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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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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태적(非擬態的) 몸


김최은영(미학, 자하미술관 책임큐레이터)


고유한 신체의 위치는 깨지고, 운동성은 변이되었다. 밀고, 당김, 확장과 소멸로 인해 구성(構成)의 몸이 가지는 기존 개념은 전복된다. 최영빈이 제시한 몸, 그리고 몸짓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편의 그것이 아니다. 돌연변이나 잡종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 공개적으로 괴상한 몸과 몸짓은 대부분 머리를 상실한 모양새다. 


틀림없이 의도된 머리의 거세는 시각적 기괴함 이전에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추상적 심상을 드러내는 기관인 ‘눈’과 ‘입’을 통해 구현되는 단언들로 부여된 정체성을 거부한 것. 거세라는 의식을 치를 정도로 기존의 명제를 뒤집어 최영빈이 새로이 명명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먼저 보편이란 단어에 의문을 던지는 그다. 보편(普遍). ‘널리 그리고 고루 미치다’라는 규정된 언어는 스스로 한계상황을 갖는다. 구획되지 못한 채 애매모호한 범위의 이 단어로 인해 많은 주체들은 지각 이전에 객관적 사고라는 틀에 얽매이고 만다. 때문에 보편의 부정으로 시작한 최영빈은 사회라는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규격에 행간적(行間的) 사유를 거세된 머리의 몸을 통해 시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언어는 동시대인에 있어 비교적 정확한 소통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추상적이다. 하물며 구조가 변이된 최영빈의 몸과 몸짓은 더욱이 추상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추상적 몸이라는 동일어를 놓고 전자를 의태적(擬態的) 몸, 후자를 비의태적(非擬態的) 몸이라 칭해 본다. 의태적 몸이란 대상의 크기나 윤곽을 묘사한 몸짓이나 기쁨과 분노 등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출한 눈빛 혹은 손을 모양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상식이나 상징을 벗어나 도무지 현실성 없는 최영빈식 몸의 구조는 해석이 불가하다. 그러므로 의태(擬態), 형상을 모방하는 것은 더 더욱 불가하니 그가 창조한 몸에 대해 비의태적이라 일컫기로 한다. 


최영빈이 창조한 몸은 종종 놀라운데 그 까닭은 기괴한 형태만이 아니다. 드라마적 요소를 담고 있던 지난 개인전의 배경이 대부분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뚱이들은 아직도 극적(劇的)이다. 적절한 특징을 잡아낸 신체의 싸인(Sign)들은 중요한 내용을 강조하는데 주력하며 화제(話題)를 제시한다. 스스로 위로하는 법을 터득한 듯한, 손으로만 구성된 몸. 뒤로 꺾인 어깨의 몸뚱이는 사실이 아닌 실존을 묘사함으로써 별다른 무대장치 없이도 상황을 설명하고 배우 없이도 애잔한 감정을 드러낸다. 또한 마젠타(Magenta)류의 색감은 마치 조명의 간섭으로 변색된 인체 색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더욱 극적인 것은 카메라 뒤에 숨은 작가로 짐작되는 작위의 노출은 관음증을 어렵지 않게 유도하는데 이는 뻔한 훔쳐보기가 아닌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관찰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듯한 구성력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서 여기까지 읽을 수 있었던 단초는 무엇보다 화면을 구사하고 있는 아카데믹한 회화작법이라 하겠다. 난필(亂筆)에 가까운 그의 사유를 비의태적 몸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으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외계어가 아닌 충분히 해독 가능한 철자를 사용한 것이다. 또한 액자소설류의 연작 중 친절하게 등장한 한 두 작품은 이번 개인전의 전체적 흐름을 읽게 해주는 지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최영빈은 그림을 그리기 전 혹은 후에 이야기를 만들고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그리기와 글쓰기. 그러나 쉽게 짐작하면 안 된다. 두 가지 모두 최영빈식 창작일 뿐, 그 무엇이 주이거나 부의 역할로 나뉘지는 않는다. 그리고 소설이 반드시 선행되어 배경이 되진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야기든 이미지든 선후가 없이 떠오른 창작을 먼저 진행했을 뿐이다. 다만, 그의 창작은 대부분 신나는 흥(興)의 아름다움이나 순간적 감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출 또는 폭발한 듯한 그의 작업은 일시적인 감정의 반응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여러 단계의 정리를 거친 후 표현된 것들이다. 언뜻 보면 거친 화면 표현은 실상 침착한 붓질과 구성력으로 메워져 있고 비의태적 몸을 사용했으나 정확한 근육의 묘사와 살깟의 긴장감은 작품에 임하는 몰입과 응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영빈이 ‘애잔하다’라 고백하기 이전 적어도 필자는 그의 작업에서 이미 아련한 몸짓을 읽을 수 있었다. 말로 대상화되어 규정되는 정체성과 주체성을 피해 진정한 자아와 실존 찾기를 위한 숨기거나 틀어막은 입, 그리고 사라진 얼굴은 오랜 세월 내면과의 치열한 싸움을 겪었을 작가의 심상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내면과의 싸움에서 쉽게 패하거나 외면한다. 그 과정이 절대로 즐겁지 않기 때문이며, 최영빈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몽땅 까발리길 원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그가 사용한 비의태적 몸의 언어로써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 아닌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치열한 내적 관찰 후 얻어진 평정심과 위로를 전해준 작가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동의와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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