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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추상에는 이유가 있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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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이미지가 주는 정서(情緖)와 몇 가지 단상(斷想)
- 조현선, 하태임 2인전 <모든 추상은 이유가 있다>

                                                                                                                                 김노암(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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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은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거울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도 했다.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그림 또한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매혹되는 지도 모른다. 추상은 그런 거울처럼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어떤 심리적 상태와 유사한 경험과 조건을 만든다. 그런데 사실 추상화라고 해서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의 전설이고 신화일 뿐이다. 추상은 추상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세상을 사는 사람을 재현하는 것이다. 만일 정말로 추상이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다면 그것인 인류의 문화와 정신에 어떤 공헌을 한다 하여도 그것을 인지하지도 또 전승할 수 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지와 전승에 필요한 언어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치 선승들의 화두나 지혜처럼 그것은 구전이나 확인할 수 없는 개인의 개별적인 초월적 경험에 머물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추상이 정말 상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무언가 구체적이며 설명적인 상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기에 상이 주는 일반적인 모방이나 재현의 장치에 의한 공토의 의미를 떠올릴 수도 또 공유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추상은 평균적 삶에서 사람들 간의 소통을 위해 공유해야하는 공통의 경험과 일상어처럼 동일한 상을 떠올릴 수 없다.

너무도 많은 추상화가 있고 또 현재도 제작되고 있다. 새삼 보링거의 말처럼 추상에 대한 인간의 충동은 어찌 할 수 없는 본능인 것인가. 추상충동에 대한 가설은 사실 전혀 논리적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사건이나 경험을 시각적 유사성에 의해 마치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과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이러저런 삶의 대소사에 대한 불안과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점집이나 주역에 기대는 것이 생각처럼 인간이란 존재에게는 모순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하기도 한다.

분명 현대미술은 곧 추상의 시작이었을 터이다. 그것이 어떤 논리적 근거나 그럴듯한 기원을 갖고 설명을 하려는 것과는 별개로 역사적 기록이고 사실이니 말이다. 분명 칸딘스키와 몬드리안과 잭슨 폴록과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와 모리스 루이스와 같은 화가들과 그들의 추상화들이 실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곰브리치 박사나 아르놀트 하우저 같은 미술사가가 흔히 내세우는 인류의 신석기시대의 그 다양한 추상적 도상들 말이다.  

 

2

그러므로 조현선과 하태임 두 작가의 추상이미지는 추상을 둘러싼 지난 시절의 다양한 관점과 인식 그리고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수용되며 흥망성쇠했던 추상미술 또는 추상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조현선의 추상은 추상보다는 꼴라주의 성격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반면 하태임의 추상은 마치 잘 정돈된 색띠나 색면의 감각적 구성이 특징적이다. 조현선의 작업은 손으로 뜯어낸 듯 불규칙적이라면 하태임의 작업은 매우 규칙적인 리듬감을 보여준다. 두 작가 모두 결국의 화가로서의 개인적 경험과 사유와 삶의 희노애락이 겹쳐져 있을 터이나 그것이 지금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이유를 몇 가지로 추리해서 설명해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이 그들이 창작자로서 자신의 작업의 전과정에 경험했을 사건과 의미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다. 추상이미지는 해독하거나 해석할 수 있다거나 불가능하다거나 그런 차원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 조건 속에서 우연히 또는 인간적 조건 속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대면하거나 회피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현상이나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이념이나 신념과 관련될 수 있다. 

선과 색과 면과 구성은 이미 추상이기에 일상어와 애초부터 대응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떠한 언어와도 유사성이나 근사치에 준해 조어가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본래 침묵과 조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닫혀있는 조형과 그 효과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이미지는 단순성과 복잡성에 모순적이게도 동시에 발을 걸치고 있다. 조현선의 대도시 뒷골목과 삶의 그늘에서 경험한 개인적 체험이나 하태임의 직업적 화가이자 가정주부로서의 생활의 체험. 미국과 프랑스에서 보낸 유학기간의 고독과 성숙의 시간들. ‘예술’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혀 보낸 시간 층층이 현시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 느끼고 존재하였던 현실들. 그리고 창작 에너지로 변화된 어떤 결핍과 결여. 그들의 추상이미지를 어떤 조형적 효과 예를 들어 색감이나 어떤 리듬감 등등으로 언어화하는 것은 평가절하나 소극적 해설일 수 있다.

삶이 팍팍하고 존재와 자유가 견딜 수 없이 작아지는 시기는 더더욱 어떤 미적 이념에 몰입하도록 종용한다. 한국 사회에서 더욱이 점점 고도로 계급이 분화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그리고 화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건널 수 없이 깊어지는 현실과 미적 이상의 간극 속에서 한 개인은 매 순간 좌절과 종국에서는 패배하는 길 위에서 창작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추상의 미학은 매 순간 미학적 질문과 윤리적 질문, 정치적 질문과 기술적 질문 사이에서 어떤 화해의 지점을 모색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로 귀결될 수 있다. 여전히 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재는 추상에 대해 미뤄두었던 질문과 답변을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오리무중의 모순과 결핍 속에서 그것을 관습적으로 의미의 애매모호성에 기대는 것도 우리를 지루하게 할 뿐이다. 분명 그들의 추상은 무언가를 암시하는데, 그런 머뭇거림 속에 두 작가의 쉼 없는 창작의 몰입과 응전은 무한히 확산하는 의미로서 ‘규칙 없는 규칙’ 또는 ‘감정 없는 감정’, ‘이미지 없는 이미지’ 등 불가능한 조어로 표현할 수 있는 ‘추상이미지’가 우리에게 던지는 몇 가지 본질적인 질문을 떠올린다.   

 

 

1. 전시작가: 조현선, 하태임

2. 전시명: 모든 추상에는 이유가 있다

3. 전시장소: 팔레 드 서울 2F

4. 전시기간: 2013.11.05(화)-11.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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