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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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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연 회화전

  • 전시분류

    개인

  • 전시기간

    2024-04-13 ~ 2024-05-31

  • 참여작가

    홍재연 Hong Jae Yeon

  • 전시 장소

    리각미술관

  • 유/무료

    유료

  • 문의처

    070-4111-3463

  • 홈페이지

    http://ligakmuseum.co.kr

  • 상세정보
  • 전시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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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뷰어


리각미술관 기획초대전
홍재연 展



■ 전시개요

전 시 명 홍재연展 
참여작가    홍재연 Hong Jae Yeon
일     정 2024.04.13(토) ~ 2024.05.31(금)
초대일시    2024.5.09(목)    
장     소 리각미술관
                 충남 천안시 동남구 태조산길 245
                 T.070-4111-3463
                 ligakmuseum.co.kr
                 @ligak_museum
관람시간    11:00am - 18:00pm
관 람 료     성인 3,000원 / 초·중·고등학생 2,000원





■ 초대글

홍재연 초대전을 열며..

이번 홍재연 선생님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치열함’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매체실험들을 통해 치열한 작품세계를 펼쳐 오셨지만, 하나로 관통하는 작업의 요체는 치열함을 놓아 버리는, 동양 사상의 정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쟁을 통해 쟁취해 내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작가의 회의와 성찰은, ‘삶은 전쟁이다’라는 문구가 함의하듯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에게 내면화된 비극적인 은유에 대한 너그러운 다독거림이기도 합니다.

‘면벽수행’과도 같이 치열한 참선의 정진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그 치열함을 내려놓았을 때 관조할 수 있는, 무엇에도 구속됨 없는 자유이자 해탈의 경지일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회화, 판화, 거기에 바느질의 방식을 도입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재료적 선택을 포함한 다양한 조형 방식은 서양의 회화적 어법에 기초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동양의 정신세계를 폭넓게 수용하며 균질한 사상적 원리에 의거한 작업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움을 통해 만들어진 쓸모가 다시 채움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파한 불가의 일깨움이 화면 위에서 삼투(滲透)하고 있고, 인위적인 개입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무위자연’이라는 노장사상의 통찰을 슬그머니 포개놓기도 합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장치를 활용해서 조형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치열한 수행과도 같은 작업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역설적이게도 치열함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들을 마주하며 치열한 각축(角逐)의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쫓기듯 살아내야 하는 우리 동시대인의 일상을 떠올려 봅니다. 거기에 값싼 위무의 방법론이나, 절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미봉책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생래적으로 예술이 기능하는 영역은 아니겠지요. 대신 치열한 사유라는 ‘철학적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한 걸음을 더 내딛기 위한 용기를 지니도록 고무하고 있습니다. 그 한 걸음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자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2024. 4.
리각미술관장 이상원
  




유-9.Work-970외, 182x260cm, Acrylic on Canvas, 2001


유-11.Work-1474, 182x290cm, Acrykic on Canvas, 2007


유-17.Work-2054외, 184x217cm, Acrylic on Canvas, 2018


유-18.Work-2061외, 182x217cm, Acrylic on Canvas, 2020


유-23.Work-2180외, 182x175cm, Acrylic on Canvas, 2024





■ 평론

정신은 회화와 판화를 바느질 한다

미술과비평 Vol.64 
김병수 미술평론가 (現 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진리 이후 추구와 모색이라는 낱말이 미술에서 아직 유효할까? 개념은 허상만을 제공하는가? 그래서 언어는 실감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고 말았을까. 구체적인 실체가 작품으로 제시되어도 그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접어들었다. 이른바 ‘진리 이후’(post-truth)인 것이다. 과학적인 증명조차 무시된다. 이때 여전히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작가 홍재연은 삶과 예술을 분리하기도 하고 삶에 대한 태도를 통해 예술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가 꾸준히 작업을 펼친 세계는 추상적이다. 그의 회화와 판화는 서로 절충적이기까지 하다. 색면에 대한 관심과 속도를 보여주는 타블로는 삶과 예술의 상보성과 유사하다. 회화의 질감과 판화의 동세는 따로 개성을 펼쳐내지만 작업이 추구하거나 혹은 그렇게 형성되는 이미지의 영역을 풍성하게 한다. 거기에 이제 바느질이라는 다소 엉뚱한 방식까지 구사된다. 추상적인 방식은 유지된다. 그리고 화면은 더욱 단순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회화? 근대적인 미술 교육 속에서 홍재연은 추상 회화를 선택한다. 그 의미를 근대성에 대한 추구와 함께 전통성을 함께 논의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갈등과 화해의 현장이 그의 작업 현장, 즉 화면이기도 하다. 지금 근대성의 담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가 주로 교육 받던 시기는 서양이 그 규준으로 작동하였다. 따라서 서양미술사는 예술의 롤 모델이었다. 그에게 당대적인 동시에 미감적인 것이 추상미술이었는데 여기에 토착적인 것이 작동한다. 이른바 서법(서예)적인 것이다. 동아시아 미학에서 정신적인 것은 시적인 것이 바탕을 이룬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은유적인 환기나 암시를 통하여 마음에 다가서기도 한다. 그래서 글씨는 마음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넘쳐나는 새로운 매체들 속에서 마음의 정체가 분명해지기보다는 좀 더 애매모호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회화적인 것이 이러한 사태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의 회화는 서양미술의 역사에 근거하는 스스로의 동시대성을 동아시아 미학의 전통성과 접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사 이른바 컨템퍼러리 아트의 범람에 대하여 여전히 예술성을 시각성과 정신성의 구도 혹은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까. 예술 이후의 예술에 대한 논변이 갤러리와 미술관에 넘쳐난다. 전시기획자는 그 첨병이다. 작업이 작품과 연관을 갖기보다는 전시와 프로젝트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리서치는 탐구와 모색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제작 방식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홍재연의 예술은 근대성을 고전적이고 전통적으로 수행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엘리트주의적인 면모를 감수한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사진 같은 중간예술의 용이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 디지털적인 감각을 찾아볼 수도 없다.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탐색에 열중한다.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은 그의 수도사적인 기질과 불가분적인 관계를 지닌다. 확정된 진리보다는 수행 속에서 형성되는 이미지들이 그의 회화와 판화 그리고 ‘바느질 화’에서 드러난다.
 
미메시스 유기적인 자연을 형상화하거나 혹은 자연에 대한 이해를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그것들을 단순화하는 것이 홍재연의 화면이다. 미메시스이고 아날로그이다. 모방이나 재현과는 다른 방식인 추상으로 그 과정을 형성한다. 상당히 직관적이다. 개념적이라면 좀 다르게 성취될 소재들을 관계항으로 성립시킨다. 별개의 것들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방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에게는 모두가 의미 있는 것이다. 작은 점이나 선 하나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들이 화면에서 얼마나 효과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미 생활과 작품을 이어주는 원리로서 미메시스가 작동한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에게 회화적인 구상과 추상의 구분은 이미 초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존재론적 미학을 간직한다는 의미에서 상당히 형이상학적이다. 

담백 긋기와 칠하기로 이룩되는 세계에 바느질하기가 새로이 등장했다. 앙리 마티스의 ‘오리기 ’를 떠올리는 것은 작가 홍재연에게 실례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마티스가 형상의 극단적인 대비, 즉 존재와 무를 통한 한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새로운 상징적 행위로 상상해보자! 그러면 역설적이게도 다른 두 세계를, 아니 더 많은 것들을 봉합(縫合)하는 예술/기술이 보이는데 이것은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태도와 유기적인 세계관을 드러낸다. 여기에 전통적인 예술관에서 공예적인 것이거나 여성적인 것이라고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온 방식인 바느질을 동등하게 다룬다는 의미는 지속적으로 그의 작업을 눈여겨봐야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탐구가 탈역사적이라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는데 작가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이해에서 그러한 오해를 받을만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부드럽게 대응하는 방법(론)이 바느질처럼 보인다. 약간은 우주론처럼 보이는 화면을 이전보다 덜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선사할 때 미학적 담백함을 느낀다. 
 
연민 예술지상주의도 아니고 예술의 현실 반영론도 아니라면 예술작품으로서 삶에 대한 관심이 홍재연을 사로잡은 것일까? 어쩌면 삶을 예술과 분리하는, 다르게 말하면 추상하는 방식은 이러한 해석을 타당하게 한다. 그럼에도 작업 방식을 삶의 노동으로 여기는 태도는 다시 삶을 작품으로 통합한다. 그의 회화미학은 잘잘못을 따지는 경찰력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공권력의 태도라기보다는 텔로스에 대한 성찰처럼 보인다. 궁극의 목적에 대한 분위기가 화면에 존재한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연민과 함께! 





판-9.Work-414, 112x77cm, Litho.ed.11, 1992


판-10.Work-436, 112x77cm, Litho.ed.11, 1992


판-16.Work-818, 112x77, Litho.ed.12, 1998


판-18.work-1017, 112x77cm, Litho.ed.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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