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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사실 회화의 기원들

김영호

관계

미술사의 문맥에서 어떤 작가에 대한 평가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진행된다. T.S 엘리어트가 <전통과 개인의 재능>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주장했듯이 ‘어떤 시인이나 어떤 장르의 예술가도 혼자의 힘으로는 자신의 완전한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미적 비평’의 원칙으로 내세운 대조와 비교의 방식은 비단 예술가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어떤 미술경향이나 미술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이러한 관계의 분석 방식과 태도는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서세동점의 시대적 상황에서 머물러 있던 타자(제3세계)의 위상은 포스트모던 시대 이후 점차 주체로서 자존감을 되찾고 있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 극사실 회화에 대한 연구 역시 관계의 방식, 즉 대조와 비교의 방식을 통해 그 비평적 의미가 생산되어 왔다. 이때 상대적 비교의 대상은 비단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발현한 하이퍼 리얼리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듬해에 창설되어 한국미술의 아카데미즘을 주도해온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내부의 실험적 사실주의 경향들도 포함된다. 또한 극사실 회화와 친족성이 있는 경향들뿐만 아니라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 당대미술의 주류를 형성하던 모더니즘 계열의 경향들 역시 새로운 형상미술의 태동을 위한 반작용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비교연구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의미는 이러한 타 장르와의 관계망 속에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그 관계의 구조 속에서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이나 국전의 재현적 사실주의와 차별화 되는 고유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주체들은 “우리는 하이퍼 아류가 아니다”라는 표어를 통해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역으로 미국 하이퍼 리얼리즘과의 적극적 비교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한편 국전에서의 새로운 형상미술 계보에 대한 관계 분석은 비교적 소홀히 이루어져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선행연구

김복영 교수는 2001년 삼성미술관이 기획한 <사실과 환영: 극사실 회화의 세계>에 즈음하여 한국의 극사실 회화의 기원에 대해 장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70-80년대 신형상회화: 극사실 회화의 기원”이라는 제명으로 발표된 이 연구문에서 그는 우리의 극사실 회화를 기법적 측면이 아니라 형상충동 내지는 구상충동의 시대적 표출과 표명으로 격상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의 미술현상 중에 형상(구상)성을 띤 일련의 경향들을 통섭해 미술 생산의 본령인 창조충동의 문맥에서 다룰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신형상 미술의 다양한 범주 안에 극사실 회화를 포함하자는 의견에는 몇 가지 혼란이 따르게 된다. 우선 구미지역에서 발생한 <신형상 미술(Nouvelle Figuration)>은 1960년대에 시작되고 1980년을 전후해 이미 국제화된 양식으로서 그 형상성이나 내용 그리고 기법상에서 하이퍼 리얼리즘과는 다른 맥락을 띠고 있다. 가령 프랑스의 누벨 피규라시옹(Nouvelle Figuration)이나 독일의 신표현주의(New Expressionism) 그리고 이태리의 트랜스 아방가르드(Trens Avantgard)와 미국의 배드페인팅(Bad Painting) 등은 이미 차별적 형식논리를 지닌 양식으로 정착되어 있다.
상기의 신형상 미술은 현대사회의 폭력과 교란 그리고 정치와 역사에 대한 정보 등을 나타내고 있으며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동시적 표현과 즉자성이 풍부한 회화작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중미술과 연결고리가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의 극사실 회화로 하여금 기법과 내용에 있어 독립성을 강조시키는 방향으로 논의를 유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형상충동을 충족시키는 신형상 미술의 범주에서 다루어진 수 있지만 독자적인 형식과 논리를 지닌 하나의 경향으로 좀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발생배경

한국 극사실 회화가 등장하던 1970년대는 일명 ‘모더니즘 미술’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3년까지는 설치, 오브제, 하이퍼, 실험미술 등의 경향이 공존하다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행위, 개념, 물성으로 대변되는 단색평면주의 추상회화가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극사실 회화는 당대미술의 주류를 형성하던 단색평면주의 회화에 대한 반작용과, 새로운 형상성에 대한 관심이 내부로부터 일면서 젊은 작가들 사이에 산발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대학에 재학 중이던 고영훈은 미국의 팝아트에 영향을 받아 1973-1974년 드럼통이나 군화, 배낭, 코카콜라병, 코트 등을 그렸고, 이석주는 1973-1975년 즈음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을 접하고 자신들의 형상작업에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들 극사실 회화의 선구자들은 국전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 화가로의 입문을 위한 유일한 관문이었던 국전은 대학에 재학중인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마네가 관전에 <풀밭위의 점심>을 출품해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처럼 고영훈은 국선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그러나 조상현과 이석주는 1973년도 제22회 국전에 입선했다는 사실은 국전에서도 반아카데믹한 작업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극사실적 경향은 1979년까지 국전의 서양화 분야에서 ‘비구상 부문’으로 취급하는 등 그 위상 자체에 혼선이 있었다는 점이다.
향후 한국 극사실 회화의 주역이 될 청년작가들은 국전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고영훈에 따르면 1970년 국전에 대통령상을 수상한 김형근의 <과녁>에 자신을 비롯한 고등학생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72년에 이끼 낀 비탈과 산을 그린 하동균의 <돌아오는 날>, 75년 경의 손수광의 실내, 정물, 온실 등을 그린 작품들과 구자승 패턴의 그림들이 사실적 그림의 계보였다고 술회한다.
모더니즘 계열과 대립적 긴장 관계에 있던 국전 내부에서도 아카데믹한 사실주의를 넘어 형상회화의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소위 ‘지나치게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인 미술을 외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전의 낡은 재현회화에서 벗어나 일상적 현실과 사물의 표상에 눈을 돌린 작가들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손수광 외에도 1971년에서 1974년 사이에 새로운 형상작업을 시도했던 박동인과 배동환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은 고영훈, 이석주, 조상현 등과 더불어 처음으로 1970년대 전반기에 극사실적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한 작가들이었다. 앞의 세 사람은 관전을 통해 신형상 미술을 실험했다면, 뒤의 세 사람은 모더니스트적 태도로 신형상 미술에 접속했던 경우라 할 것이다.



박동인이 1971년에 제작한 <아침>이나 1972년에 제작한 <바람> 그리고 1973년의 <그리움>, <염원> 등은 철도를 그린 것으로 극사실 회화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로서 손색이 없다. 그는 1963년부터 1980년까지 국전에 연속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박동인은 그의 동료였던 손수광과 배동환과 더불어 한국의 새로운 경향의 형상 미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주역들이었다. 1973년 이 세 명의 작가가 명동화랑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명칭이 <신형상전(新形象展)>이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주목해야할 대목으로 생각된다. 박동인은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잡초로 소재로 바꿔 다작을 남겼다.
배동환은 1975년부터 ‘치밀한 묘사력과 함께 절제된 감정을 바탕으로’ 돌맹이 그림 <성지> 시리즈를 그리며 ‘엄숙하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해 주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극사실적 기법을 버리고 변신을 꾀할 때 까지 그는 국전 출신의 작가로서 한국의 신형상주의 미술의 확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74년 국전에 <어머니의 방>을 출품해 문화공보부장관삼을 수상하는 등 국전파로서 출세했고 1975년 국전에 <우리들의 성지>라는 제명으로 그린 자갈밭을 출품하며 극사실 회화의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고영훈은 대학 2학년 재학시절인 1973년 군화를 그렸고 이듬해에는 코카콜라와 배낭 그리고 코트 등의 사물을 극명한 이미지로 포착하는 한편 배경 없는 화폭에 사물의 물성을 강조하면서 극사실 경향의 작업을 시작했다. 1974년에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돌그림 <이것은 돌입니다>를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면서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적 색채를 띤 경향으로서 극사실 회화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조상현 역시 대학시절부터 국전의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형상미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통 표지판, 포스터, 신발, 옷 등 일상적 소재들을 실재감 있게 표현했고 실물에 가깝게 묘사하면서 새로운 사실주의를 지향했다.
신재남은 1978-1985의 시기에 ‘금속성 시대의 은빛환상’ 이라는 테마로 마이크나 자동차 같은 금속성 소재의 작품을 중심으로 현실과 사회에 대한 고발과 인간성 회복에 주안점을 둔 작업들을 생산했다. 그 외에도 김강용, 김창영, 김홍주, 변종곤, 서정찬, 이재권, 이호철, 정규석, 주태석, 지석철, 한만영 등이 각각의 고유한 기법과 내용을 통해 새로운 조형실험을 전개했다. 주태석은 박동인과 마찬가지로 철도를 소재로 택했는데 표현 방식에서 둘 사이에는 차별화 되는 점들이 명백하게 주어진다. 주태석의 경우 정밀하게 묘사된 철로나 부목은 평면적 시점에서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화면전체에 깔려있는 조약돌 역시 크기나 묘사방식에 있어 균질한 위상을 지닌 채 존재할 뿐이다. 거기에는 시각체험을 자극하는 원근감도 배제되어 있으며 거대한 철로의 단면만이 화면에 익명적으로 옮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중심도 주변도 없이 어느 부분만을 절단해 제시해도 우리들의 시지각에는 동일한 효과를 전해준다. 이러한 점에서 초현실적 기운이 맴도는 풍경으로서 박동인의 그림과 차이가 있다.
극사실 회화가 집단적 움직임을 통해 화단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와서 였다. 1978년 3월에 일주일 간격으로 미술회관에서 열렸던 <사실과 현실>과 <전후세대의 사실회화란>전은 극사실 회화의 세를 이루는 전시로 알려져 있다. 또한 <형상 ‘78>전 등이 개최되면서 연합적 움직임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형상 ’78>전은 홍익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선후배들이 인맥과 나이 제한 없이 함께 참여하고 그 이후에는 그룹으로 나뉘지 않고 통합적으로 나갔다”는 이석주의 회고는 극사실 회화의 경향이 통합적 성격을 띤 집단적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1981년 결성된 <시각의 메시지>는 극사실 회화의 집단적 움직임을 주도한 또 하나의 그룹으로 알려져 있으며, 새로운 형상미술의 지지를 표방하면서 출발한 언론사의 공모전인 <동아미술제>와 <중앙미술대전> 역시 새로운 환경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 이들 그룹과 전시들은 앵포르멜과 모노크롬회화의 관념적 추상회화를 극복하는 한편 전통적 사실주의 회화와도 차별화된 새로운 경향의 형상미술을 전개하면서 1070년대 중반 이후의 화단에 새로운 활기를 주었다.
1981년에 들어 한국화단의 지형도를 재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전이 제30회 행사를 마지막으로 폐지된 것이다. 신인 미술인들의 유일한 등용문인 관전이 막을 내리면서 국전의 맥을 이어오던 아카데미즘 미술 역시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고 민전은 점차 아마추어들의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비난이 꼬리를 이었다. 국전의 폐지는 1950년대 이래 내려오던 국전 아카데미즘 진영과 모더니즘 운동의 대결구도가 무너지고 모더니즘 계의 작가들이 화단의 헤게모니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특성

한국 극사실 회화의 특성은 소재나 내용 면에서 작가들의 주관적 감성이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현상의 시각적 재현에 충실한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팝아트와 연계성을 지니면서 도시풍경으로서 광고와 네온사인(로버트 커팅햄), 카페, 슈퍼마켓 그리고 기술적 생산물로서 오토바이(탐 블랙웰), 자동차(로버트 벡틀), 트럭(랠프 고잉스)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인물(척 클로스)과 정물(찰스 벨)에 이르기 까지 그 폭은 한정되지 않았다. 하이퍼 리얼리즘의 제작방식은 차갑고 기계적인 형상을 근간으로 재현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테크닉 역시 에어브러시를 사용하거나 감광유제를 바른 캔버스 위에 사진전사 기법에 의해 매끄럽고도 물감의 물성이 잘 드러나지 않은 표면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포토리얼리즘(Photo Realism) 또는 수퍼리얼리즘(Supper Realism) 등으로 불리우는 명칭에서 보듯이 일상적 대상을 사진적으로 재현(reproduction) 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 극사실 회화의 특성은 소재나 내용 면에서 하이퍼 리얼리즘과 차별성을 지닌다. 우선 소재는 돌(고영훈), 벽돌(김강용), 벽(이석주), 자갈(배동환), 물방울(김창열), 모래(김창영), 흙(서정찬), 들풀(박동인) 등의 자연(가공)물이거나, 쿠션(지석철), 계단(변종곤), 철로(주태석) 등의 ‘사회적 이용물’이 주를 이루며, 예외적으로 자화상(김홍주) 등이 있다. 산업 소비사회의 산물들을 다룬 경우는 표지판(조상현)과 깡통(차대덕)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인간적인 체감이 배어 있는 것” 혹은 “자연과 인간의 체감이 흠뻑 배인 것들” 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김복영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극사실 회화는 “해석적인 면을 심층적으로 설정 하면서 특히 표면형상 만은 차가운 물상으로 부각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일견 모순된 두 얼굴이 존재한다.”
가령 배동환의 <성지>는 ‘시대상황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징’으로 해석되며, 박동인의 화면에는 인간의 모습이 부재하지만 인간의 흔적은 기억처럼 숨겨져 있다. ‘황량한 가을의 들녘에 고무풍선, 낫자욱이 선명한 벼포기’ 등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동인의 작품에는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찰과 그에 대한 세계인식이 맞물려 있다. 1970년대 초반, 철로와 신호기가 있는 자연풍경으로 화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이후 1980년대에 중반에 이르는 그의 작업은 “조형공간 안에서 미디엄 효과를 주로하여 자연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나이프나 붓 등의 도구적 특성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갈대나 부드러운 꽃의 표현을 시도함으로서 독자적인 양식을 세워나갔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 한국 극사실 회화는 소재나 내용 그리고 기법면에서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 회화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우리의 구상세대들은 구미지역에서 유입된 사조들을 모방하지 않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신형상 회화의 전통적 기법과 모더니즘의 감각을 상호 융합시켰기 때문이다.

결언

1970년대에 확산된 한국 극사실 회화의 작품경향은 외부의 영향과 내부의 당위성이 서로 교차되는 가운데 탄생된 것이었다. 미술의 영역에서 그것은 당시 국전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모더니즘의 감각과 그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점에서 해석의 특수성이 주어지며 이러한 사실은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탄생은 미국과는 다른 역사와 문화적 상황의 결과였다.
그러나 1980년에 들어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 현실에 대한 참여와 발언을 작가의 소명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민중미술에 의해 미술계가 양분되는 현상을 보임으로서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경향들은 한국현대미술사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다시 흘러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사실 회화에 대한 미술시장과 미술관 차원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현대미술의 주요 경향의 하나로 붐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사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한층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 극사실 회화의 기원에 대한 기존 연구의 내용들을 반복나열하는 일을 가능한 줄이고 소홀히 다루어져 왔던 작가들에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특히 국전 내부에서 전통적 사실주의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형상미술을 탐구했고 그 나름의 성과를 거둔 작가들을 소개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이들에 대한 추가 연구는 한국 극사실 회화를 포함한 한국 신형상미술의 계보를 정리하는데 필수적이며 앞으로도 더 많은 작가들의 개별적 성과들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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