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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김 : 침묵의 색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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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색깔들

MULTIPLET OF SILENCE

스톤 김 개인전


▣전시명: 스톤 김 개인전 <Multiplet of Silence>

▣전시기간: 2012년12월7일(금) ~ 2013년 1월13일(일)

▣장소:OPSISART 

▣관람시간: 11:00-18:00월요일휴관

▣오프닝: 2012년 12월 7일(금) 6-8pm

▣전시장르: 사진

▣문의: 02.735.1139, info@opsisart.co.kr


침묵의 색깔들

신지웅 | 아트 어드바이저


사진 같지 않은 사진

누구나 스톤 김이 나무를 찍은 사진을 처음 볼 때 한결같이 “이 게 정말 사진이냐?”고 묻는다. 나도 처음 봤을 때 놀라서 마찬가지로 그렇게 물었다. 사진에 찍힌 나무들이 수채화나 동양화처럼 보였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결이 있는 종이 위에 프린트 되어 도무지 사진처럼 보이지 않았다. 종이에 안료가 스며들어 채도가 낮은 칼라가 연기가 피어 오르듯이 드러나고 있었고, 보고 있는 내 눈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는 더욱 진한 색채로, 뒤에 있는 나무는 흐린 색으로 인화되어 원근에 대한 감각이 동양화처럼 색의 농담으로 표현되고, 나무의 배경을 이루는 배경마저 여백처럼 비어있어 도대체 사진 같지 않게 보였다. 


나무는 한 밤에 플래시 불빛으로 찍혔다. 그 자체를 프린트 하면 사진의 속성대로 나무는 희게, 배경은 검게 나온다. 그것을 컴퓨터로 네거티브로만 전환하여 프린트를 한 것이다. 일체의 색 보정이나 여타 조작은 없이 카메라의 메커니즘에 의존했는데, 그 결과 인화지에는 하얀 배경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색체를 은은하게 뿜어내는 나무가 한 폭의 동양화 속에서처럼 빼어나게 서 있다. 플래시 빛이 미치는 거리가 사진 공간 속에 입체감을 부여하여 찍힌 나무 뒤가 평면적으로 구성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회화적인 입체감을 구축하여 마치 손으로 그린 것 같은 촉(텍스처)을 느끼게 해 준다. 가냘픈 줄기 끝에 매달린 여린 잎들은 스스로 자기 색을 뿜어 내듯이 촉촉하고, 두꺼운 나무 둥치의 결은 거북이 등 짝처럼 깊은 골을 아련하게 드러낸다. 사진인가 싶어 찬찬히 한참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사진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어떤 느낌이 점차 두드러져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절하게 사진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새겨지는 빛의 흔적

사진은 본래 빛의 흔적이다. 어둠 속에 새겨 지는 것이다. 광입자(photon)가 그려지는 것(graph)이다.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 매체와는 달리 사람이 주도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매우 제한적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현실에서 재현하고 싶거나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장비를 사용하여 치환하여 보여주는 방법이나 기술이 개발되면서 사진이 가능해 졌기 때문에, 사진은 근본적으로 이미지를 치환시킬 수 있는 장비에 구속적일 수 밖에 없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장비들이 갖는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은 관찰자처럼 사진과 관계를 맺게 된다. 엄격하게 기계적이며 외양을 기록하는 현상이며,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생산된 이미지, 유사적 이미지야말로 사진의 사실적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보여진 것을 기록하면서, 본질적으로 항상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사진은 연속으로부터 얻은 한 순간을 고립시키고 보존하고 빼낸다. 즉, 시간을 얼어붙게 만들어서 실재성을 그것의 모상으로 변화시켜 실재성을 지각기술로 지배하게 한다. 그 결과 그 모상의 이미지에 상응하는 사물이 부재한다는 것을 드러내어 준다. 다만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사진이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세계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그러한 리얼리티를 계속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진 이미지에 상응하는 사물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부여한다. 사진은 그 사물이 실재로 있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기보다는 그 사물과 이미지 사이의 간격을 부득불 확인시키고 강화한다. 모든 사진은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 그리고 현재와 과거 사이의 혹독한 긴장을 유발시킨다.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그 구체란 지극히 추상적 결과인 것이다. 찍힌 사진 속에 있는 대상은 찍히기 전에 있던 카메라 렌즈와 피사체 사이에 있던 거리감이 제거되어 공간 자체가 이미 추상화 되어 있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찍으려고 했던 그 피사체의 이미지가 다시 카메라를 통하여 이미지화 되어 이미지의 이미지가 되면서 원 이미지가 또 추상화 되어 버려, 뭔가 현실에 존재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지던 것이 표상으로 붕 떠버려 신기루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은 눈에 보이는 바로 그것을 포착하여 보존할 수 있게 해주지만, 포착된 그것은 곧바로 그곳에 없다는 것을, 그 부재를 증거해버리는 기묘한 역설을 태연스럽게 배태하고 있다. 매체 자체가 아이러니로 꽉 차 있는 매우 요망한 매체인 것이다.


스톤 김의 “우연한 섬광”

어떤 사물이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것과 똑같이 그려질 때, 우리의 손과 의식을 통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대상과 관련된 의미가 불가피하게 형성될 수 밖에 없게 되어 사물과 내포적인 관계를 이루게 된다. 사진은 반대로 그 자체적으로 외부적이며, 한 편의 외연적 연속체다. 사진은 물체가 감광 자료에 남긴 물리적 흔적의 결과, 물체에 대한 지표적 구실을 하는 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진가가 선택할 수 있는 결정은 그가 찍을 사물을 연속적 과정에서 고립을 시키기 위한 선택의 순간에 관한 것뿐이다. 결정과 초점만이 있을 뿐인 이 명백한 제한이야 말로 앞에서 말한 “처절하게 사진적”이란 것의 내용이다. 


스톤 김은 나무를 찍기로 결정했다. 그 나무들 중에서도 도시 안에 있는 나무, 인간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는 나무를 찍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낮과 밤, 또는 빛이 꽉 찬 자연과 빛이 없는 자연 중에 밤, 그것도 불빛이 적은 밤에 찍기로 정했다. 타자에 의해 관리되고 훼손되어 있는 나무에 스스로가 이입이 되어 나무를 작업의 대상을 택했고, 낮 보다 밤이 편한 자신의 생활 습관에 순응해서 시간을 정했다.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성격대로 카메라와 플래시 그리고 삼각대만 가지고 홀로 사진을 찍었다. 인간의 용도와 기분에 따라 굴절되고 훼손되고 변형되어도 나무는 묵묵하게 나무로서 당당하게 버티고 살아가고야 마는 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기 바깥 세계와 분리된 자신만의 내면을 강고하게 구축하여, 밤의 어둠이 주는 공간적 충만감 속에서 셔터를 눌렸다. 꽉 찬 어둠 속에서 자족적으로 서 있는 나무에 초점을 맞추고 숨마저 죽인 그 적요의 순간 속에서, 사진의 그 “우연한 섬광”을 스톤 김은 자신의 세계를 사진 속에서 만들어 나갔다. 완벽한 침묵의 세계다.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침묵은 본래 시각적이다. 청각적인 메타포다. 네이버 사전은 침묵을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음, 또는 그런 상태”라고 정의한다. 사이먼과 가평클이 불렀던 불후의 명곡, “침묵의 소리(Sound of The Silence)”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과 “귀 기울이지 않고 듣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들려준다. 존 케이지는 그의 전설적인 작품, “4분33초”에서 아예 침묵의 소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침묵의 지평을 향해서 한없이 후퇴해 가는 다양한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들려주고 보여 주었다. 케이지가 이러한 침묵이라는 은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했던 의도는 “침묵이라는 것은 없고, 어떠한 일이 항상 일어나고 소리를 내고 있다”는 암시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충만한 것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떠오르게 하는 공허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침묵은 반드시 그 대립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소리 혹은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인식하지 않으면 침묵이라는 것은 불가능 하다. “모든 침묵은 소리에 의해 관통된 시간의 확장으로써 그 아이덴티티를 가진다”고 수잔 손탁이 갈파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진정한 공허, 순수한 침묵은 가능하지가 않다. 침묵은 이야기의 한 형식, 불만족이나 고발의 형식, 대화의 한 요소일 뿐이다.


이러한 침묵이 시각적 메타포를 이룬다면 그 색은 어두움(darkness)일 것이고 검정, 혹은 먹의 색일 것이다. 검정색이란 모든 색이 섞인 색일 것이고, 수묵화에서 먹색은 완전한 색이다. 전자가 현실적이며 직접적이고 종합적인 색이라면, 후자는 이상적이며 간접적이고 가능성으로서의 색이다. 전자는 색의 원리를 빛에서 의존하고, 후자는 어둠에서 구현한다. 낮에 찍힌 일반적인 나무들의 색과 밤에 스톤 김에게 찍힌 나무들의 색을 비교해보면 같은 나무의 색이라도 색의 질감이나 채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물론 자연광과 플래시 빛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사진의 근본적인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시각적 무의식으로서 사진

흔히 사진은 빛으로 새긴 이미지라고 한다. 빛이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통제된 어두운 공간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구멍 밖에 있는 물체의 이미지가 비쳐서 맺힌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서 사진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사진의 사용은 통제된 어두운 공간을 카메라라는 조그마한 블랙박스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소리와 침묵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빛과 어둠은 그 역의 관계로 이해될 수가 있다. 사진에서 모든 어둠은 빛에 의해 관통된 공간의 축소로써 그 아이덴티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진을 통한 우리들의 감각의 확장은 카메라에 의거한 공간의 축소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셈이다. 사진기 안에 맺힌 사물의 상이 뒤집혀 있고, 필름에 박힌 이미지가 네거티브로 나타나는 역의 감각 속에서 사진적 사건(photographic event)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단 밀폐된 작은 박스에서 허용된 틈을 통해 빛을 타고 들어온 광입자(photon)가 특수하게 화학 처리된 필름이나 디지털 메모리에 충돌하면서 남긴 흔적은 하나의 사건이자 사고다. 빛 자체가 그려 질 수가 없고 묘사될 수도 없는 만큼 사진은 블랙박스 속에서 나온 엄격한 하나의 결과일 수 밖에 없다. 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알려줄 뿐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이는 내가 자신의 지각 과정에 들어가서 스스로가 의식하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흡사하다. 나에게 의식되는 것은 지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보고있는 이미지는 무의식에서 형성된 것이고 무의식적 과정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종 다양한 전제는 이미 형성된 이미지 속에 짜 넣어져 있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을 시각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ness)의 산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연관하여서다. 테크놀로지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물을 인지하는 구성하는 생체적 메커니즘의 소외형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깨어나서 꾸는 꿈

특정한 나무를 낮에 찍으면 빛이 반사되는 나무는 희게 나오고 배경이 되는 공간은 검게 네거티브로 필름에 나온다. 칼라일 경우는 보색으로 나온다. 그것을 다시 인화지에 네거티브로 전환하는 것이 현상이다. 그래서 찍힌 나무는 우리가 보는 대로 다시 포지티브로 흑백은 흑과 백으로 칼라는 보색의 보색, 원색이 나온다. 자연의 빛에 노출된 나무를 그대로 카메라로 받아들여서 처리했다. 반면에 스톤 김은 빛이 없는 밤에 플래시를 사용하여 빛을 카메라에서 바깥으로 쏘아서 반사된 빛으로 사진을 찍었다. 빛이 처리되는 프로세스를 하나 더 추가함에 따라 필름에는 나무는 검게 배경 공간은 희게 나와서, 네거티브가 포지티브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을 그대로 인화하면 네거티브한 이미지로 현상된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로 음양의 차원을 뒤집어주면 포지티브한 결과가 얻어진다. 결국은 네커티브의 네거티브의 네거티브라는 삼중 네거티브로 포지티브한 결과가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음양이 전환되는 과정 속에서 사진이 가졌던 외연적 성격이 재 외연화되면서 두 번째 네거티브가 내용으로 변하면서 그 색채도 외부적 형태를 보여주는 지표에서 내면적 속성을 은유하는 상징으로 전환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양화처럼 먹과 채색이 종이에 빨린 것 같은 느낌이 사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톤 김의 사진에서 나무를 보고 있으면 점차 나무의 형태가 주는 느낌은 희미해 지고 색만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나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형태가 색채로 드러나면서 나무 자체가 살아있는 정령같이 빛을 발하고, 나무 주변은 축제를 맞이하는 밤의 정원처럼 변해 버린다. 영화 홍보 카피 글처럼 스톤 김의 밤은 나의 낮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작가소개 : 스톤 김(Stone Kim/ a/k/a 김정현)


스톤 김은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으로 졸업을 했다. 놀기 반, 오토바이 폭주 반 나누어 생활 하다가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로 산업 디자이너로 잠시 일했다. 2002년 말, 어학을 핑계로 미국 시카고로 갔다. 그 곳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디자인 스쿨 진학을 시도하였다가 수년을 허비하였다. 그러다 친구의 권유로 2006년 뉴욕으로 이사, 좀 엉뚱하게 국제 사진 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에서 사진을 수학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디자인에 뜻을 접고 사진에 올 인 하여 2010년 뉴욕 에스브이에이(SVA, School of Visual Arts)에서 사진과 비디오 전공으로 엠에프에이(MFA)를 받았다. 뉴욕에서 국제 사진 센터와 뉴욕 주립 대학 아밀리에 왈라스 갤러리 등 수 차례 그룹 전에 참여하다가 2011년에 귀국했다. 이번 옵시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통상 두 번째 개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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