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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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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토(撫土) 전성근 흙의 숨결을 읽어내다

전성근, 그와 한잔 할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의 맑은 눈 때문이다. 흔히 재주있는 사람들의 눈은 날카롭거나 차가웠다. 그는 수더분하고 털털한 성격에서 어떻게 저토록 치밀하고 정교한 작업이 나온단 말인가 

그의 작품에서 나는 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마신 술 한잔 덕분이다. 그래서 그 사람을 조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작품에 그것을 만든 사람의 성품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예리하고 복잡한 선과 면으로 되어 있음에도, 그의 작품은 순하다. 날카로움에 거부감이 많은 나에게 그의 작품이 순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을 보면, 그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고한 예술의 경지를 추구하는 양 꾸며 말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를 자만하지 않는다.

흙 맛이 좋고  깍는 느낌에서 기쁨을 맛보고, 흙이 자신을 속이지 않으니 그 속에 파묻혀 산다. 

때때로 흙은 냉혹하다. 자연(흙)의 이치(이성)를 거슬리면 어김없이 깨지거나 갈라져 버린다.

투각이 그래서 어렵다. 백자의 경우엔 더 어렵다. 흙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결들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조직을 마음으로 읽어내지 못하면 실패다. 어김없다. 그는 도자기를 만들기전에 목공예를 했다.  나무는 흙보다 딱딱하다. 딱딱한 대신 나무는 자신의 구조를 보여준다. 나무의 결을 보고 칼날의 방향을 정하면 된다.  흙은 부드럽다. 부드러움은 곧 수월함이 될 것 같지만, 훨씬 까다롭다. 그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음으로 결을 읽어야 한다.


그의 작품들을 보며 둔한 구석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재주가 밋밋하면 둔해지기 십상이다. 흙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도자기는 자칫 둔해지기 쉽다. 

흙으로 빚은 형태위에 유약 층이 형성되면, 날렵한 맛이 사라지게 되니 도자기의 경우는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형태 자체가 둔한 경우도 많다. 둔한 경우는 엉성하다는 말이고, 밀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말도 된다. 재주가 부족하면 밀도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재주는 선천적인 면도 있지만, 수련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거기에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된다. 전성근의 작품들은 아주 완성도가 아주 높다. 그 완성도 때문에 그의 작품은 눈에 뛴다. 그 완성도는 그의 선천적 재주와 기질에 기인하지만, 얼마나 후천적 노력이 가해졌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투각이라기보다는 조각이라 해야 맞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투각에 그치지 않는다. 정교한 칼날이 도자기 전면에 퍼져있다. 그 세밀한 완성도는 면의 크기와 형태를 가지지 않고 고르다. 입체감이 여타의 투각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 

전성근의 작품을 평가 할 때 나는 역사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역사적 관점이라 해도 대단하고 거창하게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투각 기법은 가야 토기에서도 보이고, 고려시대 청자나 조선시대 백자에서도 흔히 사용되던 기법이다. 그러나 전성근의 투각 기법은 본질적으로 도자기의 투각전통과 차이를 보인다. 감각의 차이다. 그는 나무를 통해서 조각을 배웠다. 나무로 표현되던 조각의 전통은 투각과는 다른 갈래에서 발전해왔다. 우리가 옛 사찰들에서 보는 목각들에 담긴 전통적 미감은 도자기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재료에서 오는 느낌의 차이도 있지만, 조각적 기법에서도 차이를 느낀다. 전성근은 그러한 목공예적 조각술을 흙으로 가져왔다. 애초에 배움이 그러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따라서 그의 투각작품들을 보면, 전통 목각에서 자주 소재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응용으로 출발했겠지만, 이제는 도자기와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얼른 그것을 느낄 수 없을 뿐이다. 전통 목각의 세계를 도자에 접목시킨 것이다. 도자의 투각에서는 칼맛이 유약 밑으로 

숨어버렸는데 그의 투각은 그것을 극복하고 있다. 도자투각의 기법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중요한 것이다. 

“귀신 같은 솜씨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디자이너의 암브로치오 뽀찌는 전성근의 작업광경을 보고 놀라워했다, 2003년 세계도자기비엔날레 워크샵에 초대되었던 그는 워크샵 내내 전성근의 훌륭한 솜씨가 예술적 꽃을 피우기가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저런 솜씨를 지닌 작가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언과 경험을 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성근의 완벽한 솜씨에 뭔가 보태져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기술적 완벽함에서 오는 부족함일 것이다. 완벽함이람 ‘더 채울 것이 없는 상태’

를 이른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에선 그것이 최상을 의미하진 않는다. 비움의 경지가 더해져야 하는게 아닐까? 비움은 작품의 여유를 부여한다. 여유가 생기면, 보는 사람의 감정이 훨씬 작품과 가까워 질 수 있다. 여백은 채워진 것들을 더욱 값지게 효과가 있다. 조각이 가해지지 않은 부분도 중요한 것이다. 뽀찌가 말한 것은 그 솜씨가 투각과 조각에만 집중되지 말고, 작품 전체에 훨씬 더 큰 생명력을 부여하게 될 때까지 노력하란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기법들은 더 발전될 수 있고, 그 솜씨는 더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흙은 마음으로 읽는다.

‘무토(撫土)는 전성근의 호(號)이자 공방의 이름이다. ’흙을 어루만지다‘라는 의미의 이름에는 단지 흙의 느낌이 좋아 도자 투각을 시작했다는 전성근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려서부터 조각에 재능을 보였던 전성근의 손끝의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목공예를 시작으로 공예계에 발을 들였다. 명망 높은 스승이나 정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이 불전, 벽화 등을 불교조각에서 섬세한 솜씨를 발휘하던 그가 고수입이 보장된던 목공예를 버리고 도자조각의 길로 들어선 것이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어릴 때부터 계속 칼을 잡고 깍는 작업을 했었죠. 이 일도 내가 했던 작업의 연장선이었고 단지 재료가 나무에서 흙으로 옮겨간 겁니다.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나는 흙의 질감이 너무 좋았답니다. 나무는 눈으로 결을 보고 그 결을 따라 조각하지만 흙의 결은 마음으로 보아야 하거든요. 마음으로 느끼면서 칼질을 할 수 있는 ’흙 맛‘에 빠졌던 거죠“ 


전성근의 반 건조된 도자 위에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바로 문양을 새긴다. 마치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듯이 빠른 속도로 흙을 도려내 문양을 얻어낸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순식간에 새가, 호랑이가, 매화가, 동백이 도자 위에서 태어난다. 밑그림 없이 하다가 단 한번의 실수로도 몇일의 노고가 허사가 되지 않느냐는 걱정에 그는 태연하게 “연필로 그리나 칼로 그리나 어차피 그리기는 매한가지 아닌가요?” 라는 외려 되묻는다. 오랜기간의 노력과 소명의식이 빚어낸 작가의 의미 있는 자부심이 물씬 느껴졌다.

투각 자체가 기쁨이다.

파손 비율이 높고 오랜 숙련 기간이 필요한 까닭에 백지투각은 단지 소수의 도예가만이 시도하는 작업이다. 청자나 분청의 투각 작업에 비해 유독 백자투각 한 분야로만 꾸준히 활동을 하는 작가가 드문 것도 다른 흙에 비해 백자의 흙이 강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아서 만들었다 해도 소성 과정에서 불의 온도와 흙의 수축

정도 때문에 파손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투각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깨져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물론 아쉽기는 하지만요.“

진심으로 자신의 일을 아끼지 않으면 감히 경험하지 못하는 희열을  전성근은 20년을 바친 투각 인생을 통해 맛본 듯 했다. 그는 투각을 ‘잘’ 하는 손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을 ‘사랑’ 하는 마음까지 가졌다. 결과보다 과정에서 얻어지는 기쁨을 최고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은 감히 아무나 깨닫지 못하는 경지가 아닌가.


도예계에서 몸을 담고 있는 작가라면 누구나 ‘우리것’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전성근도 다르지 않다.

“투각이라는 작업이 엄청난 집중력과 정교함을 요하기 때문에 젊었을 때, 그러니까 시력이 허락 할 때까지만 가능한 일이거든요. 더 늦기 전에 동양적인 정신과 사상을 담은 작품을 꼭 한번 제대로 내 안에서 끌어내 보고 싶어요. 발품 팔아서 내 손으로 캐 온 우리 흙으로만든, 누가 봐도 한국적인 작품을 말입니다.”


이중투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일인자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그 역시도 고난도의 정교한 기술이나 화려한 색감을 찾아내는 것보다 우선으로 세계시장 어디에 내놔도 한국의 것임을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창의적인 작품을 발표하는 그의 손끝에서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태어나기를 기해대 본다.


Poetic Space Forms

시학[時學/POETICS]이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로부터 근대의 시인인 바슐라르[Bachelard],작곡가 스트라빈스키[Stravinsky]에 이르기까지, ‘POETICS'은 창세기의 미적 가치관이나, 또는 음악의 창조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어에서 'POETICS'는 ‘to make'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기원하였으며 단지 언어로서의 의미론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The making of space, the making of music, the making of architecture, the making of poems.......등등. 약간의 혼돈이 생길 여지가 있다면 시[時/POETRY]라는 단어는 단지 언어를 구사해서 창조하는 “The Making"의 한 형태일뿐입니다.

전성근의 작품에서는 누구나 한편의 時를 읊고 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저편에서 소리 없이 춤추는 무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時가 소리로, 그림으로, 춤으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언어를 사용하려 창작{“The Making"}작업을  하는 시인의 작품을 보는 듯 착각하게 됩니다.

오모하면서도 섬세한 투각과 조각의 손놀림을 마치 동영상에서 보는 듯 전성근의 작품 표면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으니,그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온 작품이자만 보는 이로 하여금 아직도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의 작업은 ‘The Making of Ceramics, The Making of Poems',  The Making of Space' 그리고 The Making of Forms' ..... 이 모든 영역을 함께 넘나 드는 예술의 창조[Poetics]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백자 표면 위에 투각에 의하여 창조된 새로운 공간과 형태는 마치 건축물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공간감을 느끼고 합니다. 

시인의 무한한 ‘Fantasy'와 Imagination'의 세계를 그의 작품에서 읽고, 보고, 듣고 그리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주로 물레 작업에 의한 형태[Farms]를 접하게 되며 우리들로 하여금 몇 세기를 거슬러 간 듯 느끼게 합니다. 그는 우리의 오랜 역사 속의 전통도자에 심취해 있어 보이며, 나름대로 전해지는 그의 메시지를 통해 또 다른 그의 해석을 보게 됩니다. 머지않아 또 다른 해석으로 ‘미래의 전성근時’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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