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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준 / 먹고 살기를 꿈꾸는 세대

고충환

식기에도 중고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주로 새로이 식당을 개업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결국 세척하면 새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소재도 그렇지만 특히 금속성 소재의 그릇이 많을 것이다. 깨질 염려도 없고 세척하기도 쉽고 보관하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중고라고는 하지만 일단은 버려진 것들이다. 이송준의 조각에 등장하는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중고식기는 비록 조형물로 재생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사실은 재생이라는 의미보다는 버려진 것들에 방점이 찍힌다. 그동안 인간의 삶에 복무하다가, 그리고 더러는 인간의 무분별한 식도락(욕망)에 종사하다가 폐기된 것들에 눈길이 쏠린다. 그렇게 버려지고 폐기된 것들에 무한애정이 꽂힌다. 나 또한 그렇게 버려지고 폐기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잉여인간으로 선고받고 실제로도 그런지 모른다. 공감백배다.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든 시대가 되었다. 먹고 사는 것이 위대한 세상이 되었다.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금속성 식기는 이처럼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시대며 세대며 세상을 표상한다. 지금은 먹고 사는 게 꿈이 된 세상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슬픈 일이다. 오죽 꿈꿀 게 없으면 먹고 사는 일을 꿈꿀까. 80년대에 태어나 월 급여 80만원을 버는 20대 혹은 월 급여 88만원을 버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88세대라고 한다. 45세가 정년이라는 말로서 미처 정년도 되기 전에 조기 퇴출될 수 있는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떨려난 직장인을 사오정이라고 한다.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란 말도 있고, 56세까지 직장에 남아 있으면 도둑이라는 오륙도라는 말도 있다. 다만 웃자고 하는 말들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금속성의 철 밥그릇을 소재로 이처럼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세대며 세상을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주제도 철밥통 이야기이다. 원래는 신의 직장에 비유되는 공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말이며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부류들을 비아냥거리는 말이지만, 작가의 작업에서 철밥통 이야기는 내 밥그릇 챙기기도 힘든 세상이며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세대를 표상하고, 그렇게 냉소적인 현실을 표상한다. 

화법에는 직접화법이 있고 간접화법이 있다. 메시지를 직접 겨냥한 경우와 우회적이고 암시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로 구별된다. 직접화법은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그 전달하는 폭이 좁다. 이에 비해 간접화법은 그 속뜻을 읽어야 하고 캐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 전달하는 폭이 넓고 깊다. 이 가운데 이송준의 조각이 말을 걸어오는 방식은 직접화법보다는 간접화법에 가깝다. 먹고 사는 것이 꿈인 세대며 먹고 살기가 힘든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대신 동물에 빗대어 표현한다. 일종의 비유법이며 알레고리에 호소하는 것이다. 동물에 빗대어 인간사를 표현하고 전달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우화로 읽힌다. 말하자면 먹고 사는 것이 꿈인 세대의 우울한 우화라고나 할까. 아님 먹고 살기가 힘든 세상의 냉소적인 시대적 초상이라고나 할까. 돌이켜보면 작가도 그렇지만 인간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동물들에게 참 못된 짓을 많이 했다. 동물이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자신의 겉사정과 속사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걸핏하면 동물들을 호출한다. 그렇다고 작가를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작가가 동물을 소재로 취한다고 해서 실제로도 동물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렇게 작가는 중고시장에서 구입한 스테인리스스틸 소재의 중고 식기를 재료로 취한다. 그리고 그렇게 취한 중고 식기를 자르고 구부리고 다듬고 그 표면을 연마한다. 그렇게 중고 식기는 번쩍번쩍한 금속성의 광택을 덧입은 각종 동물 형상으로 재생된다. 더러 조형물의 일부를 연마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도 하는데, 원래 전달하고자 했던 처음 의미를 주지시키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동물 형상이라고 해서 그 겉보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주문이며, 원래 버려지고 폐기된 밥그릇에서 온 것이란 점이며 마찬가지로 버려지고 폐기될지도 모를 존재 일반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하는 속뜻을 읽어달라는 주문이다. 

그렇게 중고 밥그릇은 작가의 조형에 의해 각종 동물 형상을 덧입고 다시 태어난다. 이를테면 돼지와 코끼리, 코뿔소와 표범, 황소와 귀상어 등등. 이 동물 형상들은 사실은 인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했다. 다름 아닌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같이 그들의 꿈이라고 부친 제목들이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그들의 꿈? 동물들의 꿈인가, 아님 알고 보면 동물들에 투사한 인간의 꿈인가? 이렇듯 의미심장하고 아리송한 제목처럼 동물들의 꿈 위에 인간들의 꿈이 포개진다. 

이를테면 놀이기구 용 스프링을 발판 삼아 디디고 서 있는 코끼리의 긴 코끝에는 무슨 나무나 되는 양 나뭇잎이 자라고 있다. 코끼리는 왜 놀이기구용 스프링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가. 나는 더 이상 인간의 놀이와 유희(이를테면 서커스와 같은)를 위해 복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의 이율배반적이고 반어법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바닥에 길게 드러누운, 무슨 탱크와도 같은 코뿔소가 있다. 한영애의 노랫말도 있지만, 코뿔소는 일단 한번 드러누우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여기서 실제로도 그런지 여부는 중요하지가 않다. 중요한 것은 드러누운 코뿔소가 여하튼 그런 정황을 표상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 달리고 싶다. 그런데, 현실은 달릴 수가 없다. 나는 결코 다시 일어나 달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엄연한 현실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표범의 달리고 싶은 꿈은 박제가 된 현실인식에 부닥친다. 꿈이 현실에 발목 잡혀 유보되고, 현실에 부닥쳐 산산조각난다. 이처럼 꿈과 현실은 언제나 서로를 배반하는 법이다. 그리고 유전자 조작과 종자개량을 통해 싸움소로 개발된 황소는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몸짓 속에 본성이 유폐돼 있다.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몸짓은 그의 본성이 아닌, 인간의 욕망이 요구한 것이며 만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다발을 이룬 가녀린 봉 위에 내려앉은 귀상어는 센서가 부착돼 관객이 다가가면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가볍게 움직인다. 이로써 작가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싶은 귀상어의 꿈을 실현시켜준다. 

이처럼 작가의 조각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자신이 유래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오히려 인간이 자신에게 투사한 욕망에 저당 잡힌 현실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게오르그 짐멜은 자연을 소산적 자연과 능산적 자연으로 구분했다. 자연 자체와 인간에 의해 개발되고 개념화된 자연을 구분한 것이다. 개발과 개념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이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서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고 자연을 희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동물 형상은 하나같이 중고 밥그릇으로 만든 것이다. 동물들의 처지는 결국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며 먹고 사는 것이 꿈인 우울하고 서글프고 냉소적인 세대의 메타포로서 제안된 것이다. 

작가의 조각은 광택 마감한 탓에 번쩍거리는 표면에 외부 환경을 반영한다. 작업의 표현 영역을 자기 외부로까지 확장하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무슨 거울처럼 외부 환경을 반영하는 표면은 동시에 내부 환경을 반영한다. 존재의 본성을 거스르는 문명의 기획을 반영하고, 존재를 생존의 현실로 내모는 자본의 무분별한 욕망을 반영한다. 번쩍거리는 표면만큼이나 화려한(사실은 소박하고 절실한) 이상과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맥락의 문제이다. 작가가 소재로서 도입한 동물 형상은 자연의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아님 문명의 맥락에 속해져 있는가. 문명의 맥락에서 읽을 때, 자본의 논리며 인간의 시각으로 읽을 때 동물들은 동물이 아닌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비유적 표현이 되고 우화적 표현을 얻는다. 조형물들은 동물 형상으로 보이는가. 아님, 밥그릇과 밥뚜껑과 냉면 그릇과 숟가락으로 조형된 꿈처럼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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