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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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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로운 몽상적 표현주의자 정일(鄭一)

평론가 이재언

........“잘 가, 이제 내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세상을 잘 보려면 가슴으로 보아야 한다는 거지. 제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 “네가 그 장미꽃에 바친 시간 때문에 그 장미꽃이 그렇게 중요하게 된 거야.”........(셍떽쥐뻬리, <어린왕자> 중에서)

가슴으로 세상을 보고자 한 작가 정일은 셍떽쥐뻬리 <어린 왕자>의 화신과도 같은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읽은 이 책이 사색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하면서도 꿈꾸기를 좋아하는 소년 정일을 화가로 만들었다. 또한 어린 왕자처럼 백설 같은 순수함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주옥같은 이야기들이 바로 그의 그림이기도 하다. 어쩌면 아직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어린 왕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그의 그림인지도 모른다. 그의 화면은 온화하고도 감미롭기가 그지없으며, 꿈꾸기를 권유하는 동심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각박한 현대를 살면서 메말라 가는 영혼에 촉촉한 단비와도 같은 작품세계를 일구고 있는 것이 작가의 그림세계이다.
그의 작품세계에서는 무엇보다 풍부한 시적 상상력과 섬세하고 예민한 회화적 감각이 돋보인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사랑, 행복, 평화 등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피아노, 바이올린, 꽃병, 새, 촛불, 테이블, 장 등의 사물 이미지들 각각이 사소하고 소박한 일상적 이미지인 것 같지만, 유심히 보면 동화적이고 삽화적인, 그러면서도 다소 이상화된 아이콘들임을 알 수 있다. 화면 속에 등장해 있는 왕자와 공주의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들에서 보듯, 작가의 그림은 보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간직한 아픈 기억들조차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신비감이 느껴진다.
작가는 거칠고도 두터운 마티에르를 통해 발산되는 안정된 형상성, 그러면서도 솜사탕같이 감미롭고 화려하고 우아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감미로운 몽상적 표현주의자이자, 이지적인 초현실주의자이다. 작가는 ‘흰색의 마술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흰색을 신비스럽고 우아하게 잘 구사한다. 작가가 다양한 색을 구사하면 하는 대로 성취도가 좋은 이유도 바로 흰색의 무채색이 몽환적이고도 환상적인 그림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슐라르를 떠올리는 촛불이 있는 장면 속에서 내면의 에너지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질 수 있다. 수많은 사물의 이미지들이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열려 있기는 하나, 작가는 절제된 승화에 역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이미지들도 어쩌면 물질적 상상력을 위한 모종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마티에르가 대단히 두터운 것도 교감의 깊이와 상상의 밀도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보이지 않는 가슴 속의 것을 전하고자 하는 어린 왕자는 수다스런 말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를 고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화면이 동심을 반영한 동화적인 양식이면서도 어른들이 더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잃어버린 꿈을 회복하게 하는 힘 때문일 것이다. 향수를 자극하는 작가만의 신비스런 색조의 흡인력도 흰색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작가에게 최근 변화라 할 만한 움직임이 보인다. 우아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작가의 색채 감각은 최근 들어 보다 대담하고 강렬한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행복한 꿈꾸기의 테마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화면은 보다 강렬한 색감으로 내면의 감정을 표출하는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그림을 그림답게 그린다. 오늘의 복잡다단한 예술적 상황 속에서 때때로 그림은 강한 정체성 불안에 시달리곤 한다. 오히려 그림답지 않은 것이 더 그림처럼 행세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그런 시류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충실해야 할 그림은 결국 자신의 인격이 그대로 반영되고 투영되는 그림임을 확신하고 있다. 붓을 쥔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가가 그림의 생명력과도 직결된다. 작가의 그림이 정적인 듯이 보이면서도 생기로 가득한 것도 바로 붓의 감각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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