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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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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이나 기교 없이 소나무의 기세와 기백을 표현했으며, 사철의 풍상을 견뎌낸 소나무를 세밀하게 그린 수묵화 전시.
관조와 사유의 맑고 엄정한 수묵 심미


김상철│미술평론


작가로서의 강남미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이들은 그에 대한 회상을 지난 1970년대 말부터 시작하게 마련일 것이다. 이미 전설처럼 아스라이 기억되고 있는 〈삼인행〉(三人行)의 추억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를 알린 기념적인 전시일 것이다. 당시 단호하고 명쾌한 필치로 거침없이 도시 풍경을 섭렵해 내던 그의 화면은 청년 작가의 열정에 넘치는 의욕과 신선함이 가득한 것이었다. 마치 잘 다스려진 전사의 병기처럼 날카롭고 야무진 그의 필촉은 화면에 깊고 묵직한 묵흔을 새기며 그의 존재를 분명하게 세상에 각인시켰다. 작가로서 그가 처음 호흡하였던 시대는 전통의 경직된 가치와 고답적인 형식주의에 맞서 새로운 심미와 정체성의 추구를 치열하게 요구하던 시기였다. 그의 실경 작업들은 새로운 가치를 확인하는 유력한 도구였으며, 기세 넘치는 필묵에 의한 조형들은 새로운 시대를 호흡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는 분명 권위로 무장된 기성의 가치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준비하던 당시 빼어난 전사였으며, 거칠 것 없는 용장(勇將)이었다. 이제 그는 멀고 오랜 우회의 길을 돌아 회향을 준비하고 있다. 예전에 그가 치열하게 맞닥뜨렸던 전장과도 같던 작가의 세계로의 조용한 회귀이다. 청년 작가의 열정과 치기를 다스렸기에 서두름 없이 안정적인 발걸음을 확보한 그의 회귀는 소란스럽거나 번잡스럽지 않다. 그는 여전히 수묵이라는 오래된 병기를 추슬러 들고 첨단의 가치와 파괴적인 조형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장에 조용히 돌아 온 것이다. 그것은 그저 낡고 진부한 지난날의 추억으로 점철된 색 바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맑고 정갈하며 엄정한 품격을 지닌 오늘의 것이다.





그의 수묵은 결코 수다스럽거나 번잡스럽지 않다. 단정하고 엄격하며 단호한 특유의 필치는 여전하다. 그의 수묵은 특정한 형식이나 법칙에 구애됨이 없이 마치 응축된 기세를 분출하듯이 일정한 동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붓을 허투로 흐르지 않게 하고 펼침과 거둠의 절도가 완연하여 방만하지 않다. 그럼으로 그의 수묵은 분방하지만 번잡스럽지 않고, 자유롭지만 난삽하지 않은 것이다. 수묵은 그 자체가 일정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번지고 스며들며 절로 이루어지는 변화를 인위적으로 다스려 경영하려 한다면 수묵은 본연의 특징과 개성을 훼손당하기 마련이다. 이를 용인하고 담보하여 온전히 그 특성을 발휘케 함은 안목이자 여유이다. 그리고 이를 거두어 온전히 조형의 틀로 수렴해 냄은 지혜이다. 작가의 조형의지에서 발현되는 작위와 재료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무작위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모든 과정이 조화를 이루어 수묵은 구축되게 마련이다. 그의 수묵은 굳이 설명하고자 애쓰거나 과장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수다스럽지 않으며, 작위와 무작위의 경계를 모두 포용하고 수용하고 있기에 번잡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일정 기간의 외유를 통해 그가 체득한 지혜의 소산일 것이며, 시간의 축적에 따라 한결 그윽하고 부드러워진 그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수묵은 비록 말하지 않지만 그윽한 표정을 통하여 그간 작가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저간의 변화를 넌지시, 그리고 빠짐없이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는 그가 회향을 도모함에 의탁하는 바일 것이다. 사철의 풍상을 고스란히 몸뚱이로 이겨내며 그 흔적들을 몸에 새겨 연륜을 더하는 소나무를 통해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단지 그 형상의 우뚝함이나 솔잎의 청청함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순례하듯이 소나무를 찾아 다리품을 팔고, 그 모양 속에 담겨 있는 무엇인가를 궁구하기 위하여 그는 대상을 작게 분할하여 섬세하게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묘사하며 그 기세를 관찰하였다고 한다. 마치 작가로서의 입문을 도모하는 학생과 같은 진지한 노력과 대상에 대한 우직한 접근을 통하여 그가 확인하고자 하였던 것은 분명 장식적인 꾸밈이나 기능적인 기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발견한 것은 오히려 이전 작업들이 지니고 있던 치기였다고 한다. 예전에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대상을 섭렵하던 기백과 기세가 마치 비등하던 물과 같은 것이었다면, 일정 기간의 외유를 통해 작가가 확보한 것은 오히려 소리 없이 침잠하는 깊은 물의 지혜였으며, 이는 결국 수묵으로의 회향으로 귀결된 셈이다.




사생을 통하여 소나무의 형상을 빌고 있지만, 그는 결코 이에 얽매이지 않는다. 단지 형상을 빌어 정신을 오롯이 드러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두드러질 뿐이다. 그만의 담백하고 단호한 필치는 마치 붓을 던지 듯 무심하고 분방하게 화면을 구획하고, 순간에 이루어지는 찰나의 흔적들은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수묵 특유의 기운을 형성해 낸다. 이러한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작업 방식을 수용함에 있어 수묵의 민감하고 섬세한 반응성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섬세함과 민감함은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솔직함으로 나타나 작가에게 추호의 흐트러짐도 용인치 않는 엄격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다스려 작가의 조형 의지에 충실히 작용하고 반응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장인적 숙련과 재료에 대한 장악력을 필요로 한다. 작가가 굳이 소나무를 작은 화면으로 분할하여 치열하게 사생하고 이를 다시 조합하여 대규모의 화면으로 재구성함은 바로 대상에 충실하고 표현에 정직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며, 표현에 있어서 수묵이라는 조형 방식에 구차해지고 싶지 않은 심경의 표출일 것이다. 이는 그가 일정 기간의 외유와 연륜의 축적을 통해 이전의 작업들에서 방만한 치기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을 확보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묵은 분명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조형 체계이다. 이는 작가 개개인의 사변과 사유에 의해 획득되어지는 가치의 내용과 깊이에 의해 차별성을 지니게 된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육박하기보다는 관조(觀照)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관조는 대상에 대하여 주관을 첨가하지 않고 냉정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음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먼저 대상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을 전제로 하고, 대상을 완미하는 작가의 마음이 허정한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소 확보하게 되는 일종의 심미경계이다. 온갖 자극적인 표현들과 파격적인 실험 양식들이 난무하는 현대미술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이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작가가 수묵을 다시 취하고 이를 통하여 수아담백(秀雅淡白)한 묘취를 추구하고 지향함은 재발견을 통한 회향의 구체적인 이유이자 가치이다. 그에게 새삼 한국화의 전통성, 혹은 수묵의 가치 강조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이미 외유를 통해 획득되어진 관조의 시각과 지혜를 통하여 철저히 개별화된 가치관과 공간을 구축해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존재 확인이자 작업의 이유일 것이다. 그의 수묵은 여전히 단호하고 엄정한 틀을 견지하면서 특유의 명징(明澄)함이 더욱 두드러져 나타날 뿐이다. 그는 이러한 수묵을 통하여 현대라는 현란한 현상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에 대한 성찰의 지혜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마치 맑은 석간수의 청량함 같은 그의 수묵이 탄산의 자극에 익숙해져 있는 오늘에 던지는 메시지가 새삼스러워 보이는 것은 단지 그가 지니고 있는 이력의 무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아득히 잊고 있던 본연의 가치에 대한 조심스러운 제시이자 충고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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