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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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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개요
2002년 개관 후 2010년 신관 사미루를 확장 증축한 이래 2013년 4월 김종영의 서화, 드로잉, 조각, 도서 그리고 유품 등의 작품전모를 볼 수 있는 전관 전시회를 열고 있다.
2013년은 한국 현대조각의 존재를 국제무대에 알린 첫 계기였던 1953년 런던 테이트 미술관 국제조각공모에 김종영이 출품하여 입상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김종영이 동시대의 미술을 수용하여 오늘날 그의 후학들이 세계화의 물결 속에 한국 현대미술을 국제화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이었는가 라는 질문이 이 전시의 기획의도이다. 아울러 그의 중요성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각백 김종영의 문자향과 서권기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과 인품의 합일된 예술세계를 조망하고자 한다. 이 전시는 비판과 반성이라는 예술가의 정신적 조건을 실천하였던 김종영이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아 들이되 모방이 아닌 창작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정신적 토양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종영의 서예

창원의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김종영은 일찍이 시서화에 능한 조부와 아버지의 영향 아래 깊고 넓은 전통의 뿌리를 지닌 작가로 성장하였다. 휘문고보시절 17세의 젊은 나이로 1932 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전국 학생 서예실기 대회에서 안진경체顔眞卿體로 일등을 한 사례도 기 록에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조각가라는 업을 택한 이후 한번도 외부에 자신의 글씨를 공개하거나 전시한 적이 없 다는 사실에서 그의 서법묵예가 명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자기수양의 도구로 삼은 선비정신의 산물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서화는 심신 수양의 방편이며 그 도구와 재료에서 비롯된 ‘체득의 미학’은 얘기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노련한 안내자가 말 없이 앞서 갈 따름이며 다만 필요할 때 눈을 주는 것”처럼 ‘법고창신 法古創新’을 자기 주도적 문화수용의 기본으로 삼은 김종영의 정신적 자세와 불각의 예술관을 만 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예 관련 김종영 어록

“세잔느의 화면에서는 유려한 리듬은 볼 수 없다. 그의 회화는 그렸다기보다는 축조했다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리고 견고한 구성과 중후한 재질감에 있어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이러한 세잔느의 예술은 완당 김정희와도 통하는 점이 많다. 일반적으로 서예의 미는 선의 리듬 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 완당의 예술은 리듬보다도 구조의 미에 있다.

-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p88 발췌

6폭 병풍 노자 도덕경 1973 원문표기
 
天下皆知 美之爲美 / 斯惡已 皆知 善之爲 / 善 斯不善已 
천하개지 미지위미 / 사악이 개지선지위 / 선 사부선이

故 有無 / 相生 難易相成 長短 / 相較
고 유무 / 상생 난이상성 장단 / 상교

高下相傾 音聲 相和 前後相隨 / 是以
고하상경 음성 상화 전후상수 / 시이
 
聖人處 無爲之事 行 / 不言之敎 萬物作焉而
성인처 무위지사 행 / 불언지교 만물작언이

不辭 生而不有 爲而 / 不恃 功成而弗居 / 夫
불사 생이불유 위이 /  불대 공성이불거 / 부

唯弗居 是以不去
유불거 시이불거 

계축년(1973) 
각도인 김종영(서명)

원문해석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알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추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 이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 알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으로, 있음과 없음 은 서로 말미암아 있고 없으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로 인해 어렵고 쉬우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겨루어 길고 짧은 것이며, 높고 낮음도 서로가 있어 높고 낮으며,  소리와 노래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일을 무위無爲에 처하여 일하고, 행行하여 말없이 가르치며, 만물이 이루어 지는 대로 마다하지 않고 살아 소유하려 않으며, 그 한 일을 뽐내지 않 으며, 공을 이루고도 그 공을 이룬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무릇 머물지 않으니 사라짐도 없다.


작품분석

김종영은 서예는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서예의 여백이나 장식, 꾸밈 등을 철저히 억제한 자신의 개인세계에 속한 것이며 가족이나 친분 있는 지인들 외에는 그가 서예를 한다는 것을 잘 알지 못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영의 서예가 예술가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자리매김하는 데 주 요한 원천과 근거가 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다른 취미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던 김종영은 틈틈이 서예를 통해 ‘유희’하였다. 그가 쓴 <유희삼매遊戱三昧>는 바로 김종영에게 서예와 조각으 로 풀어 낸 예술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하고 있다. – 각도인서刻道人書 2009 인용 편집
 



방고화倣古畵와 세한도歲寒圖

…선생이 남긴 수많은 드로잉 작품 들 중 작품 제목이 「방고화倣古畵」인 것과 겸재의 「금강산 전 도全圖」와 같이 ‘임모臨模’하는 자세로 그린 수채화작품들, 그리고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모티 브로 선생 댁 주변의 풍경을 그리고 동일한 제목을 정한 것을 통해 ‘온고지신溫故知新’하고 ‘법고 창신法古創新’하고자 한 선생의 예술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당과 세잔느, 즉 거의 동시대의 동서 두 거장을 비교 고찰하였습니다..

김종영 선생은 완당과 세잔느의 비교를 통해 동과 서를 같은 반열에서 비교 고찰하였습니다. 선 생은 두 대가가 문화와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집요한 추궁을 통해 통념을 벗어나 새로이 예 술의 지평을 넓혀나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김종영특별전 『통찰』 -서화, 드로잉, 조각 전을 기획하며>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박춘호



수묵화 관련 김종영 어록

유희란 것이 아무 목적없이 순수한 즐거움과 무엇에고 구애 받지 않는 자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된다고 보겠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헛된 노력’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 이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 는 예술의 진전을 볼 수 없다.   -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p30 발췌
 

그간 <김종영 조각가의 그림 1988 (가나아트)>의 첫 발간 이후 <김종영의 자화상 “김종영의 김종
영” 2003>, <김종영: 조각과 밑그림 2003>, <오월에 만나는 김종영의 가족그림 2004>, <김종영 추 상소묘 2010 (열화당)> 등 김종영의 드로잉에 관련한 자료와 전시를 통해 조각가 김종영의 그림 과 소묘는 그의 조각을 이해하는 귀중한 길잡이로 인식되어 왔다. 1950년대 초부터 1970년대 말 까지의 드로잉들과 함께 특히 작품제작과 관련한 스케치와 작품을 비교, 대조해 보는 이번 전시 는 작가의 제작의도와 그 심화과정을 살펴 헤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데생 관련 김종영 어록

데생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해서 이십 세기 들어와 상당히 철학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미술이  손의  기술로서  이루어진다기  보다  두뇌의  역할을  더  중요시  함에  따라  ‘데생’을
단순한 ‘소묘’로 보지 않게 된 것 같다. 미술이 사물의 객관적 묘사에 치중하였을 때는 작품이 되
기 전에, 혹은 색채를 칠하기 위해서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린 소묘를 데생이라고 불러왔다. 그러 나 오늘날 우리들의 일은 작품제작에 있어 손이 작용하기 전에 작품에 대한 정신력에 의존하는 도가 높아짐에 따라, 작품 이전에 진행되는 이 모든 정신적 과정을 요약한 것이 데생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좋은 데생은 정확한 해답이나 결정적인 의도(아이디어)를 설정하기 보다는 사물에 대한 이해의 심도를 볼 수 있고, 많은 조형 가능성과 더불어 정신의 무한한 생동력을 갖는 데서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작가들은  데생에  대한  수련이나  이해가  없기  때문에  데생의  기초  위에  작품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캔버스나 점토에 의한 작업으로 시종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생명력이나 모든 정신적 과정에서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거기는 반드시 데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품에 데생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는 박제표본과 다를 것이 없다.
 

김종영의 조각

조각에 있어 김종영이 추구한 목표는 전인적 자기수양과 ‘통찰’이었다.  ‘나는 완벽한 작품이나 위
업을 모색할 겨를도 없었고, 거기에는 별로 흥미도 갖지 않았다’ (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p22 )는 그의 자서自序에서 알 수 있듯 평생을 추구한 불각의 미가 돌과 나무 등 범속한 일상의 질료에 오롯이 녹아 들어 있다. 1950년대 자각상을 시점으로 김종영의 초기 작업과 대표작품들을 본관 불각재에서 감상하고 이어지는 신관 사미루에서는 김종영의 후기 작품들을 중심으로 각각 1전시 실에서는 주요 추상 작업들과 스케치를 2전시실에는 우성 김종영의 생애 동영상과 전시작품 영상을, 그리고 3전시실에는 김종영이 사용하였던 지필묵과 서첩 을 다양한 크기의 족자와 함께 전시한다.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동시대 미술과의 상관성을 살펴 볼 수 있는 연대기적 조각작품들과 서예 수묵화 드로잉의 장르로 구성된 작가의 대표작품들을 만나보기 권한다.


조각 관련 김종영 어록

옛 사람들이 불각不刻의 미美를 최고로 삼는 것은 형체보다도 뜻을 중히 여겼던 탓이다. 현대 조 형이념이 형체의 모델보다도 작가의 정신적 태도를 더욱 중시하고 있는 것은 동양사상의 불각의 미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미를 알려고 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허 황된 일이다. 절대적인 미를 나는 아직 본일도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정직 하고 순수하게 삶을 기록할 따름이다. 그것이 희망이고 기쁨이기를 바란다.

-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 p33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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