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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의 회귀-하종현論

윤진섭

자연에의 회귀-하종현論




Ⅰ. 하종현이 <접합(Conjunction>이라는 일관된 명제로 추상화에 몰입해 온 지도 어느덧 서른 해를 훨씬 넘겼다. 참으로 장구한 세월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하종현은 마대 천과 유성 물감을 가지고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전개해 왔다. 그는 걸쭉하게 갠 유성 물감을 마대 천의 뒤에서 밀어 넣는 특유의 ‘배압법(背押法:Bae-ap technique)’을 사용, 독창적인 단색화(Dansaekhwa)의 세계를 구축했다. 나는 수차례에 걸쳐 그가 창안한 이 독창적인 기법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바 있는데, 그 중에서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접합> 연작은 이처럼 캔버스의 뒷면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고작 작품의 명제나 써넣는 소극적 기능을 지닌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나 작품 뒷면의 가치를 창조적인 의미로 전환시킨 것이다. 캔버스의 뒷면에 대한 그의 이러한 발견은, 캔버스 천을 예리하게 찢은 루치오 폰타나나 캔버스 모서리의 존재를 부각시킨 프랭크 스텔라의 초기 실험에 비견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 역시 매체의 존재 내지는 기존 회화의 관례에서 배제되었던 특정 부분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졸고, 행위를 매개로 한 물성의 다양한 변주-하종현의 <정년기념전>, 미술평단-


‘접합(接合)’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물이 ‘합한(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전적 의미로는 ‘한데 대어 붙임’(민중 엣센스 국어사전)인 동시에 ‘어울려 맞붙음’(새 국어 대사전)이다. 영어 ‘conjunction'도 마찬가지로 ’서로 합침(a joining together)‘ 혹은 ‘서로 합쳐진 것(being joined together)’(Webster's New World Dictionary)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명제를 하종현의 작품에 적용시키면, 캔버스의 뒷면과 앞면을 ‘한데 대어 붙이는’ 그 특유의 작업 양태를 잘 보여준다. 캔버스의 뒷면에서 침투한 물감이 앞면에 스며든 형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때 물감이 ‘합침’ 혹은 ‘합쳐짐’을 매개하는 필터가 마대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동작이 능동과 피동인 것도. 이와 관계된 작가 자신의 발언을 음미해 보자.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냄으로써 하나의 물질이 자연스럽게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흘러나갈 때, 그리고 흘러나간 물질들의 언저리를 느긋이 눌러 놓았을 때, 내가 바라는 것은 가능한 한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되도록 말하지 않는 쪽에 있고 싶다.”

-하종현, 미술평론가 김복영과의 인터뷰 중에서(1984년)-


이 발언을 통해 하종현은 물질을 손에서 놓아주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른바 ‘피동’에서 ‘능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가능한 한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함으로써, 사물이 더 이상 인간에 의한 ‘통어(control)’의 대상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통어(統御)란 바로 ‘근대성(modernity)’의 핵심이 아닌가. 

알다시피 자연을 통어하고(control), 요리하거나(manipulate), 조작함으로써(operate) 인간의 지배 하에 두려고 한 것이 르네상스 이후 서구 근대화의 기나 긴 과정이다. 그런데 사물을 놓아줘서 그 자체가 말하게 하려 한다는 이 피동에서 능동에의 전환은 자연 스스로의 상태를 지향하려고 한 하종현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마치 애써 잡은 물고기를 손에서 놓아줌으로써 물고기가 물(자연)을 향해 헤엄쳐 가도록 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방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자연에의 귀의가 아닌가. 근대의 초극이 아닌가. 이 짧은 글에서 그처럼 복잡한 문제를 모두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Ⅱ. 흰색, 회색, 연한 미색, 다갈색, 검정 기미가 있는 암청색 등 단색으로 이루어진 하종현의 이번 근작들은 마대의 천 사이로 배어나온 찐득한 물감을 특별히 고안한 주걱이나 붓으로 밀거나 그려서 행위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이 행위성이 <접합> 연작의 두드러진 특징임은 전에도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런 가운데서도 빗살문은 새롭게 시도하는 것이다. 연한 회색의 물감을 특별히 고안한 빗 모양의 주걱으로 지긋이 밀어 빗살문을 드러낸 면들의 조합은 이전의 양태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다. 이번 근작들은 화면에서의 구도, 즉 좌우 대칭에, 위에서 아래 혹은 아래에서 위로 긋거나 미는 세로 형태의 구조가 두드러지고 있는데 이는 화면을 보다 안정감 있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하종현의 회화 작품에서 물감은 능동적 주체이기도 하면서 여전히 피동의 상태에 있기도 하다. 캔버스의 뒷면에서 배어나온 물감의 층은 작가의 손에 의해 눌려지거나 밀쳐짐으로써 화면에 모종의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흔적은 어떤 사물의 모습도 연상시키지 않는다. 즉, 하종현은 일체의 재현을 거부함으로써 물질의 소박한 자연적 상태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서 전개되는 하종현의 행위는 원초성 그 자체다. 무엇을 염두에 두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감의 ‘장(field)’에 신체를 빌어 개입함으로써 행위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숙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화면의 통어 문제다. 이 점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하종현의 작업에 있어서 캔버스의 뒷면은 작업이 최초에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는 그 위에 걸쭉하게 갠 물감을 페인팅 나이프로 밀어 넣는다. 물감은 성긴 마대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 송글송글 맺히게 된다. 그렇게 형성된 물감의 장(場:field)은 작가의 의식이 전적으로 개입하기 힘든, 우연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신체는 단지 개입할 뿐이며, 작가의 의식은 나이프를 쥔 손의 속도와 힘의 강약에 국한된다. 작업의 국면이 바뀌어 캔버스의 전면(관객이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작업에 이르면, 비로소 작가의 의식이 전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작가는 캔버스 화면을 ‘통어(control)’하고 ‘요리(manipulate)’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종현이 전적으로 기댄 것은 서구 모더니즘 회화(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의 개념에 가까운)의 전면적(all-over) 문법이라기보다는 재료로서의 물질에 가깝다. ‘전면’은 ‘오염된’ 이념인 반면, 물질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졸고, 행위를 매개로 한 물성의 다양한 변주-하종현의 <정년기념전>, 미술평단-


물감으로 조성된 화면에 신체를 투입하여 행위의 흔적을 가하는 일은 하종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행위의 원초성을 지향하는 행위다. 그러나 그에게는 화면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전체적으로 통어하려고 하는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다. 물감을 매개로 능동과 피동이 교차되는 이 통어의 문제는 그래서 그가 앞으로 풀어가야 할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빗살문의 등장과 함께 근작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화면의 대위법이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화면의 좌우에 포진해 있는 넓은 사각의 색역(色域:color field) 중에서 하나는 캔버스의 뒷면에서 스며든 물감을 자연 상태 그대로 놔두고, 다른 하나는 붓질을 전면적으로 가하고 있는데, 이 같은 변화는 화면에 대한 의식의 완전한 해방과 함께 향후 그의 작업을 눈여겨봐야 할 하나의 단서임에 분명해 보인다.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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