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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 스쳐가는 시간의 파수꾼

김영호

인문학적 기질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강요배가 차지하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고등학교 미술교사, 미술운동단체의 일원, 직업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지금의 화가생활까지’ 그가 걸어온 삶의 노정은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인문의 터를 탐사하는 선지자를 연상케 한다. 그의 화력 전반이 비판적 성찰로 일관되었던 것은 비단 군부독재 이후 격변하는 당대의 정치사회적 정황에 대응한 지식인 청년의 소명의식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유전자는 철학적 사유에 적합하게 조직되어 있었고, 당대 최고의 불문학자 대열에 속해있던 형과 나누어 받은 문학적 감성 역시 그의 위상을 남다르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미술교사로 활동하던 1980년 교지에 기고한 「민들레-세계에 대해 생각하기」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전 영역을 넘나드는 한편의 철학논문’으로 그의 분석적 성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글이다.

강요배의 선지자적 역할은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선배들과 더불어 ‘보수적 미술과 전위적 미술의 속물적 취향과 고답적 관념에서 벗어나 현실과 현실에 대한 발언의 새로운 의미규정을 통해 참되고 적극적인 미술의 기능을 회복’하는 운동에 동참했다. 어느 비평가의 지적처럼 이 단체가 원대한 예술적 과제와 이상의 달성에는 충분히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사와 현실에 기반을 둔 비판적 사실주의 조형언어를 세우는 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강요배가 1980년대 전반에 시도했던 문자도, 지판화, 그리고 다양한 재료의 삽화는 이 그룹의 맥을 잇는 실천적 경향이 되었다.

강요배에게 삽화는 문학적 서술의 한계를 상상으로 이끌어내어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데 그치는 보조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경향이었다. 그는 이를 ‘출판미술’로 명명하고 제3의 활동의 장이 되기를 제안했으며 이후 대서사적 그림모음집 『동백꽃 지다』를 출간함으로써 실천에 옮기게 된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연구대상으로 채택해 귀향하고 정착한 1992년 이후 강요배는 ‘서사적 리얼리티를 자연의 서정성으로 녹여낸’ 작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 살이 20년의 방황기를 접고 화가로서 회화예술의 원대한 터인 자연에 정주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술교사로서, 미술운동단체의 일원으로서, 직업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그리고 지금의 화가로서 그가 경험한 세계는 철학적 비판과 역사의식 그리고 문학적 서사의 구조로 짜여진 유전적 성향과 더불어 그의 예술에 독보성을 부여하는 원인으로 남아 있다.

현실과 발언 그리고 민중미술
우리 미술계는 강요배를 민중미술의 주역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가 ‘현실과 발언’의 집단활동을 통해 이후에 실현되는 민중미술의 형성과 전개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요배는 엘리트적 사유방식을 지닌 작가이고, 삶의 지평을 넓히는 실천적 행동으로서 예술의 길을 선택했으며, 실존적 자유의지를 지향하는 작가적 태도를 고수했다는 점에서 이념으로 무장된 민중미술의 작가가 아니었다. 유홍준의 지적처럼 ‘현실과 발언이 창립된 3~4년쯤 후 민중미술론의 도전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으며, 자기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을 대세에 추수하여 끄떡이거나 침묵하지 않았고, 새로운 상황의 변화와 인식에 대한 확신이 있기까지 10년 동안 자기작업을 중단한 참을성이 가히 영웅적인 사람’이었다.

민중미술은 현실과 발언의 후광을 받으며 미술의 또 다른 기능을 신장시켰지만 ‘자본계급과 대립한 노동계급이 민중의 주체라는 급진적 사회변혁 운동의 이념에 예속되어 나중엔 미적 자율성과 예술적 빈곤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한국의 민중미술이 당시 국제적으로 전개되던 신형상주의 미술 경향(프랑스의 자유구상, 독일의 신표현주의, 미국의 배드페인팅,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 등)에 동참하지 못한 것은 자본비판, 노동계급, 당파성 등이 민중미술운동의 중심개념으로 변질되어 조형적 지평을 넓히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오히려 그의 종사자로부터 시작된 소외’의 성향은 강요배를 비롯한 현실과 발언 동인의 예술적 이념이나 조형적 지향과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는 ‘경직된 사회변혁 운동의 정치노선에 예속되어 미적 자율성과 예술적 특수성을 상실함으로써 결국 질적 빈곤을 초래하게 된’ 민중미술을 비판했다.

강요배는 자신에게 지워진 현실에 대한 발언의 소명은 미술인이기 이전에 동시대를 호흡하는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또한 그에게 민중의 개념은 특정 단체에 의해 독점된 협소하고 예각화된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 지녀야 할 ‘보편적이고 폭넓은 의미의 민중’이며 누구에게나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개념이었다. 그에게 강령화된 민중의 이념이나 경색된 집단행동은 비민중적이며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강요배는 운동가가 아닌 화가로서의 자리를 언제나 지키고자 했으며 화가로서의 소명을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철저히 실천하려 했다. 그에게 현실은 역사의 실험실이자 생존의 터로서 자연 그 자체였고 발언은 그 역사와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조형적 번안의 행동이었다.

삽화미술의 가능성
전기한 1980년대 중반 이후 강요배는 삽화가로서 삶을 살았다. 1985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하는 고향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 책 『제주도 이야기』에 삽화를 그렸으며, 이듬해부터는 출판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1988년에 창간한 한겨례신문에 현기영의 소설 『바람타는 섬』에 1년 가까이 삽화를 그리면서 그의 고향 제주의 근현대사에 대한 문학적 관점을 명확한 삽화형식의 시각언어로 서술하는 원리를 스스로 체득하게 되었다.

강요배에게 삽화 연구는 향후 그의 예술적 행보에 대중적인 유대감을 강화하는 원천이 되었다. 부언하자면 1980년대의 삽화작업을 통한 인물의 표정묘사와 상황설정의 연구는 대중적 의미생산과 소통에 근거해 사실주의 미술양식을 심화시키는 데 더없이 소중한 시기였고 향후 그에게 4ㆍ3항쟁을 주제로 한 역사그림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바탕이 되었다.

강요배의 삽화는 그의 작가적 의식과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핵심적 개념으로서 삶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어떤 단일한 형상을 통해 인간 삶의 여러 가지 복합적인 국면과 정서들을 응축하고 집약하는 능력’은 그의 회화적 역량의 핵심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였다. 이러한 삶을 둘러싼 메시지들은 그의 1980년대 초에 제작한 <인멸도>, <정의도>, <탐라도>, <맥잡기>, <장례명상도>에서 잘 드러난다. 성완경이 지적했듯이 이들 작품에는 ‘삶을 응시하는 깊은 시선과 종합주의적 사유, 신비스럽고 주술적인 요소들, 철학적인 명상과 해석을 담고 있는 문자나 기호들, 제주도의 토착 정서에 근간을 두고 있는 고유한 상징이나 어법’ 등이 좀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개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강요배는 사회로 진출한 지 10년 만인 1992년 첫 개인전을 ≪제주민중항쟁≫이라는 제하에 열고 역사그림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치고 힘든 과정이자 역설적으로 방황에 지친 자신을 지탱해줄 에너지원이 되었다. 그리고 강요배는 이 전시를 계기로 ‘고난의 땅’ 고향 제주로 돌아와 정착한다.

“바람 부는 대지에서”
바람과 오름의 땅 제주는 강요배에게 세계관의 변화와 함께 자신의 예술에 대한 일종의 확신감 같은 것을 제공했다. 그것은 제주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그 땅에 존재하는 생명들에 대한 자기동일화의 가능성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20년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에 내려왔을 때 곧바로 그 품에 안착한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적응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동안 방랑자로서 그는 제주의 자연과 역사의 현장을 탐사하면서 제주의 원형적 상(象)을 발견하고 그것에 스스로 동화되는 삶을 살았다. 한라산 자락인 귀덕에 화사를 지어 안착하기 전까지 이렇게 다시 10년이 지난 것이다.
1994년 학고재에서 가진 개인전 ≪제주의 자연≫은 이 탐사의 시기에 그가 체험한 섬의 풍광과 미물을 그린 작품으로 꾸며졌다. 그는 이 전시를 위해 ‘바람 부는 대지’라는 제하의 발문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그의 난해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북쪽 먼 바다로부터 하늬바람이 불어오면 바다는 크게 뒤채이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세찬 바람에 휘몰린 바다는 물밑 바위들에 속이 긁혀 허옇게 뒤집힌다. 가파른 갯바위는 거센 물살을 가르고 베며 앞으로 나아간다. 맵찬 칼바람에 살점 깎이운 팽나무는 검은 뼈가지로 버틴다. 바람은 구름을 휩쓸어 황무지를 후려친다. 돌팍에 얽히고설킨 덩굴들은 가싯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한다.”

바람 부는 4월의 대지에서 강요배가 마주한 ‘바다와 팽나무 그리고 가시덩굴 덮인 돌담’은 ‘뒤채이며 일렁이며 휘몰리며 긁히고 깎이고 후려치며 긁고 찢으며 저항하는’ 자연 현상의 주체들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그 주체들은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객체로 인식되며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가 보다 복합적인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강요배는 자연과 ‘자기동일화’의 과정을 거치며 자연에서 숨 쉬는 생명들과 그것을 양육하는 에너지로서 바람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감정은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자연에 대한 자신의 심상을 화폭에 옮기는 과정에서 강요배의 자연에 대한 자기동일화는 다중적 구조를 지니게 된다. 거친 제주의 바람이 바다와 팽나무 그리고 돌담을 긁고 깎고 후려치고 찢으며 저항하듯 작가는 화면에 그 자연 현상을 적용시키며 작품을 제작해냈다. 바람과 팽나무의 관계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찢고 저항하는 상호관계이듯 작가와 캔버스의 관계 역시 그렇게 상호적이며 이 과정에서 자연과 작가 그리고 그림은 복잡하고 다중적인 서사적 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제 캔버스에 펼쳐진 바다와 오름과 노을 진 하늘은 자연에 대한 작가의 심상을 드러낸 서사적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징과 은유의 방법론이 자리를 틀게 되었다. 고향의 자연은 작가에게 현실이었으며 그 안을 살아가는 미물들의 생명현상은 상징과 은유의 서사적 맥락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성찰이며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존재로 그 개념이 연장되기 시작했다. 그는 철학적 유전자를 지닌 화가였고 성찰의 대상은 들판에 서식하는 생물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존재로 그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 하고 있다.

“고난의 땅을 온 육신으로 일구어 흙과 하나된 저 제주의 할머니, 저분이 스러지면 누가 이 대지를 어루만질 것인가?”

동백꽃 지다
강요배는 1998년 ≪동백꽃 지다≫라는 제하의 전시회를 마련함으로서 귀향 후 그의 화업이 역사와 자연을 함께 끌어안은 화풍으로 정착되어왔음을 알렸다. 때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처절한 사건으로 기록된 4ㆍ3항쟁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강요배는 이 전시를 계기로 동명의 화집을 출간했다. 이 화집은 제주의 4ㆍ3항쟁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자료집 성격의 책으로 제주 민중들의 투쟁과 처참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삽화형식의 데생과 아크릴화로 되살려낸 것이다. 그는 4ㆍ3항쟁을 겪은 제주인들의 증언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이 방대한 역사의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정리했다.

‘제주 4ㆍ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제주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었다. 강요배는 이 대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그림 59점을 제작했으며 4ㆍ3항쟁 관련 자료를 모았다.(도판4) 이 화집의 목표는 사건에 대한 기록과 진상 규명 그리고 명예회복 등의 차원을 넘어 궁극적으로 ‘개인사나 사회사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자연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제주의 땅을 뒤흔들어놓았던 대사건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식은 ‘평화와 사람다움을 위하여’ 새롭게 환기되어야 하며 그것은 역사의 무게와 깊이를 가늠하며 현재를 사는 우리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의 주소지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었다. ≪동백꽃 지다≫의 그림 구성은 항쟁의 뿌리, 해방 1945~1946, 탄압 1947, 항쟁 1948, 학살 1949, 동백꽃 지다 그 이후 등 6개의 마디로 짜여져 있다. 그 내용은 제주의 4ㆍ3항쟁을 중심에 설정하고 시간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제주의 시원에서 문을 연다.(도판1) 여몽연합군에 맞서 삼별초군과 함께 싸운 ‘삼별초 전투’ 그리고 왜구 퇴치와 1901년의 이재수 난 그리고 잠녀들의 반일 항쟁과 노역의 역사를 항쟁의 뿌리로 아우르고,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정치적 타협과 이후의 처절했던 상황을 파노라마처럼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폭압적 살인 기제의 작동, 매몰 협박 감시에 의한 인멸과 봉인’의 현장을 역사의 저장고로부터 끄집어내어 표현해냈다.(도판3)

앞서 언술했듯이 이러한 역사화는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화재가 구상되고 자료를 토대로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자기동일화는 큰 고통을 동반한 것이었다. 강요배는 이 고통을 스스로 선택했으며 이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거리에 함성과 최루가스가 가득하고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30대 후반의 상황에서 나약하고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선택하려 했으며 이 때 4ㆍ3을 생각한 것이라 고백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절망에 빠진 그에게 작은 희망으로 다가왔다.

≪동백꽃 지다≫에 전재된 그림들은 강요배 특유의 간결하고 힘찬 필치로 그려져 있으며, 삽화가로서 경력이 축적된 인물의 표정과 상황적 묘사가 실감 나게 표현되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보는 이들의 시각을 흡입하는 회화적 구성과 극적 표현력이다. 종이에 펜과 먹으로 그린 작품들의 명백한 지시적 데생들을 포함해 콩테로 그린 <발포>와 목탄으로 그린 <입산>은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도판2) 아크릴화인 <광풍>이나 유채로 그린 <빈젖> 그리고 어느 하나 소홀하기 어려운 회화작업들은 그 자체로서 작가가 제안했던 출판미술의 가능성을 실현한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도판5) ≪동백꽃 지다≫는 1998년에 전시와 함께 책으로 출간되었고 10년 뒤인 2008년 도서출판 보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제작되었다.(도판6)

자연의 가슴으로 귀향
2000년 강요배는 제주의 서쪽에 자리 잡은 귀덕리에 화사를 새로 지어 안착했다. 그의 안착은 육신이 머물 곳 이상의 터로 정주를 의미한다. ‘귀향해서 곧바로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해 동안 자연의 언저리를 헤맨’ 이후에 찾은 정신적 공간으로의 안착이며, 언젠가 되돌아가야 할 자연의 품으로의 안착이었다.

돌이켜 보면 강요배의 자연관은 나름의 변화를 거치며 작품으로 표상되어왔다.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목으로서 팽나무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1994년 ≪제주의 자연≫전을 계기로 쓴 글을 보면 제주의 바람은 ‘구름을 휩쓸고 황무지를 후려치는’ 주체였다. (도판7) 아울러 그 황무지에 뿌리내린 팽나무는 ‘맵찬 칼바람에 깎이고 검은 뼈가지로 버티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돌팍에 얽히고 설킨 덩굴은 ‘가시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하는’ 존재였다.(도판10) 이러한 수목은 말 그대로 제주인들의 처절한 삶의 과정을 묘사한 대목이자 그 역사의 길목에 선 작가의 심상을 드러내는 대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귀덕리 화사로 안착한 이후 그의 자연관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대립과 저항의 관계항에서 친화와 융합의 관계항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제 바람은 ‘인고의 생명을 안아 키우는’ 에너지이자 ‘바람과 나무는 서로를 멸하지 않고 서로를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강요배의 제주 민중항쟁사와 결부해 보면 서로 다른 주체들 사이의 대립과 저항의 관계를 넘어 제주의 자연과 그 땅에서 사는 생명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판8, 9)

강요배가 정주한 화사는 조그만 우주가 되었다. 집단으로 자라는 수선화 꽃이 눈 속에서 향기를 퍼트리다 홀연히 자태를 감추면 겨울이 끝을 내리고, 그가 파놓은 조그만 연못에 봄이 찾아오면 온갖 미물들이 수면 공간 위아래에서 열띤 정사를 벌이며 생명을 노래한다. (도판11, 12) 내천 둑 너머 펼쳐진 한라산 자락 그 위로 떠 있는 광월은 시간을 알리는 추처럼 화사의 지붕 위를 선회하여 동에서 서로 이동하니 우주의 중심임을 선언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강요배의 화사는 절대 안전지역에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앞마당 너머 내천은 건천으로서 평소에 물이 말라 있지만 비가 쏟아지면 한라산에 내린 비를 한데 모아 수백의 야생마처럼 때로 밀어닥치니 그의 마당은 단번에 물바다가 되었던 것이다.(도판13) 그러나 이제 그 둑마저 재정비하고 방어막을 강화했으니 염려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두려운 자연의 에너지를 경험하고 난 후에 그 생리를 다스리는 지혜를 배웠으며, 화사가 자리한 위치가 한라산의 기를 쓸어 맞부딪히고 꺾이는 명소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자연과의 교감과 감흥을 생명으로 하는 작가로서 이보다 더한 우주의 중심이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이러한 화사에 자리한 강요배의 작업은 끝없는 생명현상을 영위하는 미물들의 이미지로서 화초와 조충 그리고 시간을 알리는 달의 운행과 별자리가 선명히 박힌 천궁을 화면 위에 의미화하며 재생산하는 과정으로 변화되었다. (도판14, 15)

심상 풍경이 된 섬의 자연

강요배의 예술적 행위는 자연에 대한 성찰과 그 조형적 번안으로 성취되고 있다. 자연의 질서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수직의 축과 천지와 미물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 수평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공의 축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 축을 교차시키며 현상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 교차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그 접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허용해왔다.

강요배는 두 개의 축이 이동하는 교차점에서 변화하는 시대상에 따라 이전과 다른 위상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미술제도를 비판하는 교육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생존의 지평에서 미술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는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강요배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지평에서 역사와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작가는 은유와 상징의 방식들을 도입했다. 가령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팽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하늘에 잔가지를 실핏줄처럼 펼친 형태의 고목이자, 역사의 거친 바람을 한 몸에 받으며 땅을 지켜온 인간의 은유적 표현이다. 마을마다의 어귀에 자리 잡아 천 년의 역사를 지켜온 증거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대지와 하늘의 공간을 상호 연계해 순환하는 만물의 생명현상을 가동하는 대자연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요배의 팽나무에서 역사의 박동과 생명의 외침을 읽어낼 수 있다.

강요배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언어적으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강요배의 작품에 치밀하게 녹아 저장된 형식들의 면면에서 작가의 이상이 밀물처럼 거대하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는 바람 속에 인고하는 사물을 통해 스스로 사는 방식을 터득해왔다. 바다와 산과 고목이 산만한 세계의 모습에 일정한 좌표를 형성하고 좌점을 주면서 정주의 세계로 들어올 것을 권고하고 있음을 배웠다. 이러한 그의 도가적 사상이 그의 작품에 담겨진 바람의 비밀을 해석하는 요체임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가 한국현대미술사의 독보적 위상을 지닌 작가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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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동안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신문과 책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1981년부터 1990년까지 ‘현실과 발언’동인으로 활동했다. 1989년부터 3년 동안 ‘제주 4ㆍ3항쟁’을 다룬 그림 50점을 그려 1992년에 ‘동백꽃 지다’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에 정착해 ‘제주의 자연’을 그리고 있다. 1998년 4·3항쟁 관련 연작을 완성하여 화집 『동백꽃 지다』를 출간하였다. 1998년에는 ‘민족 예술상’을 받았고 민족미술인협회 회장과 제주 4ㆍ3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영호
제주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도불,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하면서 파리1대학(소르본)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운영위원, FIAC 《한국의해》 커미셔너,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전시총감독,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 커미셔너, 현대미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광주비엔날레 이사, 국제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는『뒤샹, 나를 말한다』, 저서로는 『미술시사비평』 등이 있다.


강요배, 시원, 종이에 펜 붓 먹, 38.7××53.2cm, 1989
강요배, 입산, 종이에 목탄, 49×76cm, 1991강요배, 한라산자락 사람들, 캔버스에 아크릴, 112×193.7cm, 1992
강요배, 학살, 캔버스에 아크릴, 97×162cm, 1992
강요배, 광풍, 캔버스에 아크릴, 145×227cm, 1991
강요배, 동백꽃 지다, 캔버스에 아크릴, 130.6×162.1cm, 1991
강요배, 팽나무와 까마귀, 캔버스에 아크릴, 97×162.2cm, 1996
강요배, 다랑쉬 오름, 캔버스에 아크릴, 97×162.2cm, 1993
강요배, 산꽃, 캔버스에 아크릴, 72.7×116.8cm, 1993
강요배, 마파람 I, 캔버스에 아크릴, 72.7×116.8cm, 1992
강요배, 물매화 언덕, 캔버스에 아크릴, 97×130.3cm, 2001
강요배, 미리내,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cm, 2001
강요배, 황파 II, 캔버스에 아크릴, 324.4×112.1cm, 2002
강요배, 월광해, 캔버스에 아크릴, 112.1×162.1cm, 2004
강요배, 별흐름, 캔버스에 아크릴, 70×145.5cm,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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