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방사능비와 멜랑콜리아. 오늘은 방사능비가 내릴 예정이오니 가급적 환기를 자제하시고, 어린아이와 노약자, 특히 천식환자와 기관지 질환자는 외출을 삼가주시고, 부득이하게 외출할 때에는 우산과 함께 우의를 반드시 착용하세요(그리고 방독면도). 그리고 귀가 후에는 샤워로 몸을 씻어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시고, 손은 수시로 세척하는 것이 청결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유념하세요.
공상과학소설에서나 읽었을 법한 이 멘트가 현실이 되었다. 아니, 현실로서 다가오고 있다. 비현실적인데, 왠지 낯설지가 않다. 무슨 영화 같지 않은가? 현실이라는 자장으로부터 유출된 멘트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면서도 정작 낯설기는커녕 친근하기 조차하다. 현실에서 유포된 비현실과 더불어 불현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현실이 비현실 같고, 비현실이 현실 같다. 우리는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전복되는 또 다른 경험을 알고 있다. 9.11테러로 마천루가 맥없이 주저앉는 모습은 흡사 초현실주의 그림 같았다. 세기말적 상징 같았고, 묵시록적 암시 같았다.
세상 끝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린치와 테러가 그 즉시 극적인 이미지로 번안돼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희한한 세계에서 현실은 비현실로 전치되고, 물적 토대는 이미지에 그 자리를 내어준다. 진즉에 기 드보르는 이 전복현상을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곧 구경거리의 사회라는 말로써 예감했었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일이, 소설보다 더 허구적인 일이 모두 이미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비현실이 모여 현실은 그대로 거대한 영화세트장이 되고, 스크린이 된다. 그래서 어쩌면 현대인 역시 그 세트장에 걸맞게 연극적인 삶을 살고, 영화적인 삶을 살고, 대리하고 대역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대리적인 삶이 정체성 상실과 혼란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전라의 한 사내가 머리에 방독면을 쓴 채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리고 어떤 사내는 짐승의 뼈를 쓰고 있다. 방독면이나 짐승의 뼈를 착용하고 있다기보다는 아예 머리 자체가 방독면이나 짐승의 뼈로 변형된 것 같다. 방독면 머리와 짐승의 뼈 머리가 인격을 사물화 시킨다. 질 들뢰즈는 얼굴과 머리를 구분했다. 얼굴은 주체가 사회에 내어준,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기호인 만큼 주체에 속해져 있지가 않다(이를테면 나는 사회에 대한 배려로 웃는다). 반면 머리가 주체를 담보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표상이 없는 기호 즉 어떤 기호인지 알 수가 없는 탓에 때론 자신에게마저 낯설다. 머리는 말하자면 주체 위로 불현듯 타자가 출몰하는, 이질적인 사건이며 장이다.
빛에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신체부위가 어둠 속에 묻혀있는 이 사내 위로 파리한 불빛의 조명이 드리워지면서 그로테스크한 이질감과 함께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파리한 대기와 창백한 신체, 그리고 더욱이 방독면이 방사능비나 방사능 피폭을 암시한다. 방사능을 색깔로 환원하면 이처럼 파리한 색깔일지도 모른다. 흔히 알려진 노란색과 검정색의 대비는 정서를 색깔로 환원해놓은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한 무미건조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파리한 대기와 창백한 신체, 그리고 파란 방사능까지 온통 청색의 스펙트럼이 음울(암울?)하면서도 부드러운 밸벳처럼 사내 위로 내려앉는다.
청색은 낭만주의의 상징색이며 죽음을 상징한다. 영화 <그랑 블루>는 깊고 푸른 바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깊고 푸른 밤, 어둠, 심연, 우울, 무의식, 죽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역시 청색이 상징 색으로 등장하는 영화 <블루밸벳>에는 산소마스크(방독면의 변주?)를 쓴 채 섹스 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의 섹스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극적인 결합이며,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과의 급진적인 결합이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섹스를 작은 죽음이며 예비적인 죽음이라고 했다. 그에게 섹스는 인간을 초월하게 해주는 방편이었다(어떻게 인간적인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죽음을 향해 삶을 소진시키는(그것도 급격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과정이었다. 이쯤 되면 섹스는 섹스가 아니다. 죽음을 향한 몸부림이며 삶을 향한 강력한 요청이다. 도덕과 윤리로 무장된 인간의 탈을 벗고(인간은 인문학의 발명품이다) 진정한 삶, 초월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제스처며 제의다.
김동연의 그림에서 방사능비(그리고 방독면)는 이처럼 그 자체 감각적인 현실로서보다는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사실로서 다가온다. 제도가 쏘아올린 이데올로기의 비(방사능비만큼이나 유해한, 그리고 치명적인)에 젖어 나는 운신할 수가 없다. 정상적인, 상식적인, 합리적인, 이성적인, 관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나를 지웠다. 나는 이데올로기를 대리하는 나에게 나를 내어준다. 알튀세는 제도가 개인을 호명하는 구실이 이데올로기며, 그 호명으로 인해 비로소 주체가 생성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 주체는 제도적 주체다. 그래서 나는 없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나를 지웠고 없앴다. 사내는 마침내 방독면 뒤로 사라져버렸다. 더욱이 방독면은 익명 위로 증발하게 해주는 가면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익명적인 나는 내가 아니다. 제도적인 주체는 주체가 아니다.
혹, 방독면을 쓴 사내는 지금 죽음보다 깊고 심연보다 검푸른 물(혹은 공기?)에 잠겨 세기말적 블루스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브레히드 뒤러는 예술가를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부류로 본다. 그리고 죽음의 춤 테마는 특히 서구문화사의 전형적인 알레고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셀 위 댄스? 비록 무도회의 가면만 못하겠지만, 그로테스크한 춤도 나름 색다른 맛이 있지 않겠어요? 더욱이 꽤나 낭만적이기 조차하잖아요?
미노타우르스, 세상이라는 미궁. 소머리와 사람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괴물 미노타우르스는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까지 미궁 속에 갇힌 삶을 산다. 아주 가끔씩 공물로 바쳐진 제물을 제외하면 그가 사람들과 마주할 일은 없다. 어쩌면 이 신화 그대로 삶의 비유 같고 존재의 유비 같다. 나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괴물로 태어났고, 내가 모르는 이유로 죽음을 맞는다. 모르고 태어났고, 모른 채 죽는다. 모르고 또 모른다. 아주 드물게 맞닥트리는 사람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그저 개념이 없는 사물일 뿐. 소인간의 원형은 목신이며, 목신은 무분별한 에로스를 상징한다. 그 에로스가 사람이라는 공물로 바쳐진 또 다른 에로스를 드러내고 강화한다. 어쩌면 에로스는 인격을 사물화 하는 경험이며 사건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대로 거대한 미궁과도 같다. 미궁 속에는 너무나 많은 길들이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길의 의미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정보의 네트워크는 오히려 정보의 바다 속에 사람들을 허우적거리고 수장되게 만든다. 그 길은 결코 타자에게 데려다주지 못한다. 전에 없이 타자에게 열린 길 같지만 사실은 막혀있고, 더욱이 그렇게 만나진 타자는 이미 개념이 없는 사물일 뿐.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이처럼 개념이 없는 사물에 지나지가 않는다. 그래서 고독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미궁 속에 갇힌 살아있는 주검이며 좀비들일지도 모른다. 이미 죽었으므로 더 이상 고독하지도 않다. 그저 개념이 없을 뿐. 그래서 나는 공허한 웃음을 웃는데, 때로 그 웃음은 광적인 웃음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농담과 키치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큼이나 이 공허를 찌르는, 의미 없음으로 인해 의미심장해지는 다른 개념들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자살론으로 유명한 뒤르켐은 자살을 유형화면서 아노미형 자살을 제안한다. 물질적인 풍요가 가져온 정신적인 패닉상태가 자살을 불러오는 것. 물질적인 풍요와 더불어 현대인은 더 이상 노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저 의미 없는 노동에 복무하면서, 의미 없음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반복과정이 있을 뿐. 그래서 나는 방사능비가 내리는 푸른 대기 속으로, 검푸른 심연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혹, 그 던짐이 나를 미궁 밖으로, 그리고 타자에게로 데려다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추락이 아닌 비상이 되기를 꿈꾸면서. 아디오스 아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