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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예 / 이행하는 주체

고충환

예술은 자의식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없지만 유독 예술가는 자의식이 강한 편이다. 뭔가를 강력하게 원하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결여의식이며 결핍의식이랄 수 있는 자의식은 예술창작의 중요한 계기이며 동력이 된다. 토마스 만은 결여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 예술이라고 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기 내부에 결여와 결핍의식이 없으면 예술도 창작도 없다. 그림으로 치자면 자화상만큼이나 자의식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도 없을 것이다. 살 껍질을 홀랑 벗기는 순교를 당한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살 거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다윗의 손에 들려진 적장 골리앗의 머리를 대체한 카라바치오의 자화상, 세상의 몰인정으로부터 동떨어져 자기 내면으로 숨어든 무의식을 무감하게 기록한 렘브란트의 자화상, 지옥 불에 떨어진 에드바르트 뭉크의 자화상, 자신의 예술이 광기와 맞바꾼 것임을 증거 하는 반 고흐의 한쪽 귀가 잘린 자화상은 지금 봐도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화가들은 자기를 그릴 때 대개는 거울을 보고 그리기 마련이다. 거울은 화가로 하여금 자기를 보게 해주는 손쉬운 도구이면서, 자기가 또 다른 자기로 분리되는 것을 보여주는 이율배반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기는 진정한 자기인가. 아닌가. 동일성의 논리와 비동일성의 논리가 부닥치고 충돌한다. 동일성의 논리가 보아낸 자기는 현실인식(사실은 착각?)이며, 비동일성의 논리가 보아낸 자기는 욕망이다. 동일성의 논리도 나를 보고 비동일성의 논리도 나를 본다. 타자들의 논리와 나의 논리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보고 틈새를 보고 차이를 보고 불일치를 본다. 거울은 자기를 보게 해주고 자기가 또 다른 자기로 분리되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도구이다. 자기와 자기(타자)가 서로 마주보게 해주는 무슨 요술과도 같고 주술과도 같은 기묘한 도구이다.


윤동주의 <참회록>에는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는 사람이 나온다(왜 밤인가? 밤에 거울을 본다?). 시도 때도 없이 거울을 보는 사람, 거울을 혀로 핥고 주먹으로 깨는 사람, 자기라는 함정에 빠진 사람 혹은 자기라는 요람에 칩거하는 사람은 자의식을, 자기해체와 자기갱신을, 자기반성적인 경향을 강력하게 증거 한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나는 여기서 저기로 이행 중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실체는, 나의 실체라는 허구는 항상적으로 현재진행형의 이행 중에 있는 존재이며 존재라는 허구(아님 허구적 존재)다.


박승애의 그림은 강력하다. 세다. 얼핏 뚜렷해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뚜렷하지가 않다. 이처럼 뚜렷하면서 뚜렷하지가 않는 작가의 그림은 자의식을, 자기해체와 자기갱신을, 자기반성적인 경향을 증거하고, 자의식과 거울과 밤(무의식 혹은 억압된 욕망의 메타포)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증거 한다. 증거를 위해 호출되는 형식이 자화상이다. 작가의 그림은 온통 자화상이다. 몸통을 생략한 얼굴 부위를 부각해 집중력을 높였다. 마치 공허한 무의식을 상징하듯 텅 빈 화면에 부유하는 얼굴이 낯설고 생경하다. 자기고백을 위해 불려나온 얼굴이 연출해 보이는 무슨 연극 같고 마임 같다. 얼굴이 지어보이는 표정이 주연이라면 손가락 유희가 조연급에 해당한다(여기서 뜬금없이 일종의 감각교실을 암시하는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림에서 손가락은 다양한 제스처를 지어 보이며 얼굴이 만든 표정을 돕는다. 이를테면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벌려 보이며 나 어때, 무섭지, 나는 눈이 세 개가 될 수도 있고 네 개가 될 수도 있거든, 하고 말하는 것 같다. 혹은 나 어때, 예뻐, 하고 말하는 것 같고, 나 지금 잔뜩 골이 났으니까 건들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걸, 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콕콕 쥐어박는 손가락이 너 그렇게밖에 못해, 라고 타자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어색해하는, 실제로 진지하거나 짐짓 진지한 체 하는, 상대방을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보는, 때론 스킨헤드족처럼 공격적인 표정을 연출해 보인다. 얼굴과 손가락의 공모가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기호를 연출해 보인다는 점에서 코믹과 일러스트를 그리고 클리세를 떠올리게 한다.


이 표정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페르소나가 지어 보이는 표정들이다. 주체는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로 분리된다. 나에게 속한 주체가 아이덴티티라면, 페르소나는 타자에게 내어준 주체에 해당한다. 그렇게 나는 타자들에게 나의 얼굴을 내어주고, 그네들이 나로부터 보고 싶어 하는 표정을 연출해 보여준다. 바로 가면이다. 페르소나의 어원이 가면이며, 작가의 그림들 중엔 곧잘 실제로 가면을 쓴 얼굴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면을 통해서 나를 읽고, 그럴수록 나의 얼굴은 점점 더 가면다워진다. 그 가면 뒤에 숨은 나는 어떤가. 나를 향한 타자들의 욕망과 공공연한 오독으로부터 안전한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언어유희가 아니라면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가 서로 다른 별 개의 존재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여하튼 그렇게 분리되는 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라면 그 분리로부터 유래한 불안정성과 불안은 존재론적 조건일 수밖에 없다.

 





자크 라캉은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 있지 않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너는 네가 아니란 말인가. 허깨빈가? 유령인가? 인간은 몸과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동물이다. 의식은 몸속에 안주할 때도 있지만, 곧잘 집을 잃은 미아처럼 몸 밖을 떠돌기도 한다. 여기에 나의 무의식이 하는 말은 결코 너에게까지 가 닿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너는 결코 소통할 수가 없고, 네가 아는 나는 사실은 내가 아니다. 비록 나는 너에게 코믹과 일러스트와 클리세를 보여줬지만, 그렇다고 코믹과 일러스트와 클리세와 나를 동일시한다면, 그건 오산이며 오독이다. 나는, 나의 실체는, 어쩌면 나의 실체라고 하는 허구는 결코 코믹과 일러스트와 클리세로 환원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다. 당연한 일이며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으로 드러나 보이는 코믹과 일러스트와 클리세의 이면을 읽고 속뜻을 캘 일이다.


그 이면을 어떻게 읽고 그 속뜻을 어떻게 캘 것인가. 작가는 이 모든 자화상을 볼펜으로 그렸다. 볼펜으로 동글동글 원을 끝도 없이 그려나가다 보면 무슨 최면에나 걸린 것처럼 반쯤 무의식 상태에 빠져든다(누구든 한번 쯤 경험한 것과 같이). 그렇게 마침내 얼굴이 그려지고 손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편집증적인 상태에서 건져 올린 주체가 나일까. 작가의 작업은 나, 자아와 주체, 에고와 얼터에고,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 아바타와 도플갱어의 언저리를 맴돈다. 나(실체 혹은 라캉 식으론 실재)는 어쩌면 나(개념 혹은 라캉 식으론 상징)라는 함정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 함정으로부터 이중삼중으로 분리되고 확장되는, 인과성도 개연성도 없이 마구 분절되고 접합되는 주체들을(주체가 아닌, 주체와는 다른) 끄집어낸다. 어쩌면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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