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아름다운 우리 옛 그림
1부, 한원미술관 소장품전 |
2010.12.30 - 2011.2.6
2부, 남정예 민화전 NAM JUNG YE 南貞禮 |
2011.2.9 - 2011.2.28
아름다운 우리 옛 그림전에 부쳐
박옥생|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남정예 민화전-현대 민화의 창작에 관한 범본(範本)'민화'라는 용어는 막살발과 같은 조선의 민예품에 깊은 감동을 받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인들이 그린 소담한 그림을 보고 일컬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야나기는 조선의 책거리 그림을 보고 '불가사의한 조선 민화'라고 감탄하였고, 리심(梨心)과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프랑스 대사 빅토르 콜랭 (Victor Collin de Plancy)의 수집품 가운데는 민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민화가 갖는 인간의 감성을 아찔하게 홀리는 환상적인 조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이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민화의 종류에는 단일 모티프를 주제로 한 책가도, 문자도, 십장생도, 화조도, 모란도 등과 고사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서술해 내는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 등 그 내용과 구성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가운데 모란도는 '궁모란병(宮牧丹屛, "嘉禮都監儀軌" 1627)'이라 하여 왕실의 결혼, 생일, 회갑과 같은 각종 잔치에 이미 사용되어 왔음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왕실에서는 송(宋)·(元) 대에 도상이 완성되고 계승된 모란도를 의식용·감상용으로써, 도화서를 통하여 궁중의 화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작해 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책가도는 청(淸)에 들어온 이탈리아 화가였던 낭세녕(郎世寧, 카스틸리오네)가 원근법과 입체감을 살려 책과 문방구를 그린 '다보격경도(多寶格景圖)의 양식이 조선에 유입됨에 따라, 18세기에는 왕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어 졌던 화목(畵目)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다양한 기원을 갖는 왕실의 그림들은 조선후기 사회의 금속화폐의 유통과 상품경제의 진전, 농업과 수공업상의 생산 확대로 인해 문화예술에 대한 욕구를 발생시킴으로써 민간으로까지 확산, 대중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 문화를 기원으로 갖는 일월오악병, 십장생도, 괴석모란도와 같은 치세(治世)와 국가의 안녕을 비는 문화는 더욱 더 강화되고 일반 되기도 하였으며, 처용상과 같이 벽사의 의미를 갖고 민간에 오래도록 그 기원을 형성한 그림들은 그 구성과 내용이 다양한 변주를 보이게 된 것이다.
민화의 지속되는 대중적인 인기는 즐거운 표현성과 현대인의 정서에 부합하는 조형적인 미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많은 작가들은 민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거나,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양식의 미술로 변형시키기도 하며 부분적인 모티프를 차용해 오기도 한다. 남정예 작가 또한 민화를 계승하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는데, 전통과 현대의 만남과 전통의 창조적 모색이라는 한국화 화단이 안고 있는 테제에 있어서 하나의 신선한 해결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상, 문인화, 불교회화, 민화와 같은 고전기의 그림들에 있어서 문인화는 중국에서 유입되었던 화보(畵譜)가 그리기의 배움의 시작이자 품평(品評)의 기준이었으며, 불교회화 또한 스승과 제자, 지역과 지역으로 전해졌던 초본(草本)으로 그 전통이 이어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민화 또한 내용과 구성에 있어 화본(畵本, 밑그림)을 떠내고 색을 입히는 것은 입문기 뿐만 아니라 숙련된 작가에게도 좋은 작품을 다시 재현하여, 고전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것도 하나의 창작 태도였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인화에서는 화목(畵目)에 "방(倣)000"라 하여 창작과 모방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였으며, 불화에선 새롭게 초를 만들어 낸 화사(畵師)에게는 출초화사(出草畵師)라는 별도의 존칭을 부여하여 종교화의 엄격한 도상의 전통을 깨고 높은 경학의 이해와 뛰어난 필력을 남다르게 구별해 주고 있다. 민화에서도 석강(石岡) 황승규의 '문자도'에서 보여주듯이, 상단에 초서로 내리쓴 화제(畵題), 중단에는 글자와 동물, 식물문을 결합한 획이 퉁퉁한 문자, 하단에는 책가도를 결합한 황승규식 3단의 화면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림과 문자가 결합되던 종래의 문자도를 글씨와 문자도와 책가도를 결합함으로써 강원도 문자도라는 하나의 회화적, 내용적으로 풍부한 양식으로 완성하고 문자도의 독창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회화가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구현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목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남정예 작가 또한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와 같은 스펙타클한 화면의 한 부분을 클로즈 업(close-up)하고 생략시키는 방식으로 '쌍학반도도(雙鶴蟠桃圖)'와 같은 심플하고 격조 있는 화면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이는 십장생도의 부분을 확대한 장송도(長松圖)에서도 작가 특유의 생략과 확대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책가도에서는 투시도법, 구축성, 상서로운 기물의 조합성, 회화적 공예미 등을 이용하여 색색의 책궤를 쌓아 올린다거나 좁은 화면을 응집하고 구조화하여 한층 더 복잡한 구조미를 선사하고 있는데, 이 또한 남정예 작가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사실 이러한 길쭉한 비례는 시선을 위로 당기고 시야를 시원하게 밀어주고 상승하는 맛을 보여주는데, 소나무의 표현이나 상승하는 책가도는 이러한 미감을 적극 살려낸 것이다. 은분, 금분으로 형상만을 그려낸 모노톤의 모란도 또한 남작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작가의 민화 화풍은 세련되고 모던한 맛이 있는데, 주제의 강조와 확대, 선(線)에서 느껴지는 볼륨과 율동감 또한 전통 민화의 미감을 계승하면서도 한층 현대적이라 하겠다.
사실, 민화의 매력은 조형성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표현성과 내용의 풍부한 상징성이라 할 수 있다. 민화의 상징성에 관한 연구는 1990년대 이후 "중국길상도안(中國吉祥圖案)"이 한국에 소개됨으로써 도상학적 의미들이 연구되고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강조되고 축적되어 온 은유(隱喩, metaphor)와 상징들이며 또한 이는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축적되어 온 범인류적인 원형(原型, archetype)들인 것이다. 이것들은 조합되거나 분해되어 민화가 갖는 특유의 질서 있는 단순미 안에 녹아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화가 조합과 구축, 분해와 응집이 자유롭고 다채로운 의미체들이 융합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의 통로가 다양하고 넓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민화의 상징과 구조적인 특징을 잘 이해하는 것은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자기 양식의 창출의 문을 열어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민화의 조형원리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창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남정예 작가가 이룩하고 있는 양식 또한 민화가 갖는 하나하나의 상징과 의미, 전통에서 구사하는 조형의 법칙들을 남다르게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화는 세계의 본질,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 그림으로써,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라 추상화된 그림이며, 정신적인 그림인 것이다.
어느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주는 깊이 사랑하고 응시하는 자에게 비로소 그 신비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의 본질을 관조하고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은 비밀의 방을 들어가는 것과 같이 작가의 놀라운 창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남정예작가가 이룩한 것이기도 한데, 남작가의 민화는 어눌한 맛이 갖는 조선민화의 단순하고 신선한 조형미와 궁중장식화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하고 세련된 격조 있는 미감이 미묘한 경계선에서 공존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렇듯 고전의 고루한 맛을 덜고 미니멀한 현대의 조형어법들을 대입하는 작가의 태도는 전통과 현대라는 경계에 있는 많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좋은 범본이 되고 있다 하겠다. | 2011.1
한원미술관의 우리 옛 그림들한원미술관은 18.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당대 화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18세기의 眞宰 김윤겸, 최북은 조선후기 실학의 대두와 조선중화사상에 힘힙어 우리 땅을 재인식하고 우리의 산천을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려내던 겸재 정선을 따르는 그 일파의 일원들이다. 정선파는 수직준(垂直皴)이나 단선점준(短線點皴)을 이용하여 높지 않되 오래되고 주름 많은 소담한 우리의 산천을 그려냈다. 이들은 주로 금강산이나 한강변의 명승(名勝) 고적(古蹟)을 그렸는데, 김윤겸, 최북 또한 그러했다. 한원미술관이 소장한 김윤겸의 작품은 높은 누각에 올라앉은 선비들이 멀리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풍경을 부감시(俯瞰視)로 그려내고 있다.
최북의 작품 또한 펼쳐지는 눈덮힌 겨울 한강의 모습과 주인 없는 텅빈 정자의 쓸쓸함을 잘게 자른 준법으로 그리고 있다. 사실, 18세기에는 겸재 정선을 필두로한 실경 산수화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던 고씨화보(顧氏畵譜), 개자원화원(芥子園畵譜)와 같은 화보(畵譜)류 들이 유행함에 따라, 중국 원·명대 유행하던 남종 문인화가 대거 그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겸재의 화풍은 탄탄한 남종 문인화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원미술관이 소장한 하산(霞山) 유치봉의 산수도 또한 명대(明代) 문징명 식(式)의 주산(主山)을 포치하고 근경, 중경, 원경의 순차적인 구성과 돌과 나무의 모습은 화보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세기의 작품으로는 오원(吾園)장승업의 유작도(柳雀圖)와 산신도, 파초도, 운룡도와 같은 민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19세기는 청(淸)으로부터 음영법, 투시도법과 같은 서양화법이 유입됨에 따라 한국회화사에 있어 어느 때보다 풍부한 회화의 모습들이 등장하는 시대이다. 또한 남종문인화의 인기와 유행은 실경 산수와 같은 진정한 우리 미술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하였지만, 추사 김정희와 같은 관념적이고 사의(寫意)적인 문인화를 일구었던 풍부한 유산(遺産)도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상공업의 성장으로 인한 전반적인 문화의 성숙과 중인사대부의 세련된 문화가 꽃피우게 됨에 따라,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장식미술이 서민층에게도 확대되고 대중화되는 결정적인 시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1800년대 중반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의,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各色) 그림 걸렸구나 보기 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과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며, 강남(江南)금릉(金陵) 경직도(耕織圖)며 한가한 소상팔경(蘇湘八景) 산수도(山水圖)도 기이하다'고 한 내용으로 보아 조선 후기 대중화된 다양한 회화의 수요와 유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민화풍의 영모화와 운룡도, 파초도, 산신도는 조선 후기의 민화의 유행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영모화(翎毛畫)의 사자, 코끼리, 원숭이의 사실적인 묘사는 김홍도가 그렸다는 흑구도(黑狗圖)와 같이 터럭 한올 한올의 사실적인 묘사와 정면에서 응시하는 신체의 단축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청으로부터 들어 온 서양화법의 유입으로 인한 화가집단들의 실험적인 새로운 화풍의 구현에 관한 호기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원미술관의 1820년대(嘉慶 年間)에 그려진 기호산신도(騎虎山神圖)는 해학적인 호랑의 귀여운 얼굴과 표정, 엄정한 산신의 풍모, 짜임새 있는 소나무와 배경의 구성은 조선후기 산신도 가운데 수작(秀作)이라 할 만 하다. 이처럼 한원미술관 소장품은 조선후기의 진경산수, 남종 문인화, 민화와 같은 다양한 미술의 양상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