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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천광엽 전 / 희거나 푸른 점들의 군집, 그것으로부터의 파동

김성호

희거나 푸른 점들의 군집, 그것으로부터의 파동


김성호(미술평론가)




천광엽은 2012년 윤진섭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의 단색화》 전에서 ‘포스트 단색화’로 지칭되는 일군의 작가로 소개된 바 있다. 그는 이미 1세대 단색화 작가들과 다른 회화의 지향점에서 1990년대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새로운 모노크롬 회화에 관한 독자적 실험을 거듭해 왔던 까닭에 단지 ‘포스트-단색화’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기에는 부족한 면모가 없지 않다. 그는 현재까지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의 후기 단색화 작가로 명명되고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작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 이 글에서는 여타의 포스트-단색화의 작가로 포섭되는 일군의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I. 점들의 군집 - 근원적 모나드로부터 시작되는 모듈의 세계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이나 포스트 단색화의 작가들의 작업과 대별해서 그의 독창적인 면모는 단연코, ‘점(點)들’로부터 기인한다. ‘점’의 복수적 군집이 이루는 변주에 의해서 그의 독특한 모노크롬 회화가 형성된다는 것은 유념할 지점이다.  
생각해 보라! 점은 2차원 평면 속에 자리한 가장 작은 조형 요소이다. 조형의 가장 기초적인 출발점이자 근원적인 모나드(monad)라고 하겠다. 라이프니츠(Leibniz)에게서 모나드란 “넓이나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실체”를 지칭하는 단자(單子)이자 단원(單元)인 만큼, 적어도 천광엽의 조형의 세계에서 모나드는 ‘점’이다.
피상적으로 그것은 평면의 좌표 위에서 자신의 위치만을 표시하는 가장 하등의 존재이다. 움직이지 못하니 방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좌표에서 위치만 지니고 있으니 면적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좌표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생을 연장할 뿐 어디로든 떠나지 못한다. 또 다른 점을 만나 그 사이에 운동하는 흔적인 1차원 존재인 선을 만들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혼자로 남아 있는 외로운 정주자(定住者)로서의 존재이다. 그것은 2차원의 면적을 만들지 못하니 태생적으로 다른 무엇을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조차 갖고 있지 못한 외롭고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점은 무엇보다 선-면-입체로 확장적인 장(場)을 여는 근원적 지평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천광엽의 점들은 ‘0차원 점’이기보다 자신의 몸집을 키운 ‘2차원의 작은 원형(圓形)’에 다름 아닐 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점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것은 ‘점’이라 호명을 받으면서도 2차원에서의 확장과 변주를 위해 이미 꿈틀대고 있는 생명체의 존재가 된다. 마치 우리가 관습적으로 모나드를 “작고 구조가 단순한 (원생)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작품의 모나드인 ‘점’ 혹은 ‘작은 원’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출발부터 생명을 가득 담은 원생동물인 것이다.
게다가 천광엽의 점은 단독자가 아닌 군집으로서 존재한다. ‘개별체로서의 점’은 각자의 위치를 지니고 움직이지 않는 정주의 존재이지만, 군집을 이룸으로써 우리의 망막에 부단하게 이주와 횡단을 하고 있는 존재로 각인된다. 이른바 옵아트의 시각적 결과물처럼 그의 점들은 ‘실제적 움직임(mouvement réel)을 행하지는 않지만 관객의 변하는 시점에 따라 비로소 움직이는 ‘잠재적 운동(mouvement virtuel)’으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점들의 변화를 우리는 ‘모나드’로부터 ‘모듈(module)’로의 위상 변화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건축, 기계, 컴퓨터 용어로 사용되어 온 이 모듈이란 ‘전체로부터 기능별로 분할한 논리적인 일부분’이거나 ‘부품의 각 부분’을 지칭한다. 즉 그의 점들의 변화란 ‘단독자로서의 점’(단수/모나드)으로부터 ‘군집체로서의 점들’(복수/모듈)로 확장하는 것으로 넉넉히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installation view . annual curatorial exhibition of
' Koreatomorrow' Sungkok Art Museum
2016 .11 .19 - 12. 18 . Seoul . Korea




II. 점의 변주와 파동 - 무형상의 모노크롬

유념할 것은, 그의 점 혹은 작은 원이 3차원의 구체적 형상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모노크롬이라는 ‘무형상(無形像)’을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상이 없는 추상회화로서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천광엽의 회화는 피상적으로 ‘회화의 2차원이라는 매체의 순수성을 고수하면서, 3차원화를 시도하는 재현과 같은 모든 조형 언어를 철저히 배제하는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미술’과 닮아있다. 아울러 1970년대 국내 미술계에 유행처럼 번졌던 단색화의 영향도 일정 부분 엿보인다.
그럼에도 서구의 모더니즘과 차별화를 선언하며, 1970년대 국내 단색화가 천착했던 무작위, 범자연주의, 정신성, 비물질성과 같은 맥락이 그의 작업에서 쉽사리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는 지독한 작위, 탈자연의 인위, 치밀한 계획성, 촉각적 물질성, 지난한 몸의 노동과 같은 요소가 도드라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그의 작업은 외견상 한국의 단색화보다 서구의 모노크롬과 더 가까워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서구의 모더니즘 전통은 물론이고 한국의 단색화적 양상과도 차별화되는 독자적 노선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점으로부터 점들로, 단독자로부터 군집체로, 모나드로부터 모듈로 변모를 거듭하는 ‘점의 변주’가 만드는 파동(波動)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 천광엽의 모노크롬에서 점의 변주란 파동(波動)의 다른 이름이다. 파동이란 “공간의 한 점에 생긴 물리적인 상태의 변화가 차차 어떤 속도로 둘레에 퍼져 가는 현상”을 지칭한다. 여기서 물리적 상태의 변화를 간단히 말하면 어떠한 진동이다. 그러니 파동에 관한 정의를 달리 말하면, “공간이나 물질의 한 부분에서 생긴 주기적인 진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위로 멀리 퍼져나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우리는 파동을 내보내는 원천을 파원(波源)이라고 한다.
보라! 희거나 푸른 바탕 위에 올라선 무수한 파원들을, 무수한 점들을 아니 원형이라는 무수한 점의 변주들을 말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에 개입하는 점의 크기는 모두 동일한 크기의 점들이다. 점이라는 최소의 조건을 만들고 그것들로부터 변주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점 그리고 점과 점 사이의 간격, 그리고 점들의 밀집도에 따라 그의 작품에는 일정한 패턴이 만들어지면서 저마다 다른 느낌의 모노크롬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어떤 작품은 바다처럼, 어떤 작품은 하늘처럼 어떤 작품은 풀잎처럼 푸르디푸른 균질의 풍경들을, 또 어떤 작품은 눈이 덮인 들판과 같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또는 비오는 풍경과 같은 미묘하게 변주하는 오프화이트의 풍경들을 우리에게 선보인다.
천광엽은 이러한 모노크롬을 구현하기 위해 제일 먼저 점의 군집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디자인한다. 이후 3밀리미터 정도의 작은 크기로 출력한 점들을 타공된 얇은 플라스틱 시트지로 옮겨 담는다. 시트지에 옮겨진 점들은 캔버스 표면에 부착되면서 나지막한 볼록의 요철 효과를 남긴다. 그 위에 다시 유화 물감을 올리면서 이 ‘볼록’의 부조적 효과는 더욱 배가된다. 물감이 마른 후 사포로 일일이 갈아내고 다듬어 내면서 점들의 변주를 담은 그의 모노크롬은 비로소 완성되기에 이른다. 
특히 산포된 점들의 군집적 효과를 미세하게 변화시키는 일정한 ‘결’에 따라 그의 모노크롬의 표정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때로는 격하게 일렁이는 파동의 모노크롬으로, 때로는 반짝이는 결정체들의 빛 무늬 반사광으로 가득한 모노크롬으로, 때로는 잔잔한 숨결의 모노크롬으로 변주된다. 우리가 ‘결’을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정의할 때, 그의 모노크롬에는 표정이 다른 결들로 가득하다. 어떤 작품은 청량하고, 어떤 작품은 침잠하며, 또 어떤 작품은 우울한, 다양한 표정의 결들로 가득하다.
결이라는 평정 상태는 사실 대립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의 존재이다. 마치 ‘물결’이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波動)의 형식으로 운동하고, 우리의 ‘마음결’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 속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이듯이 말이다. 천광엽의 모노크롬에는 이처럼 결이라는 평정 상태와 더불어 ‘정중동(靜中動)’이라는 운동성의 미학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91cm x 73cm oil on canvas




III. 점들의 파동이 도달하는 두 방향성
천광엽은 이번 전시에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 계열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하나는 푸른 색상 계열의 ‘옴니(Omni)’ 시리즈 작업이고, 하나는 오프화이트(off white) 색상 계열의 작업들이다. 전자가 집적된 점들을 열려 있는 공간으로 잠입하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그것들을 닫혀 있는 공간으로 은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전자가 열린 공간으로의 확산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닫힌 공간으로의 환원을 꾀한다. 어떻게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지를 살펴보자.
푸른 색상의 옴니 시리즈는 깊은 심연의 색으로 잠입한다. 여기서 옴니는 라틴어 접두사로 ‘모든, 전체의(every, all)’라는 뜻을 갖는다. 이 단어는 ‘점’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예술 요소가 그의 작품에서 곧 ‘전부’라는 의미를 전제한다. 타공된 얇은 플라스틱 시트지로부터 떨어져 나와 캔버스로 몸을 옮긴 그 무수한 점들은 얇게 바르는 유화 물감의 옷을 여러 차례 겹으로 입고서 ‘모두 함께’ 작품의 세계로 나들이를 나갈 채비를 마친다. 하나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많은 옷들을 여러 차례 겹으로 입고서 거울에 서서 하나둘씩 ‘입고 있는/입고 나갈’ 옷들을 점검하는 것이다. 볼록 점의 시트지 위에 올라와 있는 물감의 옷들을 벗겨내고 바탕의 색으로부터 점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포로 일일이 점들을 갈아 내면서 미세한 변주를 시도하면서 지난한 노동력을 투여해야 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샌딩 이후의 결과를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늘 어려움에 봉착해야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밀한 공정과 지난한 노동력이 전제되는 그의 작업들에서 특히 옴니 시리즈는 푸른 색상으로 잠입하는 열린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 그는 ‘점’이라는 기초 요소와 ‘점과 점 사이’라는 관계의 조건, ‘점들의 집적체’라는 전체상을 끊임없이 자신의 작업을 이끄는 대화의 주체들로 초대한다. 때로는 검정에 가까운 바탕색 위에서 하얀색에 가까운 점들이 저마다 물감의 속살을 사포질에 따라 벗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미묘한 대화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바탕색과 점들의 색은 경우에 따라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하고 때로는 같은 유형의 색들의 옷으로 갈아입고 관객에 선보일 나들이 준비를 마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푸른 색상 계열의 옴니 시리즈 작업은 풍요로운 색의 깊이 속에 침잠한 채 다채로운 변주를 펼쳐내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에 오프화이트 색상 계열의 작품들은 점들의 집적체와 바탕면 사이의 색상의 간극이 크게 차이를 갖지 ‘못한/않은’ 장(場)에서 미세한 변주를 시도하는 작업이다. 오프화이트란 ‘어떤 색에 흰색을 혼합하여 만든 유사(類似) 백색 또는 의사(擬似) 백색’이다. 흰색의 혼합 비율에 따라 거의 백색으로 보일 만큼 밝은 색이 되기는 하지만 흰색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색조를 띄기도 하는 이러한 색을 총칭해서 우리는 오프화이트라 한다.
이러한 색상이 주조를 이룬 그의 새로운 작업은 중성성(neutralité) 혹은 중립성의 상태에서 색상의 변주를 시도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똑 같은 복장과 똑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쌍둥이 사이에서 양자가 다른 주체임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이 시리즈 작업은 처음부터 버겁게 끌어안는다. 그것은 창작의 범주를 스스로 한계를 짓게 만든 상태에서 벌이는 극한의 실험마저 전제한다.  
그러나 중성성의 전략은 스스로 한계를 구획하는 까닭에 외려 결과론적으로 미세하지만 명징한 차이들을 만들어 낸다. 보라! 아이보리 계열의 오프화이트 작품은 실제로 흰색 계열의 캔버스 바탕 위에 올라선 노란색 시트지로 된 점들이 사포질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노란색의 시트지가 샌딩으로 인해 하얀 색의 원래 바탕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캔버스의 바탕색과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은 그의 점들이 20세기 신인상주의가 색채 병치를 통해 도모했던 시각적 혼합이라는 과학적 방식의 효과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컨템포러리 추상으로 전환하면서 도달한 지점이다. 작품에 가까운 거리를 가지면서 확인하게 되는 이러한 효과는 실제 원거리에서는 은폐되어 있다. 물론 옴니 시리즈도 근거리와 원거리에서의 관자의 지각이 갖게 되는 결과는 상이하다.
오프화이트 계열의 작품에서는 바탕색과 점들 사이의 색상, 명도, 채도의 간극이 비교적 좁은 까닭에 옴니 시리즈의 풍요로운 심연의 깊이가 만드는 열린 공간과는 확연히 다르게, 닫힌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양자의 시리즈 작업은 천광엽의 전체 작품 세계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것은 점들의 파동이 이루는 이번 전시의 두 방향성이다. 향후에 등장할 또 다른 작업들과 맞물려 하나와 또 다른 하나가 만나 이루는 하모니의 세계인 것이다. 



off white n' omni blue




off white series 117cm x 91cm




IV. 모노크롬 아닌 모노크롬
천광엽에 대한 한국의 ‘포스트-단색화 작가’라는 평가는 정당하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포스트라는 접두어로 뭉뚱그려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작품 세계가 일군의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과는 명백하게 다른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점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조형요소로부터 자신의 모노크롬 작업의 근저로 삼고 펼쳐내는 무한한 변주의 세계에서 찾아진다.     
그는 점 하나에 전체를 담고자 파동의 흔적들을 만든다. 파동으로 하나와 전체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원효와 의상대사가 실천하는 화엄(華嚴)의 기본 논리, 즉 ‘하나가 곧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라는 사고와 다를 바 없다. 즉 천광엽의 모노크롬은 화엄사상을 축약한 다음과 같은 말, ‘하나 안에 전체, 전체 안에 하나’ 그리고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중일절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과 ’일즉일절다즉일(一即一切多即一)’을 실천하려고 애쓴다. 아울러 ‘한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다 들어있다’는 ‘일미진중함십방(一微塵中含十方)’ 역시 실천하고자 한다.
어떤 차원에서는 이 파동이 다른 파동과 만나 일으키는 간섭 현상(干涉現象)까지도 기대한다. 간섭 현상을 “두 개 이상의 파동이 한 점에서 만날 때 중첩되어 진폭이 합해지거나 상쇄되는 현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분명코 파동이 만드는 흔적들로부터 근원한다. 파동의 흔적을 플라스틱 시트지로 된 ‘볼록의 점’으로 돌출시키고 다시 ‘오목의 점’으로 깎아 내면서 그는 오늘도 점들의 파동을 실험한다. 서로의 몸을 주고받아 비로소 ‘하나의 전체가 되는 천광엽만의 모노크롬 아닌 모노크롬의 세계’를 만들면서 말이다. ●


출전 /

이 글은 원래 2016년 가인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카탈로그 서문의 용도로 작성되었으나 갤러리 사정 상 전시가 미루어지게 되었고, KIAF의 부스전에서 이 글보다 적은 3페이지 분량으로 발표되었다.  

김성호, ' 희거나 푸른 점들의 군집, 그것으로부터의 파동' , 카탈로그 서문, (천광엽 개인전, 2016. 10. 13-16, KIA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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