정강의 사진 영상작업은 주체와 재현된 주체 사이의 상호반영과 연동 가능성에 대한 형식실험으로 정의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처럼 주체를 재현한다는 기획은 결국 주체의 재현불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결과로 연이어진,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재현불가능성을 이미 예측하고 있는 역설적인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종래에는 주체와 재현된 주체 사이에서 공과 허와 무에 직면하는 일이며(질 들뢰즈는 주체를 그저 주체라고 부르는 막연한 습관일 뿐이며, 실체가 없는 허명이라고 했다), 결여와 결핍, 과잉과 잉여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일일지도 모른다(자크 라캉에게 주체는 오브제 곧 대상화할 수 있는 영역과 오브제a 곧 대상화할 수 없는 범주와의 결합이며 총체이다). 주체를 재현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모순율과 역설적인 상황논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고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는 사진과 영상이라는 세련된 재현장치를 도구로 어쩌면 세련과는 거리가 먼 원초적인 영역이며 불가능한 기획을 탐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시리즈 작업 중 특히 얼굴 없는 초상 작업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굴을 소재로 취한 것은 적어도 외관상 혹은 통념상 얼굴이 주체를 대변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얼굴을 재현함으로써 주체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으로 작가는 얼굴을 재현해보지만 덩달아 주체가 재현되거나 복원되지는 않는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사진에서 얼굴을 삭제해보기로 했다. 그러면 주체도 덩달아 지워지는가. 그렇게 작가는 주체를 재현한다는 프로젝트를 포기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얼굴이 삭제된 사진에서 사진의 다른 부분이, 사진의 다른 부위가, 사진의 구석구석이, 심지어는 사물마저 얼굴을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 작업에서 작가의 작업은 좀 더 좁혀진다. 주체를 재현한다는 열린 관점에서 얼굴을 재현한다는 상대적으로 좁혀진 관점으로 이동한 것. 관점이 좁혀진 만큼 작가는 과연 얼굴을 재현할 수가 있고, 그렇게 재현된 얼굴(어쩌면 얼굴 없는 얼굴)을 통해서 주체가 재현되는 것을 볼 수가 있을까. 주체가 오롯이 복원되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을까. 작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밀어 올리면서 현재에 이른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엽서가 흥미롭다. 얼굴이 잘린 초상사진 아래쪽에 윗부분이 잘려나간 활자로 얼굴 없는 초상이란 전시주제가 기입돼 있다. 위쪽의 사진과 아래쪽의 활자의 운율을 맞춘 것인데, 묘하게도 활자는 윗부분이 잘려나갔는데도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아마도 더 많이 잘려나가 밑동만 남겨지면 그 의미는 오리무중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윗부분의 사진이 힌트를 제공해 얼추 정확한 의미를 복원하고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활자는 기호(라캉 식으론 상징 언어)다. 기호는 웬만큼 훼손돼도 얼추 그 의미를 전달할 수가 있다. 언어용법 곧 말의, 언어의, 기호의 쓰임새에 딸린 문법이며 관성이며 항상성 탓이다. 더욱이 형식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유사한 다른 기호와의 비교를 통해서 그 의미는 더 뚜렷해진다. 사진도 기호다. 롤랑 바르트 식으론 스투디움(그리고 푼크툼)에 해당한다. 사진 속 얼굴_기호가 훼손되면 덩달아 주체_기호도 훼손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얼굴이 없는데도, 혹은 얼굴의 상당부분이 잘려나갔는데도 다정다감한, 쓸쓸한, 부끄러워하는, 무심한(혹은 무심한 척 하는?) 호감과 교감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호감과 교감을 주체가 재현되고 복원되는 단서며 계기며 요소로 봐도 될까. 그 호감과 교감은 사진 속 주체에 속한 것일까. 혹 사진을 찍는 사람 아니면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자기 인식과 마음속에서 불러낸 것은 아닐까(프로이트 식으론 역전이). 

사진 속 얼굴(혹은 얼굴 없는 얼굴)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가. 말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가. 사진의 소통체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꽤나 복잡하고 미묘하다. 한쪽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 찍히는 사람이 있다. 찍는 사람의 시선과 찍히는 사람의 응시가 교차돼 찍는 사람에도 찍히는 사람에도 완전히 속해져 있지는 않은 제 3의 의미영역이 생성된다. 자기연출사진도 예외일 수는 없는데, 자기(아이덴티티)와 또 다른 자기(페르소나)가 분리된다. 어쩌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이런 분리를 경험하고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사물 초상화에서도 이런 응시와 시선의 교환은 어김없이 일어난다(심지어 발터 벤야민은 사물이 사람을 업신여기고 배반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찍든, 자기를 찍든, 사물을 찍든 사진을 읽는다는 것, 사진 속 기호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제3의 의미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 일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얼굴이 없는데도 그 혹은 그녀의 됨됨이(이 됨됨이를 그대로 주체의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일 것)를 읽어내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며, 얼굴이 없으면 몸이 그리고 때론 사물마저 얼굴 역할을 대신한다는 사실이며, 때론 얼굴을 찍은 사진보다 얼굴 없는 얼굴을 찍은 사진이 그 혹은 그녀의 됨됨이에 대해서 더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는 사실이다. 얼굴이 없으면 몸이 때론 사물이 얼굴을 대신한다고 했다. 정면성의 법칙이며 항상성의 법칙이다. 정면성이란 포즈가 정면을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나 우연적으로 실패한 사진(이를테면 얼굴이 잘려진 사진)을 실패로 보지 않고 그 자체를 자연스런 사실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관성을 말한다. 그리고 항상성의 법칙은 여하튼 사진 속 기호를 특정의 사람이나 사물이나 상황이나 사건으로 읽으려는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읽어내는 관성을 말한다. 

여기에 몸이 얼굴을 대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몸_언어이며 무의식_언어이다. 라캉은 우리는 언제나 실제로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다. 몸 뒤편의 무의식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작가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얼굴 뒤편의 몸이 말을 하고 심지어는 사진 속 사물(이를테면 아마도 소녀가 껴안고 있는 인형. 여기서 아마도란 것은 실제로나 정황적으로 얼굴이 삭제돼 있음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정황으로 봐서 소녀임을 알아볼 수 있음을 의미)이 말을 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굴 없는 얼굴이 얼굴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부재의 미학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보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존재다움을 더 잘 드러낸다고 했다. 비어있으면 암시가 그 공간을 파고들어 채우는 법이다. 여백도 같은 이치이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이며 부재를 통해서 말하는 방법이다. 소극적으로는 빈 곳을 채우려는 관성이 되겠고, 적극적으로는 암시를 언어용법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되겠다. 

여하튼 그래서 사진 속 주체는 재현되고 복원되는가. 다시 라캉으로 돌아가 보면, 오브제a 즉 여전히 대상화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부분이 있다(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상징 언어로 환원되지 않은 실재?). 그리고 사진 속 기호를 속속들이 캐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스투디움 곧 사회적 기호며 관습화된 기호의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리고 주체가 이런 사회적 기호며 관습화된 기호로 한정되거나 환원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앞서 살폈듯 이렇게나마 캐낸 기호 중 상당부분이, 어쩌면 결정적인 부분이 역전이의 결과(사진을 읽는 사람의 욕망 혹은 착각 혹은 오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하튼 이런 연유로 얼굴이 주체를 재현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굴 없는 얼굴을 통해서도 역시 주체를 재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아마도 부분_재현이며 부분_복원에 만족해야겠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재현불가능성을 기꺼운 사실로 받아들여야겠다. 그리고 어쩌면 이처럼 주체의 재현불가능성을 기꺼운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작가의 작업의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주체는 지층이고 지평이다. 얼굴을 통해서건 얼굴 없는 얼굴을 통해서건 주체를 재현하는 행위는 결국 그 지층이며 지평 중 주체의 차이와 간극의 지점들을 캐내고 발굴하는 일이다. 캐내지 않으면 캐내지지 않을 일이다. 

속된 표현에 찍히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사진에 관한한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고 진실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죽음이라고 했다. 사진은 현실을 찍을 수가 없고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다. 사진을 찍는 순간 현실은 과거 속으로 편입되고 존재는 부재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사진의 아우라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하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될 일이다. 사진은 핍진성 곧 영락없는 닮은꼴이 함정이며 매력이다. 정강은 때론 얼굴을 포함한 초상사진으로 그리고 더러는 얼굴 없는 얼굴을 찍은 초상사진으로 주체라는 함정을 더듬는다. 그 더듬이는 다름 아닌 함정을 더듬는 것이어서 매력이 있다. 소재를 옮겨가면 모를까, 작가가 사람을 그리고 얼굴을 소재로 찍는 한 주체는 더 두터워질 것이고 주체라는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과정에서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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