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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핀포인트전 / 17인의 핀포인트

김성호

17인의 핀포인트, 모두의 핀포인팅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I. 핀포인트를 탐색하는 모두의 핀포인팅  

2023년 하반기 성신여대 조소과 석박사 과정 세미나 전시는 핀포인트(Pinpoint)라는 타이틀을 제시한다. 핀포인트가 무엇이고 이 전시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영어 사전에서 핀포인트(pinpoint)는 1849년 이래 핀(pin)과 끝점(point)의 합성어로 ‘핀의 끝’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항공학에서는 ‘공중에서 식별된 장소’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같은 분야에서 1917년에는 ‘정확하게 위치를 찾다’는 동사로 사용되었고 1944년에는 공중폭격과 관련하여 이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군사학에서는 ‘정밀 조준 폭격’을 의미하는 말로 핀포인트 혹은 핀포인트 범핑(pinpoint bombing)을 사용한다. 

오늘날 핀포인트는 명사로는 ‘정밀 조준 폭격’뿐만 아니라 ‘핀의 끝, 작은 지점, 정확한 지점’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한편 동사로는 ‘정확히 찾아내다, 정확히 기술하다’ 등이 그리고 형용사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정확성과 정밀성으로 수행된’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오늘날은 핀포인트(pinpoint)처럼 핀과 포인트를 붙여 사용하거나 핀 포인트(pin point)처럼 두 단어를 떨어뜨린 채 사용하기도 하고 핀-포인트(pin-point)처럼 하이픈을 연결해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용례가 위에서 언급한 동일한 의미의 동사, 명사, 형용사로 사용된다. 

전시 기획자들은 아래의 인용에서 보듯이, 이러한 핀포인트를 ‘불빛이 비치는 작은 지점’으로 해설하고 전문 예술가가 되기 위한 수련의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들의 현재 위치를 기획 전시로 자가 점검한다: “불빛이 비추는 작은 지점이라는 뜻의 핀포인트는 정확한 지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는 작업 과정의 한 지점에 밝은 빛을 비추어 작업의 길을 명확히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강조하여 보여줄 수 있는 전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문 예술가가 되기 위한 수련의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 혹은 간단히 말해 ‘신진 예술가’로서의 위상은 어디에 있고 그들이 추구하는 창작의 지향점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 속에서 ‘정확한 지점’을 강조하는 전시 타이틀은 지금의 ‘부정확한 지점’을 점검하고 재조정함으로써 ‘정확한 지점’을 얻기를 원하는 기획자들의 바람을 담은 것이라고 하겠다. 

생각해 보자. 예술 창작에 있어서 ‘정확한 지점’이란 모호하다. 어쩌면 이 용어 자체가 무모한 것일 수도 있다. 예술이란 예술가 개인 혹은 그룹의 기호와 내밀한 세계관을 예술계의 제도와 현장 속에서 드러내는 행위이자 그 결과물이 아니던가? 그것은 개인마다 다른 색깔을 지니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지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술가들의 작업이 의식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지속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 개인의 창작 지향점 자체가 애초에 불명료한 것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가 불명료한 미지의 세계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실험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 아래서 예술 교육은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서 예술 창작의 방향성을 자가 점검하는 ‘정확한 지점’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논의해야만 한다. 예비 예술가 혹은 신진 예술가로서 찾고자 하는 창작의 지향점과 그것에 대해 교강사와 지속해서 논의하는 방식을 통해 자가 점검하는 반성적 성찰이 교육의 장에서 펼쳐져야만 한다. 그래서 명사로서의 핀포인트와 그것의 언저리 혹은 경계의 범위를 동사로서의 핀포인트로 규명해야만 할 것이다. 즉 이번 전시 핀포인트가 지향하는 의미는 명사를 동사로 규명하는 역할을 하나로 실행하는 동명사적 표현인 핀포인팅(pinpointing)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저마다의 핀포인트를 탐색하고 자가 점검하는 모두의 핀포인팅으로서 말이다. 

 



강태검_Micro Region - Wave



II. 17인의 개별 핀포인팅

강태검은 대형의 조각적 설치 작품, 〈Micro Region – Wave〉에서 낮은 높이의 미니멀 구조물 안에, 양자역학에서 기인하는 복잡다기한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연결망으로 배치하여 마치 한국화의 심원법과 같은 조망 체계를 통해서 미시적 세계를 내려다보게 장치했다. 우주적 시선에서 미물과 같은 현실의 삶을 다시 성찰하게 만든 작품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조각 작품 위를 횡단하는 줄을 설치해서 관객이 슬랙라인이라는 스포츠를 경험하게 만든 일련의 장치는 가히 낯선 만남을 촉발하게 만든 탈맥락의 인터랙티브 아트라 할 것이다. 한편, 현대인이 경쟁하는 장으로서의 도시 빌딩의 이미지와 더불어 그 속에서의 인간의 과열된 경쟁적 삶에 대한 비판적 메스를 던진 작품 〈Meteor - Building〉은 현실의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한다.

고서연은 검거나 하얀 추상적 화면을 통해서 존재와 부재 사이의 간극에 대해 성찰한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존재와 부재는 양극의 대립이기보다는 늘 ‘더 있음과 덜 있음’ 사이를 오가는 양태가 아니던가? 혈연이 남긴 유산으로부터 잉태되는 기억과 망각, 그 속에서 추억을 안고 사는 ‘세상에 남은 자’에게는 웅얼거리는 독해 불가능한 언어들이 마치 이미지처럼 떠오르는 법! 간혹 텍스트의 개입을 시도하는 그녀의 작업은 이러한 차원에서 감성으로 쓰고 읽는 한 편의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라고 할 만하다. 

권연진은 민달팽이의 형상에 자신을 투사한 ‘육화(肉化)된 자소상’을 선보인다. 등껍질이 없는 까닭에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극히 취약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느리기 짝이 없는 민달팽이!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어딘가를 향하여 꾸준한 걸음을 지속하는 민달팽이에게서 작가는 성실의 의미를 보았으리라. 골똘하게 무엇을 생각하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는 정적인 행보 속에서도 그녀의 민달팽이는 목표를 향해 느리지만 꾸준한 걸음을 내디딘다. 단순하고도 무겁지 않은 권연진의 조형 언어는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드는 성실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기에 제격이다. 

김민지의 〈PICK ME〉 연작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하면서 아끼던 강아지 인형을 소재로 삼았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인형 뽑기용 집게라 불리는 기계 장치가, 여기저기 찢어져 솜이 튀어나오거나 꿰맨 자국이 있는 남루하기 짝이 없는 한 인형의 귀를 잡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장면을 표현한 그녀의 조각은 오늘날 반려견을 이윤 창출의 목적으로 분양하는 관습에 이의제기할 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사랑을 나누다가 바캉스와 같은 구차한 이유로 거리에 버려 유기견으로 만드는 관습 아닌 관습에 ‘뼈 있는 농담’으로 응수한다.



김민지_TA-DAI


김서연은 납작한 페브릭으로 감싼 포장용 와이어를 서로 연결해서 마치 그물과 같은 투과체의 하얀 구조물을 만들었다. 중첩, 반복하는 와이어가 만드는 무수한 매듭과 그것의 증식은 만남의 관계에 위치한 오늘날 사회적 인간을 은유한다. 투과체의 조각이 만든 수많은 구멍은 인간 삶에서 맞닥뜨리는 ‘상실’을 은유함과 동시에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무한한 생명력을 품은 ‘생성’을 은유하기도 한다. 색색의 섬유 덩어리들이 서로를 안고 있는 또 다른 작업이나 유기적인 형태의 반추상화된 인체 조각상 작업 역시 이러한 인간 삶에서의 무수한 만남의 관계학을 선보이기에 족하다. 

김소형은 <할머니-기억-무말랭이>라는 제명의 설치 작업을 통해서 타계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혈연의 필연적인 관계 맺음이 낳은 후회, 연민과 같은 감정적 상황과 더불어 그것이 영향을 미친 작가의 현재 정체성과 같은 일련의 결과에 대해 성찰한다. 노인의 젖가슴을 형상화한 젤라틴 조각과 나사못, 볼트의 관계 맺음, 그리고 그것을 핏줄처럼 매달고 있는 기다란 와이어는 기억 흔적으로 가득한 가족적 계보뿐만 아니라 친밀과 소원 그리고 상처와 무관심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낯선 듯 익숙한 모습으로서 말이다.  



김소형_할머니_기억_무말랭이


김수민은 산업적 생산품인 ‘발견된 오브제’인 철 프레임 안에 비닐을 채우고 그것이 철 프레임 안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극적 이미지를 통해 대비되는 물성을 탐구한다. 견고한 철과 유연한 비닐이라는 재료의 극단적 대비와 현대 사회의 은유를 통해 그녀는 질료에 투사되는 관객의 심리적 반응을 견인한다. 마치 포스트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연질의 재료가 반복 중첩되는 이미지를 통해 유연하지만, 투박한 질료에 담긴 심리적 기제를 탐구했듯이, 그녀의 작품은 피부 안에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점성의 물질이 외부로 쏟아져 나오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긴장감, 동요와 같은 관객의 심리적 반응에 지속해서 개입한다. 

김승찬은 자신이 만든 작업을 부숴 해체한 후 남겨진 파편들과 자신이 먹다 버린 전복 껍데기와 같은 부산물 그리고 누군가 버린 도자기 호리병과 같은 발견된 오브제를 가져와 재조합한 혼성의 인체 군상을 선보인다. 데페이즈망(dépaysement)으로 실현된 이 혼성의 파편들을 이어 붙인 매개체로서의 스컬피는 마치 ‘혹’처럼 상처 입은 흔적으로 보이고, 파편들의 혼성체를 지탱하게 만든 삼발이는 위태로운 지지대일 따름이지만, 그 폐허의 풍경 속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다. 



김승찬_파편에 달라붙은 덩어리


손희수는 2cm 정도의 작은 크기의 클레이 조각을 손가락으로 빚어 만들고 그것을 3D 스캔을 하는 방식을 통해서 데이터로 전환한 후 그것을 다시 커다란 조각으로 확대하는 방식의 작업을 선보인다. 거칠고 덜 마무리된 작은 조각에 남겨진 지문의 흔적까지 커다란 크기로 확대된 또 다른 조각은, 만들기라는 순연한 창작 의지가 조형 작품으로 변주한 무엇이다. 또한 큰 조각의 기초 자료가 된 미니어처는 약봉지에 담겨 관객에게 선물의 방식으로 공유됨으로써 공유된 과거 기억을 통해서 작가-작품-관객이 소통하는 일련의 연계 고리를 만든다. 



손희수_클레이 연작


오은서는 ‘제2의 얼굴’이라 불리는 손의 형상을 연극적 장치로 변주하여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표현한다. 모내기와 같은 노동을 시도하거나, 무리를 이뤄 함께 즐겁게 연주하거나 상대와 경쟁하듯이 권투를 치를 때 ‘손 혹은 손들’은 각 상황에 맞는 연출을 통해서 저마다의 표정을 덧입는다. 그것은 때로는 흥겹고 때로는 아련한 것이기도 하다 일명 ‘핑거 휴먼(Finger Human)’이라는 캐릭터가 벌이는 인생 연극인 셈이다. 

원명재는 오늘날 문명으로 상징되는 도시의 빌딩과 사람으로 상징되는 꽃잎들이 어우러진 작품을 선보인다. 3D 프린팅으로 빚어진 거친 표면의 빌딩 형상과 매끈한 꽃잎이 상호 대비되는 둘의 만남은 도시인의 욕망과 좌절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나들게 만든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장밋빛 희망으로 대치하는 일은 ‘지금, 여기’라는 삶의 현장이 고단한 까닭에 더욱 강렬해진다고 한다. 그러하듯이, 비루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꿈꾸는 미래는 현실화의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도시민의 열망을 강렬하게 부추긴다. 

유경민은 일련의 ‘가방’ 연작을 통해서 인간 욕망의 문제를 탐구한다. 작품 〈What’s in your bag〉에서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틀어쥐고 있는 한 인물 형상은 마치 욕망과 집착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기에 가방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일까? 이동하는 중에 필요하거나 이동 후 필요한 것들 혹은 이동 자체의 목적이 되는 것일 수도 있는 ‘가방 안의 무엇’을 위해 인간은 매일 욕망의 크기를 키워나간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방은 유경민의 작업에서 우리가 짊어질 ‘삶의 무게’ 혹은 그것을 해소할 ‘욕망’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이채원은 세라믹 재료로 만든 유쾌하고 해학적인 〈새벽에 마주친 것들〉 연작을 통해서 안경을 벗은 상황이나 어둠이 자리한 상황에서 낯설게 다가오는 사물에 감정 이입했던 자신의 체험을 작품화한다. 도로 위에 튀어나와 있는 소화전이나 새벽녘 불을 밝힌 가로등에서 알 수 없는 생명체를 연상하거나 쓰레기 봉지 더미에서 생명체의 군집을 상상하는 일은 관성에 익숙한 시선을 거두고 무딘 감각 자체에 집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렇다! 그녀의 작업에서 사물을 의인화하고 그것에 생명력을 덧입히는 것은, 가히 ‘무딘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이라고 할 만하다.

장지원은 어린 시절 체험했던 원초적 불안에 대한 ‘지금, 여기’의 자문자답을 작업의 표면과 심층에 한꺼번에 펼쳐 놓는다. 유년기에 벌칙처럼 강요받았던 경험을 시각화한 작품, <코끼리 숫자 세기>는 먹과 호분으로 코끼리들을 그린 삼베천의 일부분을 인두로 태워 만든 것이다. 원초적 불안의 해체적 제의라고 할 수 있을까? 한편, 머리와 몸통이 없는 존재로 만든 <코끼리_하반신>은 머리와 몸통이 없는 코끼리의 하반신만 파편적으로 선보임으로써 이러한 심리학적 차원의 원초적 불안을 조형적으로 가시화한다. 

주현동은 견고한 재료로 만든 팽창감이 가득한 〈풍선〉 연작을 통해서 부풀어 오르는 충만감과 터질지 모를 불안함을 동시에 견인하는 욕망의 문제를 탐구한다. 특히 압력에 눌린 채 변형된 풍선 형상을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극대화한다. 다양한 표정을 지닌 〈손〉 연작에 부가한 이모티콘 역시 일차적으로 제기된 감정을 극대화하는 데 있어서 제격이다. 고양된 감정을 부가적으로 강화하는 이러한 조형 전략은 좀 더 직관적이고 솔직한 의도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지만, 시각 예술의 다원화된 의미망을 폭넓게 열어두는 장치도 필요해 보인다. 

천예슬은 상상으로 구현한 기이한 형상의 주인공들을 자신의 작업 안에 등장시킨다. 작품, 〈Bubble bath drawing>에서, 머리, 팔다리, 몸통이 서로 떨어진 채 버둥거리는 인물상이나 대형 작품 <Treasure hunt>에서, 얼굴과 몸이 커다란 뇌로 뒤덮인 채,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로 바다 피크닉을 나선 ‘AI와 인간’의 DNA가 뒤섞인 상상의 포스트 휴먼은 대표적이다. 성별과 인종을 가늠하기 어려운 그녀의 주인공은 엉뚱하게도 휴양지에서 보물찾기에 나서면서 우리에게 상상과 환영의 풍경을 열어젖힌다. 한편, 침대 시트 밖으로 발만 내놓은 미확인 인물은 우리에게 제법 무거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상기하게 만든다. 

한진영은 작품 〈미심〉을 통해서 자기 가족이 거주했던 고향 집의 창호지 문을 발견된 오브제로 삼아 알루미늄 프로파일로 틀을 만들어 병합함으로써 도시의 공간 안으로 초현실주의의 조형 언어인 데페이즈망을 실천한다. 만들어진 오브제로 치환된 창호지 문은 프레임과 한 덩어리로 작품으로 변환되어 관객의 참여에 따라 열고 닫힘을 반복하면서 어린 시절의 시골 주택에 관한 공동의 추억을 소환하고 공유한다. 그것은 작가에게 고향의 사랑방에 대한 추억을 통해서 견인하는 행복한 미래를 향한 희망마저 함유한다. 




고서연_등 뒤의 기억



III. 에필로그 

17인의 핀포인트는 이제 저마다의 위치를 찾아가는 지점이 된다. 예술 속에서 정밀한 지점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질문과 실험으로 자신의 작업을 찾아 나가는 일이 예술 창작이라는 점에서, 수련기에 있는 이들 17인의 현재 작업은 향후 한국 미술계에 중진, 원로가 되기까지 부단히 확장을 도모하는 기초적 토양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겠다. 자신의 핀포인트를 잘 파악하고 ‘모두의 핀포인팅’으로 달려 나가는 17인의 예술적 건승을 바란다. (202311) ●


출전/
김성호,  「17인의 핀포인트, 모두의 핀포인팅」, 『핀포인트전』, 전시 카탈로그, 2023. 11
(핀포인트전, 2023, 성신여대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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