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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포즈 7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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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와 금호미술관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진행하는 이 전시는 작년에 이어 두번째 이다. 양 기관에서 초청한 일곱명의 평론가와 큐레이터들이 참신한 작가 일곱명에게 프로포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와 금호미술관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진행하는 이 전시는 작년에 이어 두번째 이다. 양 기관에서 초청한 일곱명의 평론가와 큐레이터들이 참신한 작가 일곱명에게 프로포즈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와 금호미술관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진행하는 이번 전시 는 양 기관에서 초청한 일곱 명의 평론가, 큐레이터들이 자신의 개성과 취향에 맞는 현대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독창적이고 참신한 작가 일곱 명에 대한 프로포즈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상호간의 교류와 소통이 중시되는 오늘날의 미술계에 또 다른 활력을 불어넣으리라 기대되는 새로운 형태의 이번 전시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를 맞게 되었다.

창동과 고양 두 곳에 미술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내외 젊은 시각 예술가들에게 서로 다른 장르를 다루는 작가들과의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자신의 작업역량을 증진시키고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갈 수 있는 밑바탕을 제공하는 동시에 국내외 평론가와 큐레이터, 그 외 다양한 분야의 미술 관계자들과의 자연스럽고 폭 넓은 만남을 통한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토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오고 있다.

‘금호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과 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금호미술관과 상호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함께 열게 된 이번 전시를 통해 앞으로 더욱 다양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국내의 창작스튜디오 활동이 우리 미술계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critic 윤동희- artist 뮌(김민,최문)


도시의 스펙터클, 그 심원한 공간의 문화사를 꿈꾸다
- mioon(김민, 최문)의 속을 거닐며



mioon(김민, 최문)은 스펙터클의 사회적 풍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예술가이다. 두 사람은 스펙터클이라는 문화의 한 지점에서 작업의 계기를 찾는다. <관광객 프로젝트> <오실로스코프> <노래방 프로젝트> 등의 작업에서 이들이 담고자 했던 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장악한 스펙터클이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었다.
(짧게 쓸 수밖에 없는) 이 글은 이들의 근작 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는 mioon(한글로는 ‘뮌’이라고 읽기로 하자)이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또 다른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연구과제이다. 두 사람이 이 작업에서 도시를 ‘보여주는’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런데 이 간단함이 보는 이를 질리게 한다. 얘기는 이렇다.
두 사람에게 도시란 지금 이 순간도 ‘팽창’하는 존재다. 산업이라는 거대한 도식 아래 정보와 이미지를 먹고 몸집을 불리는 거대한 생명체다.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존엄성을 보유한 ‘개인’이라기보다 도시를 부유하는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해석된다. 도시가 뿜어내는 스펙터클은 도시를 표상화 하는 ‘껍질’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다. 두 사람이 누군가 먹고 버린 과자상자를 일일이 모아 검게 칠한 뒤, 하나하나 붙이는 방식을 택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 공간을 형성하는 인간, 아니 소비자의 욕망을 파고드는 정보와 이미지의 파편을 보여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테니 말이다.
가 갖는 미덕은 그 동안 서울과 독일을 오가며 한국 미술계에서 자리매김하는 데 다소 애를 먹었던 mioon의 작업을 해독하는 열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상업화 되어가는 미술제도가 작가들의 등을 떠다미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사회적 현상을 비추는, 다시 말해 ‘돈이 안 되는’ 작업을 만난다는 건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이는 mioon이 갈림길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히 예술가로 살아가는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적·역사적 ‘현상’을 중계하는 데서 그치느냐, 혹은 한 발 더 나아가 그 현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느냐 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얘기다. 비록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상당한 부담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도시라는, 두 사람이 설정한 의제를 문화의 연속체에 삽입해 나간다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듯하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포기하면서 그 속에 내재한 역사의 문화적 내용물을 포착했던 벤야민적 방식이 이들의 ‘멘토’가 될런지도 모를 일이다. 도시(공간)와 현재(시간)라는 문화적 내용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만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두 사람의 작업이 도시에 관한 해석에 머문 채 정지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빼어난 글솜씨를 보이는 작가의 저작이 반드시 고전의 반열에 들지 않듯이, 두 사람의 작업이 도시라는 주제의 바깥을 맴도는 주석에 머물 수도 있음을 이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들의 작업이 단순히 도시의 스펙터클을 요약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시에 관한 새로운 텍스트와 이미지,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부족한 미술계에 ‘스펙터클함’을 부여할 테니 말이다.

윤동희 | 미술전문기자, 도서출판 북노마드 대표









critic 이추영 - artist 유정현

틈과 경계의 탐색



순백의 캔버스와 명확히 대비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은 강렬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얼굴은 반복적인 덧칠과 지우기로 인해 과일 껍질처럼 벗겨지고 뭉개졌으며, 수족이 생략된 미완의 몸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다. 인물들의 몸통에 그려진 화려한 패턴의 꽃무늬는 사자(死者)를 위한 헌화처럼 공허해 보이며, 괴기한 얼굴과 대조된다.

왜곡되고 해체된 형상에 대한 매혹은 16세기 매너리즘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유정현의 인물들도 상식적인 미감의 범주를 벗어나 심하게 훼손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배경과 인물의 정면성, 심하게 왜곡된 형상의 표현 등에서 인간 혐오와 공포에 대한 가학적 폭력을 휘두른 베이컨(Francis Bacon)의 자화상 연작과 형식상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베이컨의 연작이 ‘자신(Self)'이라는 뚜렷한 실체감을 바탕으로 하였다면, 유정현의 인물은 ‘객관적 실체’가 아닌 어떤 ’심리적 상태’에 대한 관찰과 표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물감을 덧칠하여 완결된 형상을 구축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형상을 지워내며 흔적을 남기는 방식을 통해 주제를 표현한다.

그는 영속적이며, 안정적인 실체의 형상이 아닌 쉽게 부서지고 사라질 것 같은 연약한 ‘상태’와 이에 대한 관심의 흔적을 기록한다. 결정적 실체인 ‘어떤 것’에 대한 단정적 해석의 욕망을 자제하고, ‘어떤 가능한 것’에 대한 언급을 통해 고정되고 정의된 상태가 아닌 유동적이며 비결정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타자와의 관계로 야기되는, 불안, 동요, 분노 이를 극복하고 이해하려는’ 작가의 의지는 ‘드러냄과 숨김’ 이라는 상반된 상태의 경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지켜진다. 결국 다양한 형태의 훼손된 형상들은 ‘드러냄과 숨김’의 경계 위에서 서로 간에 불안과 극복의 대상이 되는 익명의 타자이자, 타자에 의한 작가 자신의 투영과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형식상의 특징으로 나눠보면, 인물의 정면성이 강하게 드러난 , 연작과 ‘나무(식물)와 인물’, ‘전신 인물’ 그리고 연작으로 나눌 수 있다. , 연작의 인물들은 대부분 심하게 훼손된 얼굴을 지녔으며, 아이같이 왜소한 몸과 경계심이 가득한 움츠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려한 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무의 외양도 그다지 온전치 못하다. 가지들은 제멋대로 비틀려있고 외피의 껍질은 벗겨지고 까진 속살을 훤히 드러낸다. 가지와 꽃잎 사이에 조심스럽게 위치한 작은 인물들은 지독한 트라우마로 인한 대인공포와 광장공포에 시달리는 피폐한 인간처럼 보인다. 화려하고 풍성한 외양의 꽃과 가지는 이들의 생채기를 조심스럽게 감싸고 위로하며, 외부의 낯선 시선으로부터 이들을 감춰준다.

세상의 존재가 드러나는 낮이 지나면 어둠이 주인이 된다. 인물들이 사라진 빈 자리를 지키는 식물들은 왕성한 생명력으로 밤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연작은 무한 깊이의 흑색 풍경이다. 이들의 형상은 태양빛에 드러난 외피가 아닌 어둠속에 감춰진 달의 이면이며, 달빛에 비친 식물의 그림자가 깊게 새겨진 검은 대지의 표면 그 자체이다. 불에 탄 재와 같은 검은 안료의 유동적인 흐름은 대지 위에 풍부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Red, Blue, White, Silver Moon의 제목이 갖고 있는 화려한 색채감은 검은 대지 위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는 본질적 실체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인위적, 표피적인 바라보기의 전형이며 폭력적인 주관적 감정 이입을 통한 해석의 오류를 의미한다.

그의 작품 중 ‘전신 인물’ 연작은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형태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기존의 인물들과 달리 온전한 성체의 비례를 가졌으며, 우아한 몸의 제스처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비록 얼굴의 표정은 여전히 짙은 그림자로 감춰져있지만, 부드러운 포즈로 인한 풍부한 몸의 표정은 연작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냉소적인 무표정이나 경직된 포즈와 상반된다. 붉은 빛 투명한 육신에는 핏빛 꽃문양이 스며들 듯 새겨져 있고, 중력을 초월한 듯 무게감이 제거된 채 표면 위를 부유한다. 전작의 전반적 기류가 수동적인 내향성이었다면, ‘전신 인물’ 작업은 보다 능동적인 소통의 기대가 충만한 작업이다.

유정현은 그의 관심이 “한 존재가 호명되어지는 방식과 타자와의 관계 맺기에 의해 형성되는 틈과 경계에 대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그의 실험은 관계 맺기의 난해함에서 발생하는 틈과 경계에 대한 탐색이며, ‘보기와 보여 지기’,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통해서 지속되어 왔다.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대화 중에 필자는 무언가 복잡하게 얽힌 매듭의 꼬리를 붙잡은 느낌이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며 ‘드러냄과 숨김’의 경계를 탐색하는 관계 맺기의 미덕(?)이 필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업이 돋보이는 가장 큰 매력은 작품에 대한 논리적인 개념이나 설명과는 무관하게, 교묘히 간극을 제어하고 표현해 낸 감각적인 ‘표피’라고 생각된다. 내면에 감춰진 숨김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깊지만, 캔버스 한 겹에 미세하고, 세심하게 드러난 ‘흔적’의 독특함은 그의 작업을 주목하게 만드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추영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critic 최관호 - artist 박영길


전통회화의 현대적 재현과 분석적 관점


동양화 작가 박영길의 최근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이면을 기록화한 것으로써 전통적인 풍속화를 현대적인 시각과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업, 이른바 신(新)풍속화 작업이다. 또 하나는 실경산수를 기조로 산수풍경화에 현대적 이미지와 아이콘을 복합적으로 차용함으로써 풍경화에 새로운 미적 감각을 부여한 이른바 신(新)산수풍경화이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풍속화로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가 있다. 이는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에 행차하는 광경을 담은 여덟 폭으로 된 기록화이다. 박영길은 과거에 이것을 그대로 모사하는 작업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를 계기로 전통적인 풍속화의 형식을 빌려와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이 그의 대표작 ‘춘풍행락도(春風行樂圖)’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작가의 주요 모티브를 이룬다. 전통적인 기록화에는 행락도(行樂圖), 의궤도(儀軌圖), 반차도(班次圖), 능행도(陵行圖), 궁궐도(宮闕圖), 사신도(使臣圖), 전쟁도(戰爭圖), 수군도(水軍圖), 지도(地圖)와 같은 다양한 기록화가 있는데 모두가 시대의 세정과 풍습을 담은 풍속화 이다. 그러나 박영길의 신(新)풍속화 작품-‘춘풍행락도(春風行樂圖)’는 그것과 다르다.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닌 현재를 재현화한 것이다. 단지 풍속화의 전통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물리적인 형식과 기법을 차용했을 뿐 개념적으로는 상이하다고 할 수 있다.

박영길의 ‘춘풍행락도’는 사생에 의한 진경산수와 관념산수를 혼용하고 부감법 등을 사용한 구도로 광활하고 드라마틱한 풍경을 연출한다. 배경은 조선시대 후기 작품에서나 봄직한 청록산수의 필법을 차용하였고, 여기에 미니어처 같은 작은 인물을 화면 곳곳에 병치시킴으로써 마치 현대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약 200년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도심으로부터의 일탈로 여유롭게 사색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길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작품으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또 어디서부터 감상하든 무방하다. 스토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볼거리가 있으며 고정된 시선이 아닌 시선의 이동이 자유로운 작품이다. 목장, 공동묘지, 수목원, 공원, 산책로, 계곡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 같은 인물들이 익숙하고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자칫 배경과 인물이 다소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이 두 요소를 조화롭게 연결시킴으로서 동화된다. 이처럼 박영길의 풍속화 작업은 형식적으로는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되어 이해됨으로써 지극히 현대적이다.

박영길의 또 다른 작업은 ‘wind-road' 시리즈 작품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작업 방식의 다단계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최신 연구작 이다. 작가는 작업실 주변의 풍경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외진 풍경까지 실경을 스케치 하고 이를 다시 재구성하여 한지에 먹으로 산수풍경을 그려 나간다. 완성된 회화 작품은 컴퓨터 스캔 과정을 거쳐 디지털적인 요소로 전환한다. 여기에 관념 혹은 허상의 이미지와 현대적 아이콘을 혼용하고 다시 재구성 한다. 이후 화면의 색상을 반전(Invert)시키고 그것을 한지에 실사출력 하는 방식으로 재가공하여 신(新)산수풍경화를 재현 한다. 이 경우 형식적으로는 디지털적인 프로세스와 결과물을 갖지만 내용적으로는 여전히 아날로그적이다. 따라서 이것이 단순한 ’매체의 전이‘ 현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작가 자신이 숙원해온 ’회화적 전이‘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wind-road'의 명제는 말 그대로 ’바람과 길‘을 뜻한다. 작가는 실경산수에 관념적 대상물인 길, 인물 혹은 기타 사물 등의 이미지를 외부로부터 차용하고 이를 재구성하여 삶의 흔적을 대변한다. 또한 작가는 바람을 통해 익숙함 속에서의 새로움과 기대심리를 느끼고자 실제의 바람을 느끼면서 스케치 한다. 유형의 관념적 대상물과 무형의 바람은 작가가 기대하는 새로운 관계성을 유도하는 상징적 메타포이다.

작품의 분석적인 관점에서 작가가 시도하고 있는 위의 두 가지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대조적이지만 개념적인 면에 있어는 상호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이 인지된다. 박영길이 일관하고 있는 전통회화의 재현과 현대적 관점에서의 해석적 작업은 그가 앞으로 신(新)풍속화와 신(新)산수풍경화의 모티브를 또 다른 관점으로 어떻게 재해석하고 확장시켜 나갈지 주목된다.

최관호 | 영은미술관 학예팀장




curator 서진석 - artist 수잔 무니

이방인의 시선




수잔 무늬는 아일랜드에서 왔다. 그녀는 창동스튜디오에서 약 3달간 머물며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현대미술이란 언어로 우리와 소통하려한다. 그녀는 이번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머문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작품을 만들어냈을까. 이런 호기심을 앞세우고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녀는 한국에서 수집한 다양한 사진 이미지들을 보여주며 앞으로 만들어 나갈 작업들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일랜드에서 해왔던 작업들에 대해 더 많은 흥미를 느꼈고 결과적으로 과거 작업에 대한 이야기들로 주어진 시간을 다 보내 버렸다.

이방인인 그녀는 한국의 모든 이미지들이 매우 특이하고 새로울 것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그녀의 작업에 새로운 재료들로 쓰일 것이다. 그녀가 과거 작업에서 보여준 아일랜드의 기묘한 암석이 펼쳐진 언덕들이 난생 처음 보는 시각적 독창성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번 작업에서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로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전신주와 나무들 그에 마구 얽혀있는 매우 복잡한 전선과 케이블의 사진 이미지들을 사용하였다. 압축성과 속도성이라는 우리나라 사회상의 산물인 이 무질서한 이미지들이 그에게는 얼마나 신기한 이미지들로 보였을지...(현재 일부지역에서는 무계획적 도시개발의 산물인 이 선들을 땅에 묻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이 사진 이미지들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약 1m 높이의 여러 조각들을 갤러리 바닥에 각각 거리를 두고 배치한 후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이 대상들은 전형적인 도시의 나무들과 전신주의 혼합hybrid의 형태로서 그들은 서로 전선으로 연결된다. 갤러리 공간 안에서 케이블로 연결된 스피커의 사운드를 들으면서 관객들은 방향을 지시 받는다.

갤러리 벽면에는 비디오 영상물이 비추어진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figure은 자신의 환경에서 혹은 갤러리 공간에서 어떤 사람과도 또는 누구와도 소통하거나 인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저 서 있다. 가상의 비디오 공간과 관객의 물리적 공간의 혼합은. 비디오 프레임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관객의 물리적 장소로 이동하는 확장된 자유를 나타낸다.

영상 작업과 공간의 조형 설치물들은 "Something Physical"이라는 제목 아래 새로운 작업과 이전 작업들, 한국과 아일랜드라는 두 다른 공간 간의 관계를 형성 시키고 있다

그녀는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통해 '다채로운 풍경들'과 이 개별적이고 또는 집합적인 다양한 공간들의 상호작용과 경험을 방법적으로 연구해 왔다. 이번 작업에서도 그녀는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들 즉 각기 다른 환경과 공간들을 연결하여 숙고와 반영을 위한 새로운 공간 창조를 시도하며 시간성의 탈각timeless이란 특성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몸짓, 바라봄의 행위 혹은 한 형태의 존재가 발생하는 공간으로 작동하고 비록 모두 실제 공간을 대상으로 작업하지만 이 공간은 일상의 시간적 궤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며. 시간적으로 무상한 공간을 재창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현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아바타로써의 실루엣을 사용하고 결국 다른other 공간의 감각을 얻으면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찾아 갔던 그 지역과 대조되며 연결되는 공간을 서울에서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 새로운 도시 공간들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혹은 최소한 역사의 자취가 시각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영원한timeless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 다른 종류의 공간들은 강한 대조라기보다는 오히려 병렬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비디오 작업을 관통하는 개념과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조작과 설치를 이용한다.


작가 노트에서 발췌




대상을 보고 해석함에 있어서 이방인이 보는 시각적 관점은 우리와는 다른 해석과 감응을 만든다. 거대 다양성과 동시성의 글로벌시대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우리의 사회와 문화는, 보이는 이의 다름을 넘어, 보는 이의 차이와 다양성조차 인식해야만 하는 단계적 과정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사물을 보고 느낀 체험적 경험을 다른 이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하지만 결국 관념에 머물고 만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마치 우리가 강아지가 바라보는 흑백의 세상을 상상으로만 이해할 뿐 감성적 경험으로 체험할 수 없는 것처럼.......

글로벌리즘 사회와 문화는 유목주의나 무경계성, 무지역성을 떠나 전 지구적 거대 다양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로컬리즘을 전제로 한. 지역 간, 민족 간의 문화적 차별성을 전제로 한 시각 이미지의 비교 분석론은 더 이상 큰 의미를 찾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다른 이방인의 시각의 차이가 조금씩 가까워 질 때까지는, 단지 이성적인 가상의 인식이라도 다른 향유자의 관점을 이해하며 다중의 감응과 체험을 시도해보는 것도 지금의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데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까?
그녀가 의도하는 다른 공간 다른 지각 간의 관계까지 이해하며 바라본다면 그녀의 작업에서 우리는 자칫 단편적으로 느껴질 이미지를 보다 다채로운 감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서진석 | 대안공간 루프디렉터









curator 하계훈 - artist 이지현

대량소비 사회에서 유통되는 가공된 풍경




근대 영국의 귀족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명망 있는 가정교사들에게 맡기고 그 교육이 끝날 무렵 그들의 자녀들이 교사들과 함께 유럽대륙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여행은 대장정(Grand Tour)이라고 불렸다. 이뿐만 아니라 독일의 유명한 시인 괴테같은 사람도 문학적 영감의 재충전을 위하여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을 두루 여행하고 그 소감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여행에 대한 욕구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다만 과거로 거슬러 갈수록 교통수단의 한계와 여행 도중의 신변의 위협, 여행 경비 조달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욕구가 억제되어 왔을 뿐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중세 유럽 기독교의 권위를 붕괴시키고 르네상스의 싹을 키운 원인 가운데 하나도 십자군 원정이라는 이름의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 유럽 저널의 인기 있는 섹션 가운데 하나도 먼 나라의 소식이었으며 낭만주의자들의 관심 가운데 하나도 이국적 정취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해외 배낭여행, 각급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도 결국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인간 본연의 호기심에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예전부터 자신이 가본 곳에 대한 감상과 추억은 글이나 그림으로 기록되었고,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상상 역시 환상적 이야기나 상상의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기록 행위가 글보다는 이미지 중심으로 주로 카메라를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이지현은 카메라를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기구로 보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카메라가 생산한 이미지를 편집하고 가공하여 이상화시키거나 낭만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시도를 감행한다.

이지현의 작품은 이국적이고 랜드마크적인 풍경을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그녀가 다루는 풍경은 사실주의적 회화로 재현되거나 사진을 통해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상태의 풍경이 아니다. 작가는 유명 관광지의 관광엽서나 포스터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웹상에서 얻을 수 있는 파노라믹한 풍경들을 채택하여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이렇게 채택된 풍경들은 이미지가 편집되고 가공되어 마치 일상의 상품처럼 팔고 살 수도 있고 스크랩북에 차곡차곡 모아 소유할 수도 있으며, 그것을 소유한 이 뿐 아니라 보는 이의 상상을 자극하고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과거 여행자들(또는 여행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감상이나 상상처럼 풍경 이미지의 환상적 가공과 편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 2000년대 초부터 5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작가는 대량 소비사회의 물량주의와 이미지의 상품화를 목격했고 사진을 통한 기억의 물성화에 집착하는 유명 관광지에서의 관광객들의 행동을 관찰해왔다. 작가의 눈에 들어온 관광객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그 장소를 추억할 수 있는 기념품과 스티커 사진을 수집함으로써 기억을 소유하려고 한다. 관광객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기억의 물질적 소유 욕구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낯선 공간에 대한 적응과 친화의 시도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낯선 환경에서 경계심과 관찰력이 증가한다는 사실도 이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작가는 풍경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관광문화의 도식화된 특징과 미국 대중소비 문화의 무한적인 이미지 생산과 자기복제의 현상을 작업의 모티브로 선택한다. 그녀가 표현하는 풍경은 화면 안에서 작가의 선택에 의해 이미지가 편집되고 배경의 색상이 조율되어 전반적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띤 새로운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작가는 자신이 직, 간접적으로 체험한 풍경을 단색으로 채색된 바탕 화면 위에 라미네이트 코팅이 된 디지털 출력 이미지 사진으로 부착하고, 그 이미지들을 커팅과 콜라쥬 기법으로 가공한다. 그럼으로써 화면은 오려진 사진 이미지와 작가가 선택한 분위기에 맞는 고유한 색상의 배경이 결합된 사진과 회화의 이중적 구성을 갖게 된다.

그녀가 체험한 풍경은 낯선 이방인의 놀라운 시선이 처음으로 개입되고, 점차 그 시선은 자신 앞에 펼쳐진 이미지들을 물성화하여 사진에 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통하여 유명관광지의 괄목할 만한 경관은 교환과 판매 뿐 아니라 소유가 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로 가공된다. 관광산업의 소비를 위하여 대량 인쇄된 이미지들은 이지현의 손을 거쳐 상품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잠재력을 가진 예술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이어지는 8개의 유명 관광지를 재현한 연작에서는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 속에 작가의 손맛이 드러나는 선 드로잉이 가볍게 첨가되기도 한다.

이지현이 제시하는 풍경의 이미지는 유명 관광지와 같이 일견 익숙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으로 구성된 일종의 이상화된 광경이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작가가 제시하는 풍경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각을 기만하고 환상을 갖게 만드는 짓궂은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지현의 이미지를 선별하는 눈썰미와 색채감각에 의해 조작되는 작품 속의 화면에서는 오히려 밝고 화려하며 가벼운 해학이 드러날 뿐 오늘날의 대중문화와 관광산업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는 태도를 엿볼 수는 없다. 이지현이 제공하는 화면은 과거 유럽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대량 소비사회에서 유통되는 가공된 풍경으로 재맥락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하계훈 | 미술평론가





critic 이선영 - artist 송명진

카오스의 대해에 떠있는 질서의 단편들




송명진의 풍경에는 넓게 펼쳐진 매끈한 초록 색면, 동물적이면서 기하학적인 리듬을 가진 이상한 식물들, 이국적이고 외계적인 공기, 무색무취의 중성적인 분위기, 수수께끼같은 화면의 공백 등 낯선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기이한 풍경의 단초가 된 장소가 진부하기 그지없는 개천가 풀밭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는 도심의 가장자리, 그 주변부에서 시작하여 변화무쌍한 평면들로의 모험을 시도해왔다. 가로 4미터가 넘는 대작 [풍경의 장](2005)은 작은 개울 양측면을 뒤덮은 풀같은 형상이다. 개울은 식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 바탕면을 드러내고 있다. 풀이 꽂혀있는 빈 구멍이나 풀이 들려있는 오려진 단면들도 보인다. 화이트는 일종의 공백같은 역할을 한다. 식물들이 수많은 돌기를 가지면서 그림의 녹색 표면을 넓혀가듯이, 공백은 평범한 지상의 단편에 무한을 개입시킨다. 구상적으로 본다면 그 공백은 하늘을 반영하는 수면이 된다.
모네의 [수련]이 21세기에 다시 그려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모네의 연못이 땅과 하늘의 수많은 요소를 담아낸 무지개 빛을 머금은 상징적 우주라면, 송명진의 연못은 모네처럼 무한의 거울을 지향하면서도 모든 물질을 밖으로 뿜어내는 우주의 화이트 홀에 가깝다. [Making Paradise]는 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쳐진 정원이다. 덧대어진 녹색면들과 하얗게 드러난 바탕면이 보인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담장을 둘러친 정원이나 공원’(R. 해리스)이라고 한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그곳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영원한 현재에 존재하는 녹색 낙원이다. 담장 밖 어디선가 구해온 재료로 이식되거나 구성된 파라다이스는 잃어버린 낙원을 재창조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신들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천연의 장소인 ‘신성한 숲’이라는 고대적 개념은, 인간의 노동으로 경작해야 하는 농업과 대립되는 목가적인 정원이다.

그러나 송명진의 녹색 파라다이스는 생명과 창조보다는, 누더기처럼 기워진 인공적 장소임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자연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상상이며 동시에 문명의 가공물이다. 어디선가 이식해 온 잔디와 나무들이 심어진 [Gardening](2006)은 마치 몸의 일부가 잘린 동물들처럼 가지치기 된 단면이 붉다. 송명진의 작품에서 정원은 순수한 자연보다는 인공낙원의 양상을 띄고 있다. 파라다이스는 독한 양념 냄새를 풍기는 파밭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안식처라기 보다는 탈출해야만 하는 곳이 된다. 파 밑둥은 붕대로 감겨있으며, 식물을 이루는 몸통도 실로 얽어져 있는 모습이다. 대지에 뿌리를 내렸다기 보다는 구멍에 꽂혀있다. 여기에서 자연은 19세기의 보들레르가 노래했듯이 거대한 신전과 비슷하다. 그러나 21세기의 자연은 만물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풍요로운 상징의 숲이 되지 못한다.

송명진의 작품 표면을 뒤덮는 녹색 식물들은 뿌리, 줄기, 잎, 꽃 등을 갖춘 전형적인 식물보다는 해초같은 원시적 식물처럼 미분화된 형태이다. 그것은 중력을 극복하고 하늘을 향해 높고 넓게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적으로 흩어지거나 집적된 상태의 물질성을 가진다. 그래서 그것은 때로 [자라나는 무덤](2005)같은 형태로 변모하기도 한다. 모발이나 촉수같은 동물성 운동성을 가진 잡초같은 극악스러운 생명력은 순식간에 공백을 메꾼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단한 뿌리가 없다. 실제 자연이 아니라, 회화라는 표면에 얇게 식재된 추상적인 색면이다. 붓터치가 남는 회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물의 뭉실뭉실한 촉각성을 살리는 그래픽적 방식은 실재성이 결여된 자연의 양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송명진의 그림에서 식물을 뽑으면 뿌리나 흙이 아니란 구멍, 또는 찢어진 평면 등이 드러난다.

그것은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계이다. 클론 덩어리처럼 보이는 이상한 식물들은 원본이 없는 동일한 복제이다. 시뮬라크르는 표상이나 재현이 아니라, ‘육화된 것, 감정과 물질성’(들뢰즈)이다. 미셀 카미유는 [시뮬라크룸]에서 들뢰즈를 인용하면서 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작고 자신과 유사성을 갖춘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신의 이미지는 유지하고 있으나 유사성은 잃어버렸다. 인간은 시뮬라크르가 되었다. 요즘 작품에 나타나는 손가락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다. 송명진의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은 원본과 복제 사이의 가능한 위계를 부정한다. 이렇게 와해된 재현의 공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재현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재현의 체계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드문드문 분포된 고립된 섬이 되는 것이다,

‘공간으로 말하자면 공통면을 갖고 계획화되며, 운동으로 말하자면 공통의 극을 갖고 중심이 정해진 전체’(세르)는 사라진다. 카오스는 하나의 열린 공간이다. 여기에서의 전진이란 계량되지 않고 갈림길처럼 묶인 미지의 대지에서의 이동과 같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 몸이 속해 있는 3차원 공간에서의 이동과는 다르다. 그것은 측량과 노동과 이동의 공간, 즉 어떤 투영적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공간과 다양체들이 교차하고 연결되는 지점이다. 송명진의 그림에서 갈라진 틈 위로 한없이 다시 나타나는 평면들, 그리고 그 위로 솟아난 다리는 어떤 불연속을 연결하는 수단처럼 보인다. 현대회화는 현실의 유일한 공간을 벗어나, 복잡한 연결 지점들을 구성하고자 노력해 왔다. 손으로 그리기란, 손가락으로 조정할 뿐인 기술 세계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닫혀있고 격리된 요소들 사이를 매개하는 활동인 것이다.



이선영 | 미술평론가






curator 이원곤 - artist 정정주


장소의 표류, 그리고 편재하는 시선




실물의 수십분의 1의 크기로 만들어진, 유리와 화강암의 벽을 뒤집어 쓴 듯한 빌딩과 환하게 조명이 밝혀진 실내. 누군가 이 곳에 와서 눈길을 준다면, 그는 이미 이 작품이 발휘하는 마법의 그물에 걸려든 셈이다. 이 건물은 하나의 ‘모형‘이 아니라, 리얼한 가상임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가상세계의 입구에서 관객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프레임이나 경계가 아니라, 관객 자신의 ’상대적으로 거대한’ 신체이다. 관객이 진입하지 못하는 그 내부는 하나의 ‘미지의 영역’으로 현실의 저편에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정주가 연출하는 그 곳은 거의 실재하는 어떤 ‘장소’이다. 그것도 쇼핑센터, 미술관, 편의점, 서대문형무소, 덕이동 로데오거리와 같은, 우리들 사이에 일정한 기억이 공유되거나 문화적인 아이덴티티를 지닌 장소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장소들은 여전히 낯설고, ‘투명하고 기능적인 공간’ 그 이상은 아닌 듯하다. 누구나 한밤중의 공공건물 등에서 이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있을 듯싶다. 그곳은 그냥 추상적인 공간일 뿐이다.

캐나다의 인문지리학자 E. 렐프(Edward Relph)는 ‘모든 장소가 겉모습뿐 아니라 분위기마저 동일화 되어버려서 개성이 없어 보이는, 그래서 피상적 경험밖에 주지 못하게 되어버릴 만큼 장소의 아이덴티티가 약해져 버리는 것’을 ‘몰장소성’(placelessness)이라고 했는데, 정정주의 이 텅 빈 장소들이야 말로 원래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하고 부유하는 것 같다. 모든 기억과 삶의 증거들이 증발해버린 중성적인 공간만이 관객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원래 실재하는 장소들이 아니었던가? 이 몰장소성과 표류(漂流)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원래의 장소들에서? 아니면 작가가 제작한 이 작품에서?
그런데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핀홀카메라는, 이 장소의 문제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전개시켜 버린다. 마치 소인국에 온 걸리버처럼, 그 장소를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반대로 그 거인을 바라보는 소인(小人) 혹은 사물의 내면의 눈으로 비추어져서 화면에 투사된다. 이처럼, 건물의 바깥과 안에 있는 두 세계가 서로의 시선을 교차시킴으로서, 주체와 객체, 아울러 가상세계와 관객이 서 있는 현실세계의 역전이 시도되고, 우리의 감각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미궁에 빠지고, 그 '현실의 저편'은 뮤즈가 깃드는 곳, 즉 뮤지엄(museum)이 된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시선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스타일의 리얼리티이다.

누군가 도시의 고층빌딩들을 일러 ‘벌거벗은 건축’이라고 했었지만, 현대도시는 그야말로 은폐되지 않은 투명한 공간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그리고 최신의 미디어환경, 그 속에서의 시선은 이미 어떤 감시시스템을 초월한 것이 되었다. 지금은 도시 어디에나, 그리고 대부분의 시민들의 손에, 카메라가 있으며, 그것들은 금새 연결될 수 있다. 보는 이의 시선을 특권화하는 것이 이전의 미디어였다면, 시선이 어디에나 편재하며 얽혀가는 지금은 그런 특권적인 시선도 점차 불가능해지고 있다. 휴대전화, GPS, RFID 그리고 지금 국가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USN(Ubiquitous Sensor Network)와 같은 정보체계에 의해, 바야흐로 ‘사물들조차도 나를 바라보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정주가 연출한 이 리얼한 가상세계는 이처럼 생소한 시선에 의해 현실로 피드백 된다. 비록 실재하는 장소를 옮겨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현실과의 연결고리일 뿐, 그가 노리는 것은, 관객들에게 그처럼 ‘투명한 마법과 같은 현실’에 대한 자각을 촉발하는 것인 것 같다. 마치 로데오거리에 내려앉은 비행접시처럼. 그것이 상업적인 연출의 결과이든, 아니면 우리가 처한 리얼리티의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든.


이원곤 | 단국대 교수(미디어예술론)





PROPOSE 7 (vol.2)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미술창작스튜디오, 금호미술관 공동기획
전시일정 : 2007. 6.28(목)~7.22(일)
전시장소 : 금호 미술관 전관
개 막 식 : 2006. 6.28(목)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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