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앤리 […] 나는 가상의 캐릭터야 영혼이 아닌 그저 껍데기”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와 필립 파레노의 공동 프로젝트이다. 이들은 1999년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로부터 배경 역할의 단역 캐릭터를 저렴하게 구입한 후, 이 가상의 존재에게 ‘앤리(Annlee)’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3년 동안 위그와 파레노를 비롯해 2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하여 회화, 조각, 영상, 포스터, 책, 음악 등 다양한 형식으로 앤리에 관한 30여 개 작품을 탄생시켰다. 2002년 이 작품들은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전시되었다. 각각이 개별적인 작품이면서, 동일한 캐릭터를 여러 명의 작가가 제작한 하나의 다중 저자 프로젝트이다. 이 제목은 사이보그의 신체라는 껍질 속에 인간과 같은 지각 의식이 있는지 질문을 던진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에서 빌려 온 것이다.
이후 위그와 파레노는 앤리의 이름으로 협회를 세워 이 가상의 주인공 앤리에게 저작권을 이양하였으며, 2002년 12월에는 앤리를 재현의 세계에서 해방시켜 주기로 결정, 아트 바젤이 열린 마이애미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연출하고 그 속으로 앤리가 사라졌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앤리는 해방과 함께 죽음을 맞았지만,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 있는 반아베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미술관이 전체 프로젝트를 인수한 것은 예술의 개념, 매체, 형태, 권리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게 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24년, 이 역사적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는 당시보다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반아베미술관과 협력하여 구성한 이번 전시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 환경이 예술의 생산 방식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데이터로 존재하는 디지털 이미지가 감정, 인격, 정체성을 지닌 주체로서 스스로 진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포스트 디지털 시대에 대해 흥미롭고도 비판적인 관점들을 제시해 줄 것이다.
* 리차드 필립스, 〈앤리〉, 2002, 캔버스에 유채, 198.6×249.6×3.9cm.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반아베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