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아트기획전 《스틸 플로우》
기획의 글
김한아,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포항시립미술관은 현대 조각의 주요 재료인 금속 매체에 주목한다. 조각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재료에 따라 조각을 구성하는 형태, 질감, 색채, 공간과 같은 요소가 형성된다. 금속 조각은 가공 기술 그리고 산업의 성장과 함께 진화를 거듭해 왔다. 조각가들은 매체 탐구를 통해 형식과 내용의 관계 형성에 몰두했고 금속 조각의 다양한 변주는 조각의 경계를 넓히고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스틸 플로우》는 금속 매체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운동성의 이미지인 ‘리듬’으로 바라본다. 조각을 구성하는 요소의 배열과 반복 그리고 선·형·색이 이루는 율동감과 변화, 조각과 공간 사이에서 생겨나는 유기적 움직임 등에 집중한다. 전시는 오늘날 작가들이 금속 매체를 취하는 차별화된 제작 방식과 표현적 특성을 통해 유연성을 획득한 금속 조각의 면면을 확인하고자 한다. 전시 제목인 ‘스틸 플로우’는 참여 작가들의 태도와 작품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감지한 단어의 조합으로 재료의 변형과 흐름, 심리적 몰입 상태를 중의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번 전시와 함께하는 김병호, 신한철, 윤정희, 전용환, 정정주 작가는 현대 조각의 다양한 리듬을 개개인의 조형 언어로 펼쳐 보인다. 이들은 매체가 가진 특성을 작품의 형식으로 드러내며 조각의 한계와 경계를 뛰어넘으려 시도한다. 부피를 형성하던 덩어리가 사라지고 평면화되어 벽에 걸리거나, 물성을 강조한 무겁고 딱딱한 형태에서 벗어나 가볍고 부드러운 조각으로 치환한다. 나아가 공간을 대상으로 최소한의 구조를 추구하며 열린 형태로 공간을 점유하고 확장 시킨다. 참여 작가들이 형성하는 다양한 리듬은 전시를 통해 하나로 모여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고, 이 흐름은 작가의 의지 표현이자 예술 실천으로써 조각을 대하는 예술가들의 자각적 선언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작가소개
전용환 1963- Jeon Younghwan
전용환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 그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30여 년 동안 ‘트랜스포밍 사이클(Transforming Cycle)’을 주제로 변형, 순환의 구조를 표현해 왔다. 과학 잡지에서 본 단백질 구조를 조형화하며, 알루미늄 재료의 가볍고 부드러운 특성을 이용하여 선의 리듬과 에너지의 발산을 화려한 색상으로 선보인다.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의 결합은 공기와 계절의 순환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벽에 걸린 조각은 자유롭게 춤추듯 파동을 그리며 뻗어나간다. 뒤엉킨 선들은 화살표를 따라 공간을 향해 나아가며 서로 연결된다. 마치 공간에 드로잉을 한 듯 얽힌 선은 면을 만들고 출렁이는 선과 선 그리고 벽면 사이의 공간에 만들어진 그림자는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간다.
전용환, 〈트랜스포밍 사이클〉, 2022, 알루미늄 페인트, 260x250x32cm
신한철 1958- Shin Hanchul
조각은 질량과 공간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미술의 형태이지만 신한철의 <무한 구체(Infinite Sphere)>(2024)는 중력을 무시한 듯 공중에 매달린다. 작가는 물질의 최소 단위로 구(Sphere)를 사용해 증식과 분열 또는 확산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전통적 조각의 정체성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물질적 덩어리에서 벗어나 열린 구조로서 공간을 변형시킨다.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장치로 존재하는 이 스테인리스 스틸 구체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우주 공간에 떠있는 반짝이는 행성처럼 전시장을 가로지르며 경쾌하고 가볍게 공간을 장악한다. 유연하고 탄력적인 움직임을 극대화하는 매끈한 표면은 모든 물질을 흡수하거나 뱉어내며 관람객과 함께 호흡하며 에너지를 내뿜는다.
신한철, 〈인피니티〉, 2023, 스테인리스 스틸, 가변크기
김병호 1974- Kim Byoungho
제품 같은 외관이 작품의 완성을 대변하는 김병호의 작업은 철저하게 계획된 제품이자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우연에서 발생하는 효과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 같은 결과는 제작 방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제품 설명서처럼 작품의 모든 부분을 수치화, 규격화하여 개별 유닛을 조립할 수 있도록 모든 과정을 설계 도면으로 기록하고 매뉴얼로 제시한다. ‘조립된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과는 전혀 다른 태도, 형식으로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킨다. 제작 방법만큼이나 강조되는 작품의 특성은 동일한 규격의 형태가 반복되어 만들어 내는 리듬과 매끄러운 마감처리의 시각적 효과이다. 작가는 집단구성의 반복 패턴으로 물성이 사라지고 비물질화되는 경험을 자연스레 작품에 녹여낸다.
김병호, 〈수평 정원의 그림자〉, 2019, 스테인리스 스틸에 분체 도장, 200x867x240cm
윤정희 1978- Yoon Junghee
섬유예술을 전공한 작가는 가늘고 연약한 선으로 공간을 구조화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아주 얇은 동선으로 몽글몽글한 덩어리를 만드는 작업을 이어오던 작가는 2018년 부피를 버리고 섬유 본연의 특성에 주목한다. 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특성을 부각하기 위해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파이프의 몸을 빌려 실을 오브제화한다. 견고한 물성을 지닌 금속 파이프의 차가운 표면에 부드럽고 따듯한 실을 감싸 새로운 감각의 피부를 만든다. 윤정희의 조각은 두 물질이 맞닿음으로써 서로 간의 차이를 내재화하고 작품의 면이 벽면과 만남으로써 공간으로 확장된다. 속이 빈 금속 파이프는 본래의 모습을 실 뒤에 감춘 채 공간에 조용한 파동을 일으키며 우리의 감각을 일깨운다.
윤정희, 〈텐션 30(네이비)〉왼쪽, 2020, 실, 금속, 각 35x5.5x18cm, 2개_〈텐션 94(그린)〉오른쪽, 2020, 실, 금속, 30x94x20cm
정정주 1970- Jeong Jeongju
정정주는 건축공간과 빛의 관계를 미디어 작업 또는 조각 형식으로 시각화한다. 그 시작은 독일 유학 시절 유일한 안식처였던 기숙사 방으로 침투한 빛으로부터 받은 낯설고 불안한 감각에서부터 기인한다. 작가는 내면과도 같은 공간에 빛이 계속 움직이는 것이 마치 ‘나의 내부를 혀로 핥는 듯’하다고 감각했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안과 밖을 자신과 타자 사이에 생겨나는 막이나 경계로 인식하며, 이를 건축적 요소로 치환한 작품을 선보인다. <파사드(Facade)> 시리즈는 건축 구조물의 벽면, 창, 문과 같은 요소를 단순화하면서 열림과 닫힘의 공간이 만들어 내는 비례와 구성 요소를 재배치한다. 작가는 다양한 형태의 모듈과 색면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선보이고 움직이는 빛의 흐름을 기록하며 잔상의 흔적이 만드는 형태 변화에 몰두한다.
정정주, 〈파사드2022C-3〉, 2023, 스테인리스 스틸, 48x260x9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