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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이라는 도자기의 실용적 측면과 감상적 측면을 태토를 올리듯 표면을 처리하고 상감으로 파내는 실험적인 방법으로 도자기를 조형화하는 오관진의 개인전
비움과 채움한원미술관에서는 가을을 맞아 초대전 “비움과 채움” 오관진 전시를 기획하였다. 오관진은 비움과 채움이라는 도자기의 실용적 측면과 감상적 측면을 태토를 올리듯 표면을 처리하고 상감으로 파내는 실험적인 방법으로 도자기를 조형화 한다. 달항아리, 막사발 등 오랫동안 그 아름다움의 격과 아우라를 획득한 고전적인 모티브들을 끌어와 체리와 같은 이국적인 주제와 결합시킨다. 음영이 처리된 항아리, 화면밖으로 나오는 체리, 한지에 황토물을 들인 시골집 뒷방 내음새를 담은 바탕처리 등은 서양화와 동양화의 경계속에서 작가의 독창적인 실험성이 돋보인다 하겠다. 작가의 화면 속에서 맞닥뜨리는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달항아리는 한민족과 함께해온 시간과 그릇 속에 담아온 삶의 이야기들을 살아 숨쉬듯 분출하고 있다. 이것이 오관진 화면의 생명력일 것이다. 본 전시는 작금에 부활하는 달항아리의 익숙하지만 생경한 화면을 통하여 한국도자가 현대미술이라는 시대를 입고 회화로 태어나는 감동의 시간을 전해줄 것이다. ■
박옥생 | 미술평론가
선繕과 선鮮으로 빚어 공空을 짓다
-작가 오관진의 예술세계에 대한 소론홍경한 | 미술평론가,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1. 그의 작품에 있어 소재의 친근함과 높은 인식력은 낯섦을 적게 하고 시각적 불편함을 희석시킨다. 사실적인 재현을 거쳐 ‘채움’을 강조하되, 형상성을 가미한 조화(遭禍)를 새롭게 추구함으로써 되레 비움을 은유하는 방식은 누가 봐도 오관진의 작품임을 증명하는 요소이다. 이외에도, 인내와 치밀함을 요구하는 묘사의 주체, 넓게 분포된 여백, 서정의 여운과 함께 리얼리티를 증좌 하는 매화를 비롯한 식물의 가지와 꽃잎 등의 부수적 사물들은 그의 작품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코드로 적절하다. 특히 화려하고 장식적인 겉멋 보다 우선하는 사색의 기운, 군더더기 없는 단아한 형상들은 화면을 부유하는 정적인 기운과 더불어 그의 작품을 특정하게 하는 이유로 남는다. 하지만 장황한 설명을 밀어낸 자리에 들어선 고요한 여운과 포근한 미감이야말로 시지각성을 이탈할 때 느낄 수 있는 오관진 작품만의 맛스러움이다.
사실 공간까지 함유한 채 관자의 마음을 거부감 없이 동화시키며 독립된 주체로 안착되어진 그의 그림 속 생경하지 않은 이미지들과 사물 간 대비가 강한 색감, 서정의 미를 내포한 공간 등은 작가 오관진의 예술세계를 잘 설명하는 언어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오관진 작품에 변별성을 부여하는 요인은 대상의 익숙함이나 물파적 필치, 조화로운 구성 등이 아니다. 필자는 작가의 작품을 차별화하는 요소로써 소리(音)를 꼽는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는 유약의 크랙(crack)마저도 놓치지 않는 정밀함과 자유롭게 운용되는 필의 기세를 뚫고 올라오는 나지막한 음(音)이 존재한다. 모든 잡음을 끊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그 파동의 진원지는 청아한 형색의 도자가 아닌, 그 너머 시각적 범주 외계에 놓여있다. 소재가 매질(medium)이 됨에 분명하고 일종의 ‘공진현상’을 일으키는 촉매(catalyst)임에 틀림없으나 정작 음의 발원은 작가에 의해 새겨지고 그려지거나 파각(破却)될 때 드러나는 예술적 행위에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화자의 주체적 성품, 즉 인자(仁者)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명징한 소리를 완성하지 못한다. 그림이란 필시 특별한 구성 요건내지는 필연적 조건을 수반해야만 하는 터, 근본적으로 목적물과 성징을 달리하는 여백(餘白)이 빚어낸 여운(餘韻)이나, 인식과 궤를 달리하는 여감(餘感), 오랜 화두인 채움과 비움을 받드는 조형적 개념 등과 교합(交合)할 때 비로소 올곧이 제 음을 낼 수 있게 된다. 객체화 된 사물들의 조화로운 구성을 터전으로 한 관자와의 합일, 여기에 인성(人性)의 맞울림이 파생될 때에야 진정한 음을 발할 수 있다. 우린 이를 흔히 ‘공명(共鳴)’이라 부르며 이를 원만하게 드러내고 있는 오관진 작품의 가치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출발한다.
2.미처 빚다 만 듯한 투박한 막사발, 기품을 함유한 세련미가 일품인 분청사기에서부터 세상의 모든 넉넉함과 온유함을 끌어안은 달 항아리까지, 그동안 작가 오관진이 선택해온 소재들은 그것자체로 특유의 ‘울림’을 내재한 것들이었다. 비움으로써 채우고 채워짐으로써 비워내는 공진의 과정들은 과거 전통적인 채색화나 필묵만으로 생의 서사를 읊던 작품들에서는 물론 현대적으로 번안된 오늘날의 실험적인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만 작금의 울림 속엔 지난날과는 확실히 다른 층이 있다. 우선 삶에 대한 깊이를 통찰하는 명상(冥想-울림의 범주가 확장되었음을 나타낸다)이 한층 강화되어 있으며, 보편적 미의식과 한국적 정서를 투영하고 있음을 목도(目睹)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땐 전통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맥락을, 또 다른 시점에선 동시대 미술에 있어 요구되는 예술가적 자세(장인적 기질을 고수해온)에 대한 과 미술적 가치에 대한 환기가 깃들어 있다. 나아가 근작들의 경우엔 기 언급한 공명이 얹힌다. 거칠지 않으며 억세지 않고 모나지 않게 질박한 소재와 교집합 된 이 공명은 작화의 인성을 배경으로 진동이 되어 감동의 여울을 만들고, 감성의 기폭제가 되어 타자의 심상에 보다 강하게 각인된다.
이 지점에서 오관진 화력의 구분은 앞뒤를 달리하게 된다.
현시점에서 작가 오관진의 작품들은 영구적 항존성의 재음미라는 하나의 개념적 본류와 그것을 지탱하는 다양한 기법과 같은 여러 갈래의 회화적 지류를 통섭하고 있다. 선행되고 있다 규정되어지는 것은 고정적이고 상투적인 장르의 벗어남이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그림들은 회화이면서도 반부조이고, 극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이며, 실경이지만 관념적이기까지 하다. 보이기에 인식력이 높아 구상성이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심상으로 받아들인 인간 근원의 풍경을 서술적 맥락 아래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단지 눈에 보이는 묘사라든가 재료나 기법의 탁월함을 수반한 ‘드러남’에 한정하지 않고 있음을 유추토록 한다. 따라서 오관진의 작업을 관통하는 속성이 외적인 변주나 가시적 표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보편적인 경향과 단편적인 습속으로 비평하긴 어렵다는 필자의 판단을 지지케 하는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3.필자는 오관진의 작품에 개괄되어 있는 표출언어들을 관념으로 포박(捕縛)할 경우, 두 개의 ‘선’으로 함축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중 첫 번째 언급해야할 선은 기울 선(繕)이다. 엄밀히 말해 이 선(繕)은 오관진의 작업 경향에서 유추할 수 있는 실험성을 근간으로 한다. 그는 무언가를 깊거나 손보아 고치듯이 특정적인 장르의 룰을 벗어나면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 왔음이 사실이다. 회화적 표현 방식에 있어 쉽고 빠르며 편한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미술의 가치 중 일부는 엄연히 수공적인 특질에서 비롯됨을 믿기에 손수 공들여 그리고 상감기법으로 화면을 분할해 채우면서 물질의 실체성은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것, ‘들리지 않으나 들을 수 있는 것’에 대해 탐미해왔다. 그리고 이 결과는 구체적으로 서두에 언급한 공명으로 환원되는 수순을 밟는다.
이러한 표면적 특징들, 그 영향으로 일궈진 심성의 감화(感化)와 공명의 치환만으로도 그의 그림들은 ‘미술’로써의 존재성을 확인시키고 미의식을 재고토록 하는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작가는 단순히 질감을 구현하고 형태를 재현하는 등의 거죽만이 아닌, 그 속에 담겨진 의미와 정신에 선(鮮)의 방점을 찍는다. 이에 필자의 눈에 비친 또 하나의 선은 외부의 이미지와 내부의 메시지를 포괄하는 고울 선(鮮)이다. <채움과 비움> 시리즈를 비롯한 <봄>연작들, 그리고 <바람이 일다>, <향을 비우다> 등의 대표작에서 인지할 수 있듯, 작가는 주요 소재인 도자기들을 통해 진솔하고 덤덤하나 실용적이면서 무위(無爲)했던 우리네 선조들의 지혜로움과 정서를 아름다운 형상 아래 오롯이 작품 속으로 끌어다 놓는다. 도자 고유의 매끈한 유기질감, 거친 손길로 빚어진 소박함, 전통적 맥락 아래 구현된 문양, 작금의 세태에선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정(情)마저 화면에 이식해 놓는다. 여기에 그는 참다운 선이랄 수 있는 인성의 본질까지 수용함으로써 ‘관용’과 ‘포용(包容)’이라는 감쌈의 실천을 행하고, 삶의 지향에 관한 철학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오관진의 작품들은 즉시각적인 반면 매우 감각적일 뿐만 아니라 서정적이다.
4. 외부의 이미지와 내부의 메시지를 포괄하는 선(鮮)은 근래 들어 공명의 수위를 건너 공(空)이란 개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말은 선이 이해와 행동으로 정신적인 의미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공은 공명을 발판으로 한 의식의 실천이랄 수 있음을 뜻한다. 작가는 어떤 형태를 만들고 그것에 여러 현실적인, 혹은 시공의 잔상이 남긴 의미들을 덧씌우지만(2차원적인 타블로의 형태를 크게 이탈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형식을 통해 직관적인 지력위에서 활성화 되어있을 뿐 그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그 속의 ‘비어있음’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그런 차원에서 차라리 그의 비움이란 어떤 의미를 존립하고 있음을, 함유하고 있음을 역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실제로도 그는 <채움과 비움>을 포함한 많은 연작에서 체감할 수 있듯 덜어내고 거둬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되레 포용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어쨌든 복합적으로 자리한 ‘선’은 오관진 작품을 가장 명료하게 정의하는 단어이며, 또한 공은 그의 평소 가치관을 상징하는 관념의 기호이자 차후 나아갈 미의식의 방향성을 일러주는 조타임에 분명하다. 물론 선과 공을 잇는 것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의 그림들, 그리드(grid)처럼 혹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킨 여러 내외적 의미들을 포섭하는 실질적인 매개인 그림이다. 그것이 비록 소재의 리얼리티나 동양화라는 일반적 견해에 천착할수록 독해의 요령을 체득토록 하고 가끔은 선문답처럼 질문을 던져 그 답을 찾아야만 하는 타자는 수고스러움을 거치긴 하나 ‘교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작화의 의도와 의미는 익히 상호 교환적이며 소통은 이미 충만하게 다가온다. 이에 필자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읽어내 깨달을 수 있는 그림, 치렁한 군더더기에 준하는 말과 문자는 별 효용성을 갖지 못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같은 그림이 오관진의 작품들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