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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비평가

윤진섭

모든 사람이 비평가 

윤진섭


 올해 10월 중순에 서울과 수원에서 열리는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학술대회의 주제는 ‘미궁에 빠진 미술비평(Art Criticism in a Labyrinth)’이다. 부제가 세 개인데 ‘분열된 사회에서의 미술과 미술비평(Art and Art Criticism in a divided Society)’, ‘소셜 네트워킹 시대에 있어서 비평적 글쓰기(Critical Writing in the Era of Social Networking)’, ‘아시아 현대미술에 관한 담론(Discourse on Contemporary Asian Art)’ 등이 그것이다.

  

 세 개의 부제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셜 네트워킹 시대에 있어서 비평적 글쓰기’는 변화무쌍한 사회 환경에 대해 과연 비평이 어떻게 대응하고 또 적응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터넷으로 인해 촉발된 소셜 네트워킹 시스템(SNS)이다. 특히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시대에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로 대표되는 소셜 네트워킹 매체는 가장 강력한 언론매체로까지 운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일방적으로 정보를 유포, 확산시키는 기존의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 등, 마셜 맥루언의 용어를 빌리면 ‘핫 미디어(hot media)'에서 개인이 정보의 생산자 내지는 발신자가 되는 ’쿨 미디어(cool media)‘로의 일대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좋게 말하면 정보와 지식의 민주화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불량 내지는 저급 정보와 지식의 확산을 의미하기도 해서 마냥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요셉 보이스의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는 발언은 미래의 시대를 정확히 진단한, 거의 예언에 가까운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주장하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구석이 있다. 가령 사진을 예로 들면, 흑백사진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누구나 사진작가가 된다는 발상은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나 어깨에 카메라를 둘러메고 사진을 찍을 수는 있었지만 필름을 현상소에 맡겨 사진을 인화하는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사진작가라고 주장하기에는 다소 겸연쩍은 구석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가 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사진의 초보자라도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고 이를 블로그에 올린다. 바야흐로 블로거가 언론인 겸 편집인, 문필가가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가 ‘소셜 네트워킹 시대에 있어서 비평적 글쓰기’의 문제를 긴급 진단의 형식으로 제기하기에 이른 것은 이런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누구나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린다고 해서 사진작가가 아니듯이, 누구나 미술작품에 대해 글을 쓴다고 해서 비평가의 칭호를 붙일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 이유는 단지 비평의 고유 영역이 흔들리고 있다는 자기 보호 본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질’에 관한 문제에 기인한다.

   

 이른바 지식의 엄밀성이 존재한다면 예술의 진정성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고야말로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덕목이 아닌가 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현 시대의 문화적 환경에서 한편으로는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한편으로는 날로 황폐화돼가는 것이 또한 바로 그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때 비평적 글쓰기 또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날 전시장에서 관객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작품 사진을 찍고 즉석에서 이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전송하는 장면은 흔하다. 이 때 비단 사진뿐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흔히 촌평이 뒤따른다. 자신의 감상을 즉석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부정확한 지식에 의존한 억지 주장도 많다. 이제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비평가’인 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면 엄살일까.

 

 인터넷이 가져온 가장 큰 문제는 옥석을 가리기 힘들다는 점일 것이다. 이른바 지식과 정보에 관한 진위의 판단을 비롯하여 질의 문제가 대두된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직면한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서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사회에서 흔히 보는 사건이니까 가정을 하면) 화가난 갑순이가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다. 그게 왜 어때서? ' 하고 대답하자 더욱 화가난 갑돌이가 갑순이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맞아서 너무 분한 갑순이는 갑돌이를 상해죄로 경찰에 고발하기에 이릅니다. 두 사람은 결국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갑돌이가 이 사건은 퍼포먼스였다고 판사 앞에서 선언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퍼포먼스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판사는 퍼포먼스라고? 하고 묻고는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까 재판을 연기하기로 합니다.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 자문을 받은 후에 사건 심리를 하기로 결정을 한 것이지요. 재판은 전문가의 자문을 얻은 후인 2주일 후로 연기되었습니다.


 참고인 자격으로 재판정에 서게 된 미술평론가 K씨는 난감했지만 갑돌이가 퍼포먼스라고 '선언'한 점에 주목을 합니다. 사람을 다치게 한 상해죄임에는 분명하지만, 퍼포먼스 작가가 그것이 퍼포먼스였다고 선언을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요. K씨는 모호하게 그럴 수도 있다고 대답합니다. 판사는 분명이 실정법 위반이므로 가벼운 폭행죄를 적용, 벌금형에 처합니다.


 이번에는 갑돌이가 법정에서 자신은 분명히 여러 사람들(판사, 변호사, 미술평론가, 방청객)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행위가 퍼포먼스였다고 선언을 한 바 있으므로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갑돌이는 재판정의 사진, 판사의 판결문 사본, 변호사의 변론 사본, 참고인인 미술평론가의 진술내용 사본, 갑순이게 발급한 의사의 진단서 등등 기록물 일체를 전시합니다. 전시명은 '초컬릿과 갑순이에 얽힌 사연에 대한 보고'로 했다고 칩시다. 갑돌이는 전말을 쓰고 게다가 이 개인전에 관심을 가진 미술평론가들이 평을 쓰고 신문사 기자들은 개언전 기사로 보도를 했습니다. 갑돌이는 이 전시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그럼 갑돌이의 이 전시는 예술행위일까요, 일상적 행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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