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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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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작품 9점, 판화 2점
It's time to begin.


전시장정보
서울옥션 / Seoul Auction
주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1405-16
노보텔엠베서더 부산 4F
전화번호
T. 051.744.3511





새로운 하이브리드 페인팅으로의 도전, 강민석의 예술 세계

강민석 작가는 극도로 예민하되 건강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세계에 대한 존중과 예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작가는 두 가지의 태도를 분명히 한다. 첫째, 비관론에는 출구와 방법이 없다는 강한 낙관론이다. 둘째, 지나간 시절보다 지금이 낫다는 믿음이다. 이는 시간을 기나긴 여울의 소용돌이로 볼 때 역사는 장기적 합목적성을 필연적으로 갖는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더욱이 강민석 작가는 세계를 존중하는 태도에 있어서 놀라우리만치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의지를 뜨겁게 투여하곤 한다. 바로 페인팅이라는 자기 세계를 마주할 때만은 반드시 그러했다.




작가의 회화는 일견 보기에 풍경이라는 장르화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오독이다. 작가의 그림은 개인적 네러티브로 고도로 응축시킨 내밀한 자기 피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주인공이 세계와 단계적으로 만나 자기가 무엇이며 인간 삶의 형식이 어떠한 모습인지 깨우쳐나가면서 의식을 형성해나가듯이, 강민석은 초기 회화부터 자기가 겪었던 삶의 충돌들과 화해의 결론을 회화에 형상화시킨다. 강민석 작가의 화면 가운데 노란 자동차는 작가 자신의 대리 인격(surrogate personality)이다. 그 노란 자동차는 물론 영화 트랜스포머로 유명한 ‘범블비’인데, 그것은 푸른 ‘옵티머스’의 희망의 위용도 검은 ‘메가트론’의 강박적 카리스마도 아닌, 그야말로 풋내 물씬 풍기는 초심자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작가는 예술적 환영과 삶의 현실의 괴리가 주는 어지러움 속에서 긴 시간을 헤맸다고 발언한다. 그 깊은 괴리감은 터널이라는 수렁의 메타포로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작에서 터널을 질주하는 ‘범블비’는 수렁 속을 헤매는 작업 시초 단계의 자신의 삶을 그대로 투사한 결과인 셈이다. 이후의 작품부터는 우주론적 ‘웜홀(Wormhole)’이나 ‘블랙홀(Black hole), 그리고 터널 안의 아찔한 질주와 경주가 아니라, 이러한 수렁의 메타포로부터 빠져 나와 실존적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자신의 진일보한, 그리고 보다 숙성된 자아를 여실히 드러낸다. 현기증 날 정도로 달콤한 벚꽃의 만발, 황금의 노란 빛으로 난반사하는 하늘, 서서히 회전하면서 현대의 문명을 조망하는 ‘런던 아이’ 등은 모두가 작가 주관이 상징화시킨 세계의 대상인 셈이다. 따라서 작가가 발현시킨 벚꽃, 황금의 노란 하늘, ‘런던 아이’ 등의 상징화된 대상들은 ‘즉시성(instantaneousness)’의 세계관인 것은 당연하다. 작가는 현대판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도 여하의 조소도 가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 사회에 대한 직접적 아방가르드에 대해 탐탁하게 않아하는 작가의 준수한 기질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한편 내밀한 아방가르드를 기획한다. 그것은 내용이 아니라 화면 안의 형식에 있어서이다.




강민석의 화면은 자세히 관찰해야 이해의 실마리가 풀린다. 그것은 오소독스한 오일 회화가 절대로 아니다. 강민석의 회화는 회화적 요소와 판화의 요소, 그리고 콜라주의 요소가 혼재되어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상상했던 이미지를 컴퓨터 상에서 구체화시킨다. 이 구체화된 상(像), 즉 이미지를 초현대적인 프린터로 현상한다. 이 현상된 이미지를 캔버스에 접합시킨다. 주요 테마가 이렇듯 캔버스에 접합되는 장면은 바로 콜라주의 기법과 동일한 수단이 된다. 이후 붓질(brush stroke)과 드리핑(dripping), 심지어 간혹 핑거 페인팅이 다층적 층위를 이루며, 때때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디테일을 치장하기도 한다. 이 복잡다단한 과정은 그 자체로 예술의 존재론적 의미를 총체적 층위로 설파한다.




첫째, 오일 페인팅은 특정 사회의 미적 합의(aesthetic consensus)가 도출한 권위의 결과물이다. 이 오소독스하고 권위적인 장르는 남성적인 정신과 이성의 힘, 완력의 힘을 상징해왔으며 여전히 그 위세를 자랑한다. 한편 언제나 차별적이며 위계적 질서를 강요한다. 그것은 경계를 설정하며 규범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여성과 비유럽권 문화적 요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여지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오일 페인팅의 남성성의 가장 핵심적 미덕은 붓질이야말로 곧 영혼이라는 등식의 작가주의(authorship)와 독창성(originality)에 있다. 이 배척적인 순혈주의는 이종 문화간의 연대를 불식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둘째, 판화의 특성은 붓질의 권위주의는 덜한 듯 하다. 그러나 과정주의(procedure specific)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동반한다. 과정주의의 메커니즘은 도구적 이성이라는 근대적 수사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여기에서 독창성과 유일성이라는 신화는 깨지지만 동시에 도제적 숙련성이라는 요소가 개입된다. 다시 말해 판화는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다. 따라서 판화라는 과정 역시 타자에 대한 배타적 요소가 여전히 상쇄되지 않은 엘리티즘(elitism)의 잔재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셋째, 이 둘과 반대로 콜라주의 근본 정신이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면서 관람자를 재고하게 만든다. 콜라주는 오일 페인팅의 남성적 권위와 판화의 도제적 신화를 모두 비판하는 아방가르드적 수사법이다. 마치 여성 작가 한나 회흐(Hannah Höch)가 1919년에 제작했던 ‘바이마르 배불뚝이 문화의 마지막 시기를 다다의 부엌칼로 잘라라(Cut with a Dada Kitchen Knife through the Last Era of Weimar Beer-Belly Culture)’라는 작품을 연상하면 된다. 보수적이며 권위적인 오일 페인팅의 배타성과 반대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사진 이미지를 마음껏 즐겁게 조합한 유희적 자유야말로 탈권위적이며 우주적 포용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콜라주는 여성적이며 대중친화적이고 건강하며 신랄한 문명비판적 유희로부터 발전한 장르이다. 이 세가지 장르의 덕성과 악덕을 모조리 하나의 용광로에 녹이려는 시도가 바로 강민석이 가려 했던 하이브리드 페인팅의 세계이다. 역사와 탈역사, 남성과 여성, 신성과 세속, 서구와 비서구, 위계질서 옹호자와 위계질서 비판자, 문명과 신화, 환영과 사실, 자아와 타인을 한곳에 섞으려는 비범한 시도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세계는 완전한 무대이지만 거기서 벌어지는 것은 엉터리 연극이다”는 말로 역사와 인간사를 짧게 논평했다. 회화가 가진 생래적(生來的) 배타성과 편협함을 극복하는 길은 회화에서 벌어진 기나긴 역사의 길이 결코 온전히 바르지는 못했다는 깨달음을 구축하는 길이다. 그것의 미학은 그 시대가 만든 규칙과 합의의 산물이었을 뿐 결코 보편이라는 옷을 입은 왕자가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길밖에 없다. 이러한 태도로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용기야말로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신세대의 회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하이브리드 정신은 새로움에 새로움을 덧입히는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새로운 물꼬를 터뜨리려는 작지만 위대한 한걸음의 진보가 아닐지 싶다.

이진명, 큐레이터,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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