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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수 / 나무의 내부에 새긴 일상

박영택

인간의 몸을 기꺼이 받아주고 편안히 지탱시켜 주는 도구들은 모두 안정감 있는 네 개의 다리를 지녔다. 침대, 책상, 의자나 식탁이 그렇고 의자나 자동차 역시 그렇다. 우리들은 그것들과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넙적하고 평평한 사각형의 상판에 네 개의 다리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형국이다. 옛 사람들은 그러한 가구조차 음과 양의 조화로 파악했는데 그러니까 상판은 하늘(양)이고 이를 떠받치는 네 개의 다리는 땅에 붙어있는 짐승의 다리와 동일시해서 음(땅)으로 여겼다. 음과 양이 다부지게 꽉 조여있는 충일한 상태를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개다리 소반’이라고 부르는 상 역시 개의 다리를 형상화해서 만든 것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옛 책상, 의자, 밥상 등의 다리가 모두 짐승의 다리에서 그 모양을 따왔음을 알 수 있다. 자기 몸을 일으켜 세워 직립하는 일은 땅에 붙어서 하늘을 이고 있는 형국이다. 인간의 몸을 지닌 이들 역시 두 발로 땅을 딛고 정수리에 하늘을 얹혀놓고 있다.

백연수가 통나무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 대충 깎아 만든 형상은 네 다리를 지닌 동물이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나무덩어리다. 그 형태가 문득 의자나 탁자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특정한 동물의 형상을 재현한 것은 아니고 보편적인 네 발 달린 동물의 이미지를 가볍게 연상시킨다. 혹은 일상의 사물들도 떠올려준다. 그 연상은 보는 이의 욕구에 의해 가변적이다. 특정한 동물의 모습을 떠올릴 수 도 있고 아니면 그저 나무라는 물질, 하나의 덩어리로 볼 수 도 있다. 아니면 의자나 벤치를 기대할 수도 있다. 사실 그 모두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조각은 그것이 재현한 이미지이기 이전에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은 로댕 이후 현대조각의 문제이고 따라서 이후 조각은 물질과 이미지 사이에서 말을 건네는 일이 되었다. 백연수가 만든, 연출한 동물이미지/나무의 물성은 전시장 바닥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다. 마치 풀밭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제류들처럼 말이다. 전시장에 들어온 긴장된 시선들은 편안하고 자유롭게 풀어져있는 온순한 초식동물(?)을 내려다보면서 순간 이완된다. 그것들은 또한 공원이나 숲 속에 놓인 작은 의자나 나무의 잘려지고 남은 밑둥을 연상시켜준다. 그것은 쉼표처럼, 휴식처럼 자리한다. 관자들은 그 사이를 배회한다. 현실적 삶의 공간인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것은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아울러 직립된 인간의 정면성에 호소하는 시선이 아니라 내려다보는 시선을 제공해준다.
백연수의 조각은 특정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이전에 나무라는 물질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양한 나무의 내부로 들어가 그 속살을 벌려놓았다. 그 속은 땅과 물과 햇빛, 그리고 공기가 만들어낸 견고하고 은밀한 나무의 안이다. 우리는 어떤 단단한 물질의 내부로 들어갔을 때 느끼는 모종의 쾌감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나무의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표현행위 이전에 본능적인 소통이나 대상에 대한 간절한 탐닉과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는 없다. 모든 내부는 외부로 직결되고 그렇게 확인된 내부는 표면으로 나앉을 뿐이다. 더 들어가면 내부는 사라져버린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적당한 거리, 깊이에서 내부를 보여준다. 그 안은 전기톱과 끌에 의해 비로소 밖으로 나왔다. 작가는 나무가 지닌 본래의 상태, 결과 색상, 속살과 자국, 시간이 지나면서 금이 가고 터져나가는 것까지도 그대로 작품 안으로 수렴시킨다. 시간의 흐름이 나무의 피부, 물질과 함께 한다. 나무는 자신의 살로 그 시간을 증거한다. 비록 잘려진 나무지만 그것은 외부와 지속해서 관련을 맺고 있는 중이다. 식물로서의 삶이 아직 마감되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식물성의 존재가 동물성의 육체를 그려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돌과 나무는 이미지의 근원과 관련된다. 소멸되는 존재를 영속적인 재료에 새겨 오래 살아남게 하려는 것이 이미지였고 따라서 그 영속적인 재료로서, 말랑거리는 인간의 유한한 살을 대신해 시간에 저항하는 견고한 재료인 나무와 돌이 쓰였음을 기억해보라.

전통적인 목조각의 정형화된 방법론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쳐내고 거칠게 추출해낸 자취는 나무의 무겁고 단단하고 느리며 다소 답답한 느낌을 증발시킨다. 나무의 덩어리감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은 따뜻하고 가볍게 사물의 외형에 기생한다. 동물이미지나 혹은 일상의 소품과 사물들이 그것이다. 2004년도 전시제목은 <동물과 살다>였고 2005년도 전시는 였는데 근작은 이다. 이러한 전시제목은 그간의 작가의 관심의 이동을 정확하게 보여주며 작품의 변형과정을 솔직하게 증거한다. 유난히 동물을 좋아했던 자신의 기호와 관심이 동물의 이미지를 목조각으로 재현하게 했는데 동시에 그 안에는 목조각으로 어떻게 동물을 형상화할까, 기존의 목조각과 다른 조각적 방법론을 무엇일까, 나무란 물질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까, 조각과 회화, 설치의 영역을 하나로 통합하면 어떻게 될까 등의 질문과 모색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와 함께 그 위로 살림과 육아, 그리고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는 현실적 상황이 다시 눈처럼 내려앉아 있다. 그래서 근작은 더 이상 동물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작업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현재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반영하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드문드문 놓인 동물의 형상은 작은 의자처럼 자리하고 있고 그 동물의 이미지를 남겨두기 위해 파낸 자잘한 나무 조각들은 흡사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거울 표면에 빼곡히 부착되어 있다. 버려진 나무의 잔해, 흩어지고 뜯겨진 상처들을 다시 모아 회화적 표면을 구성해 보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매우 작은 형체가 나무 판 위에서 불거져 나와 엎드려 있는데 이를 유심히 보면 다름아닌 비스켓, 과자임을 알 수 있다. 아이가 먹는 과자나 일상의 소품들을 자연스레, 소박하게 올려놓고 있음을 본다. 흔히 조각적인 대상이 되는 소재로부터 이탈해서 일상에서 건져올린 소소하고 볼품없는(?) 사물들을 무심하게 깎아내고 있다. 이 표현의 비권력적 측면과 무심하면서도 자잘한 사물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두드러지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조각과 회화의 경계가 흥미롭게 맞물리고 겹쳐지는 장을 연출하고 있음도 눈에 띤다.

근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My working table이다. 좌대와 작업실 책상, 씽크대가 구분없이 맞물려있는 사각형의 테이블에는 작업구상을 그려놓은 스케치북과 노트, 결혼앨범 그리고 크레용으로 스케치를 해놓은, 이제 곧 깎아 나갈 작은 나무조각과 토막 난 등 푸른 생선, 홍당무, 그리고 아이의 장난감 등이 한데 어우러져있다. 그것은 현재 작가의 삶, 일상을 풍경처럼 보여준다. 아마도 작가는 현실 안에서 이 같은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삶의 위안과 위로, 활력을 부여하고 있는 듯 하다. 자신에게 납득이 가고 자기에게 의미있는 작업을 하고자 하는 중요한 덕목을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이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작업은 유머러스하고 친근하며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긴다. 무심하고 자유롭게 쳐나가며 다듬어놓은 자취가 일상적인 사물을 매력처럼 안겨주고 그 위에 얹혀진 색채들은 나무의 물성을 실재하는 사물의 피부로 전이시킨다. 감각적이고 가볍게! 팬시한 감각, 대중문화와의 친연적인 감수성, 기존 목조각의 관례에서 벗어난 발랄한 상상력과 직관적인 몰입으로 드러난 나무의 물성해석, 그리고 회화적인 표현과 설치적 연출 등이 어우러진 작가의 작업은 나무란 존재가 어떻게 한 작가의 일상과 접목되어 그녀를 대신해 마음과 삶의 풍경을 연출하는 매개가 되고 있는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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