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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 I. 고암, 시대를 보다: 사생(寫生)에서 추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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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
《I. 고암, 시대를 보다: 사생(寫生)에서 추상까지》

주      최 가나아트, 가나문화재단
장      소 가나아트센터 (서울시 종로구 평창 30길 28) 1, 2, 3관 
일      시 2024. 6. 26 (수) – 2024. 7. 28(일) (총 33일간)
출 품 작 품 평면 110여점, 조각 1점





가나아트 · 가나문화재단 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 개최
총 2부로 구성, 두 달 여간 고암의 30대 시절부터 말년까지의 작업을 돌아보는 자리
1부는 1930년대 사생, 1950년대 반(半)추상 작업,
도불 이후의 콜라주, 문자 추상, 옥중에서 만든 밥풀조각 등 주요 작품 총망라
<취야>, 옥중화(獄中畵) 등 1950-60년대 미공개 작업 대거 출품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은 올해로 120주년을 맞은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의 탄생을 기념하여 《I. 고암, 시대를 보다: 사생(寫生)에서 추상(抽象)까지》를 2024년 6월 26일부터 7월 28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한다. 기념전은 총 2부로 기획되어 고암이 문인화(文人畫)의 전통을 넘어 삶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30대의 시절부터, <군상>으로 인간 탐구의 절정에 이른 말년까지의 작업을 망라한다. 그 첫 번째 순서인 본 전시는 고암이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모습을 사생한 풍경화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의 사생이 해방기 화단이 당면한 현대화의 요구 속에서 반(半)추상 실험을 거쳐 도불 이후 콜라주와 문자추상 등 독자적인 추상 양식으로 이행하는 흐름에 주목한다. 이어서 8월 2일에 개최되는 2부 전시는 고암이 평생의 예술 세계를 종합해 종착한 <군상> 연작에 집중할 예정이다.




본 전시에는 고암 이응노의 1950-60년대 미공개 작품이 대거 출품된다. 특히 1950년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취야> 연작이 두 점 공개되어 주목된다. 고암의 50년대 화풍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전경에 놓인 탁자 둘레에 둘 셋의 사람이 앉아 술을 마시고, 그 뒤로 여러 인물 군상이 배경으로 묻히듯 그려지는 <취야> 연작의 기본 구도를 따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밀짚 모자를 쓴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의 중앙에는 웃는 눈의 돼지머리가 걸렸고, 그 왼쪽 끝에 ‘외상은 안뎀이댜’라고 고암이 직접 쓴 글씨가 남아있다. 또한 이응노가 저술한 중 · 고등학생용 미술교재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1956)의 초판본도 전시되는데, 이 책의 도판으로 수록된 정물화 <배추>의 원본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미공개 작품 중에는 고암이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대전, 안양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그린 풍경 2점도 포함되어 있다. ‘69년 3월 안양교도소에서 고암’이라고 관지를 남긴 작품은 안양교도소 뒷산인 모락산을 그린 것이다. 고암은 생전에 수감시기를 생각하며 감옥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깥과의 단절, 그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견디기 위해서라도 그는 무언가 그리고, 만들어야만 했다. 이렇게 처절했던 고암의 옥중 시기 이해를 위해 가나문화재단 소장의 옥중 밥풀조각도 함께 전시된다. 흔히 ‘밥풀조각’이라고 부르는 옥중 조각은 밥알을 조금씩 모아서 신문이나 종이조각과 뭉개고 섞어 반죽을 해서 형상을 만든 것이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한정된 기간 동안 만들어졌기에 수량도 적은 편이며, 재료적 특성으로 상태가 취약해 자주 공개할 수 없다. 

주묵(朱墨)으로 그린 1988년의 대나무 그림 1점도 대중에 첫 공개된다. 화폭의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위를 향해 솟아오른 대나무에는 활달하고 분방한 필치의 잎이 무성하게 피었다. 이 대나무 그림에는 고암과의 일화가 녹아 있다. 이 작품을 두고,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부침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고암 선생님, 왜 하필 붉은 대나무를 그리셨습니까?” 라고 걱정 섞인 질문을 하자, 고암은 되려 소동파의 우문현답을 끌어와 “그럼, 대나무가 검은색입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 시기라고 하면
30대는 자연 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 시대, 40대는 반추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사실에 대한 사의적 표현(寫意的表現) 그리고 50대는 구라파로 와서 추상화가 시작된다.
그로부터 오늘까지를 다시 나누어 10년을 사의적 추상(寫意的抽象)이라면
후기 10년간을 서예적 추상(書藝的抽象)이라고 이름 지어 보겠다.”

-이응노, 《고암 이응노(UNG-NO, LEE)》 전시 작가의 글 中, 1976


이응노가 1976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있었던 개인전에서 자신의 화력을 구분한 것이다. 그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 고암은 스승의 그림을 좇아 그리던 문인화 시기를 지나 30대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이응노는 1935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 동양화과와 혼고회화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 서양화과를 거쳐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 1876~1963)를 사사했다. 이 과정에서 접한 서양화의 사실적인 표현 방식, 그리고 사생을 강조한 마쓰바야시의 가르침에 특히 감화된 이응노는 문인화의 관념성에서 점차 벗어나 일상에서 발견한 풍경을 부지런히 그리는 데 전념했다. 사생이 그의 새로운 규범이 된 것이다.




해방 무렵 서울로 돌아온 이응노는 일제강점 이후 도시의 생활상을 화폭에 옮겼다. 이전의 사생은 향토적인 풍경이 주를 이뤘지만 해방공간에서 사생은 그 중심에 사람이 있었다. 시장의 상인, 지게를 진 노인, 화로 앞의 여인 등 평범한 사람들이 이응노의 화폭에 등장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부터 고암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주로 그리며 자신이 목격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옮겼다. 

“1955년에 그린 취야는 자화상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 무렵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는 동안 보았던 밤시장의 풍경과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 생활의 체취가 정말로 따뜻하게 느껴졌답니다. … 역시 나는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와의 대담 中

이응노의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 <취야>에서는 활달하고 거침없는 필치가 두드러진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성심성의껏 옮겨 그린 이전의 사생과 달리 빠른 붓놀림으로 인물의 형태를 과감히 생략하고 왜곡해 현장의 분위기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 때문에 <취야>는 이응노의 초기 추상회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응노는 자신의 50년대 작업을 두고 ‘반추상의 시대’라 이름 붙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반추상은 사생과 사의(寫意)가 일치된 것으로, 사생의 이념을 약화(略化)하고 지적 의도를 더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고암의 반추상은 사생하듯 그림에 지시하는 대상을 그리되, 이를 충실히 재현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표현해 작가의 주관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시기 나타나는 추상성은 고암이 한국의 격동기를 겪으며 보고 느낀 것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고암은 자연의 풍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추상화한 화면으로 계속해서 동양화의 혁신을 꾀했다.  




1960년 파리에 정착한 이응노는 추상 작업에 돌입했다. 앵포르멜(Informel)을 중심으로 추상 미술이 성행하던 전후 유럽 미술계와 흐름을 같이 한 것이다. 1962년 폴 파게티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이응노, 콜라주》를 열었고 콜라주 작업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파리 이주 초기 경제적 곤궁에 시달렸던 이응노는 버려진 잡지를 뜯어 붙이며 콜라주를 시작했다. <컴포지션(Composition)>이라 명명된 그의 콜라주는 여러 종이를 구기거나 뭉쳐 캔버스에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질감을 강조하는 화면을 구성하는 것에서 점차 한지를 얇게 찢어 붙여 동물이나 사람을 연상시키는 상형적 기호를 만들어 나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도상은 콜라주 작업뿐 아니라 수묵 추상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이응노가 “서예적 추상”이라 일컬은 문자 추상의 출발점이다.
 
“서예의 세계는 추상화와 일맥상통하는 (…) 조형의 기본이 있어요. 선의 움직임과 공간의 설정, 새하얀 평면에 쓴 먹의 형태와 여백의 관계, 그것은 현대회화가 추구하고 있는 조형의 기본이지요. (…) 한자는 원래 자연물의 모양을 따서 만든 상형문자와 소리와 의미를 형태로서 표현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자 그 자체가 동양의 추상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령, 하늘 천을 그 예로 들 때, (…) 이 글자를 네모난 종이에 쓸 때 어떤 컴포지션이 될까 하는 것이 바로 추상화 세계와 통하는 것이랍니다.”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와의 대담 中

문자 추상은 고암의 추상시기를 대표하는 조형언어이다. 이응노의 추상 화면에서 문자는 그 의미가 배제되고 온전히 조형 요소로만 사용되었다. 가장 완숙한 형태를 보여주는 1970년대 문자 추상에서 이응노는 한글과 한자가 가진 기하학적인 패턴에 주목하고 이를 다양하게 변형 및 조합하면서 무수한 변주를 만들었다. 이 시기 문자 추상에는 하나의 화면에 여러 형태의 문자가 기호화 되어 뒤섞여 있고, 각각의 문자 형상은 윤곽선을 두르고 있어 독립적으로 구분되면서도 마치 건축물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응노는 문자 추상 작업에 솜, 천, 옷가지 등 일상적인 재료를 도입해 조형 실험을 거듭했고, 태피스트리 등 새로운 매체의 작품을 제작하며 문자 추상의 영역을 넓혔다. 이렇듯 이응노는 서예에서 동양적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서양의 조형 어법으로 발전시켜 문자추상을 완성하였다.




고암은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와중에도 대나무, 난초, 동물 등을 화제로 전통적인 수묵화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응노는 서예와 문인화가 자신의 후기 예술의 근원이라고 강조했으며, 1975년 그린 한 묵죽화에는 “대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예술의 근본이다(愛竹心爲藝術之本)”라고 남기기도 했다. 이응노는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자신의 화풍의 변화에 따라 전통 수묵화를 그리는 방식을 달리했다. 그는 대나무를 스승의 가르침대로 그리는 것에서 시작해 사생에 눈을 뜬 시점부터 실제 대나무를 보고 그리며 대상에 생기를 부여했고 반추상의 시기에는 전통적인 소재를 보다 자유분방한 붓질로 그렸다. 본격적으로 추상 미술의 영역에 들어간 이후 그의 대나무 잎은 사람의 형상이 되어 <군상> 연작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응노의 전통 수묵화, 그 중에서도 대나무 그림은 그가 도불 이후 지속한 조형 실험의 뿌리이자 그가 지나온 예술 궤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응노의 예술세계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그리고 전후 유럽 미술의 영향 속에서 다채롭게 변모하였다. 그 여정을 따라가는 《I. 고암, 시대를 보다: 사생(寫生)에서 추상(抽象)까지》는 작품에 녹아 든 고암의 시대 인식과 그가 일평생 동양화의 현대화를 추구하며 이룬 예술적 성취를 조명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전시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은 이번 전시가 이응노 연구의 심화와 확산에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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