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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타 / 현실의 개입 혹은 거리 두기

윤진섭

김아타, 현실의 개입 혹은 거리 두기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김아타가 <뮤지엄 프로젝트>의 후기 작업에서 예의 아크릴 박스를 제거하리라는 것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리고 2001년에 그것은 실현되었다. 억압과 박제를 의미하는 아크릴 박스가 제거되면서 작업은 스케일 면에서 더욱 확장되었으며, 작업 방식은 더욱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밀랍을 이용한 부처상의 등장은 이와 때를 같이하며, 본격적인 설치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김아타는 작년 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참가할 무렵부터 <중국 프로젝트>에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입버릇처럼 중국 이야기를 했고, 가슴속에 든 포부를 자주 드러냈다. 만리장성에서 대규모 퍼포먼스를 하고 싶다, 서안의 진시황릉에서 병마 토용을 주제로 작품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자주 피력하곤 했다. 나는 그 꿈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고 내 나름대로 기대를 했었다. 중국이 그의 손에 정복되길 기대하면서.......


 김아타의 이번 전시는 그러나 그런 기대를 해온 내게는 적이 실망스런 것이었다. 너무 큰 기대를 했었던 탓일까. 적어도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일에 대한 추진력을 믿고 있는 나는 그의 이번 작업이 보여준 스케일의 왜소함과 상상력의 위축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번 <China> 연작은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지닌 예술가일지라도 거대 자본과 손을 잡지 않으면 꿈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입증한 예로 기억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만리타향 외지가 아닌가. 만일 그에게 바네사 비크로포드처럼 막강한 후원이 이루어졌다면 그 역시 그녀에 못지 않은 작업을 보여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는 베니스와 상파울루 같은 해외의 유명 비엔날레 현장에서 늘 느끼듯이, 현대미술은 역시 자본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현대미술 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설치작업은 크리스토의 경우에서 보듯이 거대한 자본의 투입이 필수적이다. 그의 작업이 단순히 상상력의 제시로 끝날 수 없는 이유는 작업의 실행과정 자체가 하나의 도전인 동시에 꿈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김아타는 이번 <China> 연작에 사람 대신 흰색의 마네킨을 등장시켰다. 진시황릉의 토용을 연상시키는 흰색 마네킨들을 중국의 상징인 만리장성,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 자금성에 늘어놓아 역사에 대한 현실의 개입을 꾀했던 것이다. 그는 <뮤지엄> 연작에서 보여주었던 벌거벗은 인체대신 생명이 없는 마네킨을 통해 절대권력을 풍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흰 붕대로 감은 미이라를 연상시키는 그의 마네킨들은 마치 이제 막 무덤을 박차고 걸어나온 것처럼 생생한 중국 역사의 현장에 출몰해 초현실적인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project 'The China' #14>에 오면 더욱 선명해 진다.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흰색 마네킨은 화자이자 증인처럼 보인다. 화면의 중앙을 가로질러 만리장성이 보이고, 기념촬영을 하는 두 명의 남녀 관광객 뒤로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즐기고 있다. 전면에는 블러링 기법으로 촬영하여 희미하게 움직임이 포착된 사람들의 이미지가 뒤섞여 있다. 현실과 과거가 혼재된 듯한 상징적 장면이다. 그의 작품에서 마네킨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이행하는 일종의 메신저인 동시에 매개물이다. 그것들은 신새벽의 북경 뒷골목이나 공원, 혹은 붉은 색 담장이 높게 둘러쳐진 골목에 출몰하는가 하면, 절대권력을 누리던 자금성이나 천안문광장에 도열하기도 한다. 김아타가 연출하는 이 초현실적인 풍경은 그것이 주는 강렬한 인상 못지 않게 왕조사로 점철된 중국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요소는 붉은 색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이미지와 흰색이 상징하는 ‘비현실성’ 간의 대비이다. 그의 이번 <China> 연작에서 인간의 부재와 마네킨을 통한 시선의 ‘거리 두기’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뮤지엄> 연작이 인간을 통한 이데올로기의 해석(가령 종교와 같은)이었던 반면, <China> 연작은 일정한 시선의 ‘거리 두기’를 통해 관객들의 역사에 대한 해석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이 작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작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시선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떠한 형태로든 대상에 대한 해석과 의식의 개입이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아타의 이번 <China> 연작에서는 인간의 부재를 통해 시선 자체를 객관화하고자 한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자신의 해석은 최소화하고 그 대신 그 통로를 관객에게 최대한 열어주고자 한 수용자 중심의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김아타는 스케일이 큰 작가다. 그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뮤지엄> 연작을 완성시켰다. 나는 그가 보여준 이 프로메테우스 정신이 매우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이번 작품에 크나 큰 실망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그 혹은 그처럼 재능은 있으나 자본이 없는 작가들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없는 ‘우리’의 무능에 대한 실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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