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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장식적인, 꿈의 비상
고충환│미술평론
꽃과 나비, 여성을 상징하는 꽃은 나비를 부르고, 남성을 상징하는 나비는 그 향기에 응한다. 전통적인 화조도와 초충도에서의 세밀화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남현주의 그림에서의 꽃과 나비는 이렇듯 여자와 남자를 상징한다. 이는 성적 희롱이나 성적 합일 같은 단순한 성적 정체성의 경계를 넘어, 음과 양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우주의 원리와 순리를 함축한 것이다. 여기서 음은 존재의 본질을 암시하며, 양은 그 본질이 드러나게끔 이끄는 형상을 암시한다. 즉 존재는 본질과 형상으로 축조돼 있으며, 이를 지지하는 원리가 음과 양의 상호작용성이다. 그림에 나타난 꽃과 나비는 이를 재차 상징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남자와 여자, 하늘과 땅, 빛과 어둠으로 나타난 현상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선과 악의 가치론적인 개념에 나타난 일체의 이분법적인 구분과 차이를 봉합하는 이상적인 세계,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염원과 기원이 내재돼 있다.
선남선녀들이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진정한 합일을 이루는 세계는 현실세계가 아닌 이상세계 곧 꿈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면에는 그 꿈의 강도만큼이나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이 자리하고 있다. 꿈은 말하자면 현실의 지난한 삶을 건너가게 해주는 유일하면서도 강력한 계기인 것이다. 장자몽은 꿈에 대한 이러한 속성을 말해준다. 즉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장주가 나비의 꿈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그 구분이 모호한 불투명한 경계를 통해 물망(物忘) 즉 삶이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 속에는 감각적 세계인식에 대한 절대부정이 들어있으며,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은 꿈꾸는 일임을 증언해준다(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론 꿈꾸기의 소산이다).
사실 꽃과 나비가 희롱하는 남현주의 그림은 거실의 벽면에 난 창에 비친 바깥 풍경으로서, 그림 속의 그림인 셈이다. 전통적으로 그림의 조건인 사각의 프레임이 세계를 반영하는 창으로 간주돼왔음을 생각하면, 그림 속의 그림은 창 속의 창으로 고쳐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주체는 당연히 바깥 그림, 바깥 창의 지평에 연속돼 있다. 주체는 말하자면 거실에 속해 있고, 그는 창에 비쳐 보이는 또 다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림과 그림, 창과 창이 중첩돼 있고, 그 현장 속에 주체의 존재를 암시해주는 이 그림은 전형적인 자기 반성적인 그림의 예를 보여준다. 마치 소설 속의 소설(격자소설) 구조가 소설 쓰기에 대한 주체의 반성을 추적하고 있듯이 이 또한 그림 그리기(작가의 경우에는 꿈꾸기와 동격인 것으로 나타난)에 대한 작가의 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평면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상효과와 함께 심리적인 효과를 강화한다.
주체의 존재를 암시해주는 이들 그림엔 그러나 정작 작가가 빠져 있다. 대신 아르데코 풍의 꽃문양으로 장식된 벽면 위로 작은 창이 나 있고, 화면 아래쪽으론 고전적인 느낌의 빈 소파가 놓여져 있을 뿐이다. 꽃문양으로 장식된 짙은 주황색의 벽지나 고급스런 소파가 일종의 나르시시즘적인 취향과 함께, 그 자체 일상의 번잡스러움이나 칙칙함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작가의 화려한 꿈을 암시해준다. 모든 꿈은 근본적으로 화려하다. 화려하지 않은 꿈은 없다. 꿈 자체는 주체가 자기의 욕망을 투사한 환영이며, 주체는 그 허구의 힘으로써 현실을 건너간다. 주체가 억압한 것들, 저당 잡힌 것들, 상실한 것들의 총체인 꿈은 결핍과 결여가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임을 암시해준다. 주체의 꿈은 그 억압된 욕망의 강도와 비례하는 만큼이나 화려하다. 이로써 남현주의 그림은 손에 잡힐 듯한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현실과는 거리가 먼 비현실적이고 아득한 느낌을 준다.
때때로 이러한 느낌은 실내 공간 너머로까지 확장된다. 마치 금비와 은비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은하수를 뚫고 칠흑 같이 어두운 하늘 위로 한 무리의 나비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른다. 나비는 화려한 색상과 가벼운 날개 짓으로 그 자체 비현실을 환기시켜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밤하늘을 수놓는 나비 떼의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 설정으로 인해 이는 더욱 강화된다. 작가는 말하자면 현실이 아닌 꿈을 그리며, 사실의 재현이 아닌 욕망을 그린다. 소파 또한 이따금씩 거실을 벗어나 그 공간을 넘어선다. 막힘이 없는 청색의 공간 속을 부유하며(청색은 심연과 이상과 자유를 암시한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정적인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꽃과 나비와 조우하기도 한다. 일상 속의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놓여져 있기 마련인데, 작가의 그림에서는 일상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로부터 놓여난 사물들의 존재를 보여준다. 본래 속해 있던 맥락으로부터 다른 맥락으로 옮겨진 사물들이 일상을 꿈으로 변질시키고, 현실 속의 비현실을 보여준다. 비현실은 현실에 이미 잉태돼 있던 것들로서, 작가의 그림에는 비현실과 현실, 이상(꿈)과 일상(현실인식)이 날실과 씨실처럼 직조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에 작가는 없는 것일까. 아마도 작가는 이 모든 정황을 바라보고 있는 가상적인 존재, 이 모든 사태를 꿈꾸고 있는 존재, 그림 속에 나타난 사물들에 이입된 존재, 마치 사물극에 등장하는 사물들처럼 그 사물들 속에 낱낱의 의미로 흩어져 있는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말하자면 날아오르는 나비는 비상하고픈 작가의 욕망인 것이며, 꽃은 적당한 허영심과 함께 인생무상에 대한 공감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읽혀진다(모든 화려한 것들은 유혹적인 만큼이나 약하고 가볍다. 그것은 죽음과 강하게 관련돼 있다. 그것은 삶이 꿈꾸는 일임을 주지시키는 신의 기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빈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빈 의자는 그냥 빈 것으로 보일 뿐, 실제론 비어있지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꿈꾸는 주체, 기다리는 주체를 암시하는 작가의 대리물처럼 보인다. 소파는 수면을 연상시키고, 꿈을 떠올리게 하며, 일탈과 비현실에로의 여행을 상기시켜준다. 이로써 작가는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 비상을 통해 일탈하고픈 욕망을 증명하고, 꿈꾸기를 통해 결핍을 증명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작가는 현실과 비현실이 맞닿은 경계의 언저리에서 빈 의자처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꽃과 나비가 희롱하는 그림으로 시작된 남현주의 그림은 이처럼 거실에 난 창을 통해본 풍경으로 연결되고, 그림 속의 그림으로 연속된다. 그림과 그림, 창과 창이 중첩된 사이로부터 주체가 암시되며, 자기 반성적인 상황의 설정이 읽혀진다. 여기서 빈 의자로 대리된 주체는 꿈꾸는 자, 기다리는 자로 나타나며, 이는 결핍과 결여로 나타난 현실인식을 증명해준다. 작가는 일부 작업에서 그림의 바깥에다가 덧문을 달아서 그림을 열고 닫을 수 있게 했다. 그러니까 덧문을 열고 그림 속을 들여다보도록(그림 속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왕의 작업에 나타난 그림 속의 그림에다가 또 다른 형식을(문으로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곁들임으로써 자기 반성적인 계기의 결을 더 강화한 경우로 보인다. 여기서 문은 현실로부터 비현실로 건너가는 경계를 암시하며, 작가의 마음속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때 작가의 마음 밭에 나타난 꿈은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그 만큼 결핍된 현실인식을 증명해준다.
이렇듯 꿈은 사물들이 인격을 대리하는 사물극처럼 보이며, 이것이 근작에 와서는 양과 코끼리 그리고 목마 등의 동물가족이 등장하는 동물극의 형태로서 변주되고 있다. 동물가족들 역시 자기가 속해 있는 공간(현실)에서 벗어나, 공간 바깥쪽(비현실)의 유토피아를 향해 종종걸음치고 있는 양 보인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작가의 가족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서는 보통사람들의 이상과 현실인식에 대한 공감이 읽혀지고, 이로써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예술이 꿈꾸기에 다름 아니며(꿈은 상상력의 다른 이름이다), 현실이 결여하고 있는 것에 맞닿아 있음을 환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