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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 │생태윤리적 미학의 가능성에 대한 논평

김성호

      '생태윤리적 미학의 가능성'에 대한 논평

김성호(미술평론가)

정헌이 교수님의 발제문을 잘 읽었습니다. 
발제자께서 논고 서두에서 언급한 송수영 작가의 ‘Anot A’ 구조나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 개념은 일치가 아니면서도 모순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세계관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생태학이라는 것이 이원적 세계관을 기조로 삼았던 서구에서 발원한 것임에도, 궁극적으로 이원론이 부재한 동양의 일원론적 세계관과 연동되어 고찰될 풍부한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내천(人乃天), 천인합일(天人合一)뿐 아니라, 자연, 인간, 신의 삼자일합(三者一合)적 일원론적 세계관은 그러한 예들일 것입니다. 조화와 상응을 도모하는 생태학의 최근 모색이 ‘해체적 일원론’이라는 서구의 후기 구조주의적 사유로부터 근간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해체가 전제되지 않은 일원론’으로서의 동양적 사유는 생태학의 한 방향성으로 현재도 논의되고 있지만 좀 더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할 듯합니다. 특히 논고의 서두에서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살피고 있는 발제자의 삶과 죽음에 관한 단상은 ‘장자(莊子)가 자신의 부인의 죽음 앞에서 장구를 치면서 대면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차별화되지 않은 인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발제자의 곤충 ‘잠자리’에 대한 단상이나 생태학에서의 인간 주체와 자연 사이의 상호 공존의 개념은 마치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지몽(蝴蝶之夢)을 내러티브를 떠올리게 만들기에 족합니다. 
이제 이러한 단상을 접고,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찰과 관계라는 존재적 철학을 내재한 생태학이 예술, 미학 그리고 윤리학과 어떻게 연동되는지를 이론과 예술적 사례들을 통해 다각도로 고찰하는 발제자의 논문에 대해, 많은 분들과 함께 논의하고자 필자의 미력한 논평을 여기에 보탭니다. 

발제자의 예정된 발표 제목이었던 ‘예술과 윤리의 연대 가능성에 대한 모색: 그 몇 가지 사례들’로부터 유추하고, 현 논문 제목인 ‘생태윤리적 미학의 가능성’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이 논고는 예술/윤리, 미학/윤리의 상관성을 생태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생태학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범주화하고 이에 대한 논평을 곁들인 소개를 하고 있음에도 정작 ‘생태윤리와 미학(예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몇 사례와 대략적 논의가 소개되고 있을 뿐, 이론적 논의가 구체화되지 않은 듯합니다. 즉 양자 사이의 관계 맺음에 관한 결론이 명확해 보이지 않습니다. 윤리라는 용어 자체도 논문에서 총 여섯 번 정도만 사용(생태 여성주의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카렌 워렌의 ‘변형적 여성주의’의 제안에서 언급되는 ‘맥락적 윤리’에서 한 번, ‘윤리학’이라는 용어에서 다섯 번)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논문에서 차지하는 용어의 빈도수가 논문 주제와 필히 연동되어야만 한다는 당위는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생태윤리적 미학’이라는 주제의 무게에 걸맞은 ‘생태윤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울러 그것이 미학과 연동되는 논의도 더 필요해 보입니다. 
논평자로서는 그것에 관한 논의가, 발제자가 언급하신 홀미스 롤스톤 3세의 논문에서의 다음과 같은 인용에서 일정 부분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학이 환경주의 윤리학을 위한 적절한 토대가 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미학이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에 달려있다.” 아울러 이러한 인용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석에서도 발제자의 입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홀스톤은 우리가 미학 자체를 자연사에 기초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자연사 속에서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래서 풍경 속에 우리 자신을 적절히 위치시킬 수 있다면 미학과 윤리학의 연대는 가능하다고 본다.” 즉 이러한 언급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개진한다면, 생태윤리적 미학이 가능하다는 논의로 판단됩니다. 
달리 말해, 그간 인간이 생태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했던 방식으로 ‘대상화시켰던 자연’, ‘인간/자연에 대한 이원화된 분리’라는 입장을 철회하고 ‘자연 속 인간’이라는 입장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성이라는 ‘연결’을 회복함으로써 생태윤리적 미학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제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이러한 입장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문명과 자연의 관계를 분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자연은 인간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순수’의 영역으로 분리될 수 없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모든 불평등의 패턴과 함께 얽혀 있는 생태 문제를 지역, 계급, 젠더의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생태학이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탈주하는 탈중심화 또는 다중심화의 이론이듯이, 견고한 중심으로 위계화된 질서를 해체하고 지역, 계급, 젠더의 문제로 확장하는 다양한 탈중심의 논의들로 확장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됩니다. 윤리라는 것이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보편타당한 구성원들의 공동이해와 도덕적 규범’이라고 할 때, 공동체를 자연으로, 소수자로, 주변인으로 확장하는 가운데서 귀결되는 것이 생태윤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 어떻게 이 생태윤리가 이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윤리라는 것은 결국 인간 주체의 몫이라서 인간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상황윤리’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천연기념물인 한 고목이 자라 귀중한 문화재를 파괴하고 있는 위기의 상황, 즉 문화재 보호와 생태 보호의 양자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는 상황에서 마냥 후자만을 주장할 수 없는 어려운 입장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마치 정신병동의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중증 남녀 환자 사이에서 임신이라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생명 존중의 ‘보편적 윤리’의 차원에서 새 생명을 출산해야 하는지, 아니면 명백하게 예상되는 유전적 결함을 지닌 태아의 출산을 막기 위해 낙태를 해야만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생태윤리가 실천 윤리의 입장을 견지하려면 ‘보편 윤리’와 ‘상황 윤리’의 사이에서 유효한 선택을 도모해야만 할 텐데, 이 실천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생태윤리가 어떻게 미학과 연동되어 생태윤리적 미학이 될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먼저 발제자께서 인용하고 있는 “자연사 속에서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면(...) 미학과 윤리학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홀스톤의 가정은 접목의 가능성만을 염두에 둔 이상론은 아닌지요? ‘인간 중심으로부터 탈중심화를 지향하는 생태학(생태윤리학을 포함해서)’이 ‘인간이 여전히 주체인 미학’과 어떻게 연동될 수 있는지 홀스트가 보는 관점에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아가 발제자께서는 “미학은 윤리학을 논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출발점을 제공하지 못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를 통해서 양자의 만남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즉 일련의 생태주의자들의 “자연에 개입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입장”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인간의 활동 중에 유일하게 수용할 수 있는 합목적성은 지속적인 방식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스스로 풍요롭게 하는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펠릭스 가타리의 진술에서 그 가능성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계(자연)와 관계 맺는 주체성(인간 주체 혹은 예술)의 생산’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무관심적인 예술가의 즐거움’을 도모하거나 ‘예술가의 자율적인 표현 의지’를 중시하는 오늘날 예술의 개인적 경향은, 윤리(학)이 함유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공공적 지향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발제자는 생태윤리학의 미학적 가능성을 찾는 핵심적 의제로 “나와 타자 사이에 인간 존재의 조건인 유한성을 공유하는 모종의 공동체를 개시하는 일”을 꼽고 있습니다. 아울러 발제자께서는 생태학(또는 생태윤리학)이 자연 뿐 아니라 사물, 인공 환경에까지 확장되는 가능성의 사례로 ‘공공성의 지역의 커뮤니티 아트’를 들어 설명하고 계신데, 지극히 개인적 예술 행위로서 접근할 수 있는 생태윤리학의 미학적 가능성 자체는 불가능한 것인지요? 나아가 ‘공동체 개시’나 ‘공공적 예술적 행위(예술작품)의 개입’ 외에는 오늘날 생태윤리가 미학과 만날 수 있는 방식은 없는지, 있다면 어떠한 예시가 있는지 발제자의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

출전/
김성호,「생태윤리적 미학의 가능성에 대한 논평」, 정헌이 발제에 대한 질의, 『인간과 자연의 상생-2015 UNIST 인문예술 학술 세미나』, 세미나 자료집, UNIST 융합연구센터-사이언스 월든, 2015.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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