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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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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가든 Plastic Garden(塑料公園)

  • 전시분류

    단체

  • 전시기간

    2010-08-07 ~ 2010-09-12

  • 참여작가

    김기라, 노상균, 문경원, 박성태, 배영환, 백현진, 이세현, 이용백, 이형구, 정수진, 정연두, 진기종, 최정화, 함진(16명),구본창,전준호

  • 전시 장소

    중국 상하이 민생현대미술관 Minsheng Art Museum

  • 문의처

    021-6282-8729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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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 가장 밀접했던 양국의 수 천 년에 걸친 문화교류를 민간차원에서 복원하고, 양국 현대미술의 공통분모와 독자적 발전 양태를 가늠해 보고자 기획되었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국은 정치-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서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한국의 남북분단과 중국의 공산화는 수 천 년간 지속된 양국의 교류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50여 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수 천 년 간 지속된 양국의 교류사를 통틀어 이 시기만큼 완벽하게 양국의 교류가 차단된 시기는 없었다. 하지만 1992년 양국의 외교관계가 복원된 이후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를 급속히 확대되었고, 이제는 그 가시적인 효과가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 극동아시아가 겪은 근현대사의 복잡한 질곡을 생각할 때 21세기 초반의 이러한 화해와 교류는 미래를 위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한동안 ‘먼 나라 이웃나라’ 일 수 밖에 없었던 두 나라가 이제는 가까운 이웃으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문화적으로 가장 밀접했던 양국의 수 천 년에 걸친 문화교류를 민간차원에서 복원하고, 양국 현대미술의 공통분모와 독자적 발전 양태를 가늠해 보고자 기획되었다. 비록 중국과 한국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상반된 이데올로기 속에서 20세기 후반을 보냈지만, 1980년대 이후 양국은 모두 개혁 개방을 통한 억압적 이데올로기로부터의탈피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에 녹아있는 다양한 개성과 현주소를 균형감각 있게 바라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1987년은 중요하다. 근 25여년간 지속되던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복원된 해이기 때문이다. 곧 이어 1988년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은 한국민에게 경제적 자신감과 민주국가의 시민이라는 정치적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이벤트였다. 그러나 1989년의 동서독 통일과 구소련의 해체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는 한국 지식인층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던진다. 민주화 운동의 주도 세력이었던 비판적 지식인 계층이 사상적 구심점을 상실한 것이다. 이러한 혼동의 와중에 한국은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더 이상 ‘사회적 정의와 정치적 전위’는 사라지게 된다.

정치-경제-사상적 무력감이 전 지식인층에 만연했다. 그들에게는 기댈 수 있는 사상적 거점도, 현실을 비판할 열정도, 또 이를 떠받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강한 신념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신경증적 강박이나, 무력한 자기위안적 판타지나, 아니면 거기에서 비롯된 엉뚱한 공상과 수다가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1902 ∼ 1968) 의 말을 빌자면 ‘작품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책임의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가치들은 더 이상 그들로 하여금 작업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다. 실재의 열정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의 삶과 거기에서 피어나는 문화는 동물화된 삶이며 동물화된 문화이다. 동물화된 삶은 계몽을 요구하지 않고, 동물화된 취향과 에토스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 의해 보장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이러한 정치-사회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1990년대부터 진행된 이러한 현실적 무력감과 정신적 공허를 Plastic Garden 이라는 주제 아래 묶어보았다. 물론 한국 미술계에는 다양한 경향이 존재하지만, 현재 한국현대미술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작가들의 사유는 이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다시 한번 이 전시에 대한 나의 의도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1980년대 말 동구권 붕괴의 이념적 충격, 1997년 외환위기 등을 거치면서 사회적 정의와 정치적 전위가 사라지고 무력감이 지식인층에 만연했던 한국의 사회적 변화가 전시의 동력이 된다. 이 전시는 그래서 한국 현대미술의 성취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담론이 무너지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투기장처럼 변한 한국의 사회상을 겉포장만 요란한 인공 정원으로 가정하고 이에 대한 작가들의 열패감, 허무감 등을 담고자 했다. ‘서구 주류미술계와 대등한 성취를 이룬 한국 작가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그런 ‘자랑스런’ 수출용 전시가 아니라,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동료작가들의 고민들을 속살 그대로 내보이고 싶었다.

이세현의 작업은 전국이 투기장으로 변한 한국의 국토를 동양 전통 그림의 원근법인 3원법에 바탕한 붉은색 산수를 풀어놓은 뒤 그 위에 핵폭발, 거북선 등의 군함, 땅을 개발하고 파괴하는 참상들을 그려 넣고 있다. 전 국토가 성형수술(plastic surgery)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예뻐지고 행복해졌는가? 그의 (붉은 산수_Between Red)는 넓게는 현대 문명, 가깝게는 현 정부의 4대강 개발 등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해석의 여지를 폭넓게 열어놓고 있다.



함진의 설치 조각 작품인 (폭탄 위의 도시)는 2006년도에 제작된 것인데 요즘 보니 재미있다. 실물 사이즈의 폭탄 위에 미니어쳐 도시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전체가 이런 상황이 아닐까? 그 위에서 아파트 한 평이라도 더 늘려보려고 바둥거리는 내 모습이 보인다.

정연두의 설치 영상 <식스포인트 Six Points>는다민족 사회인 미국 뉴욕의 6개 나라 정착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인도, 중국, 한국계 등의 소수 민족 사람들이 각기 그 나라 말과 기묘하게 버무려진 영어로 자기네 삶을 소개하는 이 영상에서 미국이면서도 미국이 아닌 인공 다민족 사회의 단면들이 드러난다. 뉴욕이라는 미국의 핵심부에 존재하는 코리아 타운이나 러시아 타운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 미국의 가치’가 허구와 인공의 조합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디자인-아트-건축을 넘나드는 최정화의 작업은 결핍에 기인하기보다는 풍요와 잉여, 배설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대량생산으로 넘쳐나는 대중 생필품이나 기물들을 가져와서 이리저리 끼우고 맞춰서 전혀 엉뚱한 것들로 변형시킨다. 마치 채플린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어린이들이 사회적 고아이듯이, 그는 사회적 생산의 잉여물이나 부산물들 친자식 보듯 정성을 다해 보살펴서 번듯하게 우리에게 내보인다.

배영환의 작업도 어떤 맥락에서는 최정화와 일맥상통한다. 그의 선배가 온전한 잉여를 매끈하게 다루는 것과는 달리 그는 매우 시니컬하고 파괴적이고 개념적으로 폐허의 미를 구축해 나간다는 점이 다르다.



이형구는 가상의 애니메이션 주인공인 톰과 제리에게 영원히 부재할 수밖에 없어 보이는 실재를 열심히 만들어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과 작가의 관계는 서양동화 속의 피노키오와 할아버지 사이의 관계와 같다. 다만 그가 피노키오의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인자하고 보수적인, 단순한 생활패턴과 사유구조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진기종은 한 술 더 떠서 생명까지 조작할 수 있고, 우주로까지 확장된 첨단 기술이라는 것들을 우리가 얼마나 쉽고 단순하게 제작할 수 있고 조작할 수 있는 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조잡한 수공 작업으로,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세트로 만들어서 그것들이 방송매체를 통해 어떻게 그럴듯한 영상 이미지로 제작되고 조작되는 지를 보여준다.

한편 김기라의 비디오 설치 작품은 실존적 자아의 근거를 추적하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에 빈번히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나 정신지체, 장애인은 그의 존재적 결핍의 상징적 대리자이다. 특히 그의 비디오 작업 (29th floor)에서 보여지는 죽음에의 집착은 작가 존재 자체의 죽음이 아니라, 결여된 자아만을 도려내서 없애려는...살풀이의 과정으로 보인다.

문경원의 비디오 작업은 김기라에 비해서 아주 온건해 보인다. 작가의 최근작은 마치 고승의 다비식을 대하듯 남대문 환생을 염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실재의 부재와 영원히 부재할 수밖에 없는 실재 사이의 간극, 그 구체와 추상 사이를 작가의 비디오는 반복적으로 looping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준호의 영상작업은 항상 정치-경제-문화적 상징과 은유들로 가득 차 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지극히 고된 노동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비판적 시각들이 기념비적인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성태의 작업은 그 재료와 방법론에서 문경원과는 다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하다. 다만 그는 익숙한 손 맛과 기념비적인 형태를 통해 실존과 부재의 간극과 모순을 얘기하고 있다. 수묵화에서 출발한 그의 여정이 종이부조, 도조를 거쳐 최근에는 설치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백현진은 우선 유명한 가수다. 나는 그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의 드로잉과 페인팅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목소리가 화면에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수진 회화라는 공통분모로 작업을 하지만 현기증이 날 만큼 이미지들의 연쇄로 기진맥진할 때가 많다.

구본창의 사진 작업은 매우 사적이고 내밀하고 부서지기 쉬운 공간과 감성들로 가득하다. 버려진 공간과 작은 사물에 대한 작가의 배려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면 가슴 끝까지 벅차 오르는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노상균작업을 볼 때 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관념화되고 맹목적인 타자와 마주하고 있는 한 실재하는 어떤 타자에게도 다가갈 수 없다는 역설이다. 불교라는 세계 종교의 절대신 앞에 선 나는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나? 인간이 만든, 노상균이라는 작가가 만든 작품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절대선의 현현으로 봐야 하는지 나는 매번 헷갈린다. 절에서 본 부처상과 하나도 안 틀린 조각 작품을 매번 전시장 안에 모셔다 놓는 작가 앞에 나는 질렸다.
이용백의 (피에타)는 한 거푸집에서 나온 조각 쌍이다. 조각에서 거푸집은 버리고 알맹이만 작업에 쓰이지만 이용백은 거푸집을 버리지 않고 그 모태로 다시 돌려놓는다. 죽은 자신을 안고 있는 자신이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에 대한 것에서부터, 주체의 자기 애증까지...이런 많은 얘기들을 한 작품에서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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