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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식 / 실(絲), 삶에 대한 성찰의 계기

윤진섭

실(絲), 삶에 대한 성찰의 계기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Yoon, Jin Sup  


Ⅰ. 신진식은 누구인가? 아마도 젊은 미술인들에게는 이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컴퓨터 아트’나 혹은 ‘상호작용’(오늘날 미디어 아트나 퍼포먼스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과 같은 용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다면, 이미 20여 년 전에 컴퓨터 아트의 제1세대 작가로 신진식이란 이름이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1983년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그는 작업 초기에 실험에 기반을 둔 개념적 작업에 열중하며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메일 아트를 비롯하여 신문 광고, 책 등 아날로그적 형식의 매체를 이용하여 다양한 자신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펼쳐나갔다. 이러한 아이디어 퍼포먼스 혹은 아이디어 아트라고 칭할 수 있는 예술 행위는 당시 그가 사랑하던 ‘곽공주’라는 이름의 여인을 향한 것이었음으로 예술은 생활과 등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그는 1984년에 행한 메일 아트에서 “나는 공주를 사랑한다.”라는 문구가 적힌 엽서를 500부 한정판으로 인쇄하여 공중 전화번호부에서 무작위로 뽑은 주소로 발송하였는데, 이는 공주라는 이름이 ‘공주(princess)’라는 보통명사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행위였다. 


 이처럼 신진식의 작업이 지닌 언어 게임적 측면은 그 무렵 그의 실험 작업을 관류하는 기본 컨셉트 가운데 하나였다. 또 하나,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지만 1980년부터 당시 실험미술의 무심사 경연장이랄 수 있는 [앙데팡당]전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 순수미술 계열로 전환한 것은 훗날 그의 진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이 무렵 그는 하이퍼 리얼리즘과 개념미술에 경도되었는데, 이 시기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질풍노도기’에 해당하므로 그의 의식이 이후 어디로 향하게 되는가 하는 점을 아는 것은 그의 예술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특히 1982년 당시 독일에서 돌아온 전위연극인 무세중의 <통, 막, 살> 공연 워크숍에 참여한 경력은 향후 그의 퍼포먼스 작업과 관련, 매우 중요한 체크 포인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수십 차례의 퍼포먼스 발표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행위미술 분야에서는 그의 이름이 생소한 까닭도 따지고 보면 그의 작업이 연극 계열의 퍼포먼스에 연계돼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는 수년간 [춘천 마임 축제] 등 연극 관련 행사에 주로 참가하였으며, 그가 미술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최근 몇 년 간에 걸친 [한국실험예술제]를 비롯한 몇 차례의 회화 전시를 통해서였다. 따라서 이번에 공평갤러리에서 열리는 신진식의 퍼포먼스 발표회는 미술계의 복귀를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인 셈이다. 


컴퓨터 아트 퍼포먼스, 01:30:00, 2005


Ⅱ. 1993년, 신진식은 뉴욕으로 이주 후, 1994년 백남준이 기획한 [Seoul Nymax](뉴욕 엔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 참가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한동안 본격적인 작가 활동은 물론 TV 프로듀서와 광고 영상 감독 등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되는데, 이는 훗날 미디어 아트는 물론, 단편 실험영화, 단채널 비디오, 퍼포먼스, TV 프로그램 등 멀티(다원)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2005년, 미국에서 귀국한 신진식은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퍼포먼스, 단편 실험영화, 전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술적 아이디어를 실현해 왔다. 이처럼 왕성한 그의 실험정신은 1980년대 초중반의 개념 미술적 경향과 컴퓨터 아트의 선구자로서 이론과 창작에 기울인 노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컴퓨터 아트와 관련해서는 전문적인 책자를 저술할 만큼 전문적인 지식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90년대를 통해 컴퓨터 아트와 테크놀로지 아트의 대표작가로 각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빛과 움직임](1989, 무역센터 현대미술관), [미술과 테크놀로지](1991, 예술의 전당), [젊은 모색](1992, 국립현대미술관), [과학+예술](한국과학진흥재단) 등 중요한 국내의 기획 전시회에 그가 꾸준히 초대를 받은 사실은 과거 유망작가로서 신진식의 명성을 알려주는 지표들이다. 



Ⅲ. 최근 몇 년간 신진식은 멀티 퍼포먼스를 통해 사회적 발언을 쏟아냈다. 행위와 컴퓨터를 이용한 영상, 미디어 아트 등이 결합된 대규모 퍼포먼스와 회화 작업은 성(性), 인권, 대량 소비사회의 단면, 비인간화된 사회 현실, 노숙자를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 등 사회적 금기와 후미진 사회의 이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있다. 신진식이 사회에 대해 기울이는 이러한 인식의 이면에는 80년대 초중반 한국 미술계를 강타한 민중미술의 등장에 따른 일련의 전시들, 즉 [삶의 미술], [을축년 미술 대동잔치] 등에 참여한 바 있는 그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진식이 현실 참여적인 시각만 견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퍼포먼스 중 일종의 카타르시스로서의 행위, 즉 다중이 참여하는 집단 페인팅 퍼포먼스 또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바, 이는 순수한 예술 행위를 통하여 치유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는 자신이 직접 퍼포먼스를 수행하지 않고 연출자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는데, 퍼포먼스에 등장하는 행위자들에게는 미술교육의 연장으로서 직접적인 체험과 관련되기도 한다. 


 2012년 [한국실험예술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300초 릴레이 퍼포먼스]에서 신진식은 <옷입다>라는 퍼포먼스를 발표, 1등상인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전자시계의 전광판이 ‘300’에서 ‘0’에 이르는 시간 동안, 5명의 여성 행위자가 번갈아 남이 벗어 놓은 옷을 입는 순환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공평갤러리에서 선보일 신진식의 퍼포먼스 <실/Strand>은 그의 대표작인 <잠자다>(2011), <옷입다>(2012)를 비롯하여, 신작인 <실>, <보자기>, <선 긋기>, <닦다>, <무중력 실험>, <오늘 뉴스>, <내게 안 맞는 내 그림자> 등 9편이 실연(實演)되며, 이는 다시 비디오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오늘 뉴스, 퍼포먼스, 00:10:00, 2012


 신진식은 이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사회적 속박, 위선을 통한 생존의 욕구, 체제에의 순응과 개인적 의지의 문제 등 서로 길항관계에 있거나 모순되는 성질들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인간관계를 끈의 유비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행위자들의 행위는 작가의 말을 빌리면 “누군가가 대신 재단해 주는 나의 삶”에 대한 관객의 성찰을 촉발시킨다. 관객들은 그런 행위자들의 다양한 행위를 통해 ‘관계’의 섬세한 의미를 해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구체성이 결여된 행위는 마치 풀기 어려운 난수표처럼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상징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것의 처음과 끝은 과연 어디인가. 물론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관객의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마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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