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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피어 천하가 봄이로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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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 미술로 보는 인문학 02 梅花, 피어 천하가 봄이로다

전시기간 : 2013년 2월 6일 ~ 3월 20일

전시장소 : 포스코미술관

개관시간 : 월 ~ 금 10:00 ~ 19:00, 토 11:00 ~ 16:00, 국공일 휴관

관 람 료 : 무료


-16세기 ~ 20세기 초 매화를 주제로 한 묵매도, 첩, 병풍 등 90여점


-1부 : 

조선시대 16세기 초반~ 19세기 초반 어몽룡(魚夢龍, 1566-?), 조속(趙速, 1595~1668), 조지운(趙之耘, 1637~?), 이공우(李公愚, 1805~?), 정학교(丁學敎, 1832~1914), 정학연(丁學淵, 1783~1859), 강진(姜溍, 1807~1858), 임득명(林得明, 1767~?), 강세황(姜世晃, 1713~1791), 김홍도(金弘道, 1745~?), 강이오(姜彛五, 1788~?), 조희룡 (趙熙龍, 1789~1866), 신명연(申命衍, 1808~?), 최석환(崔奭煥, 1808~?),허련(許鍊, 1808~1893), 윤상현(尹相賢, 1825~?), 유숙(劉淑, 1827~1873),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오경림(吳慶林, 1835~?), 정래봉(鄭來鳳, ?~?),임량재(?~?), 정태오(鄭兌五, ?~?), 유진태(?~?), 

-2부 : 

19세기 중반 ~ 19세기 말 양기훈(楊基薰, 1843~?), 강진희(姜璡熙, 1851∼1919), 정대유(丁大有, 1852~1927), 황철(黃鐵, 1864~1930), 최린(崔麟, 1878~1958), 김용진(金容鎭, 1878~1968), 황영두(黃永斗, 1881~1957), 정학수(丁學秀, 1884~?), 이도영(李道榮, 1884~1933), 유영완(柳永完, 1892~1953), 허용(?~?) 

-3부 : 

20세기 초 본연스님(本然, 1873~1949), 김희순(金熙舜, 1881~1968), 이광열(李光烈, 1885-1966),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병직(李秉直, 1896~1973), 김경원(金景源, 1901~1967), 김용준(金瑢俊, 1904~1967), 이응로(李應魯, 1904~1989), 이석호(李碩鎬, 1904∼1971), 박생광(朴生光, 1904∼1985), 정운면(鄭雲勉, 1906~1948), 이남호(李南浩, 1908~2001), 허민(許珉, 1911~1967), 배렴(裵濂, 1911~1968), 장우성(張遇聖, 1912~2005), 김상옥(金相沃, 1920~2004), 박노수(朴魯壽, 1927~),김우진(金宇鎭, ?~?), 반돈식(?~?), 홍혜선(?~?) 

-4부 : 

중국 작가 및 무명작가 부유(溥儒, 1896~1963), 여금허(?~?), 낭심호(浪心鎬, ?~?)


설곡 어몽룡 ( 雪谷 魚夢龍, 1566-? )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견보見甫, 호는 설곡雪谷 또는 설천雪川. 판서 계선季瑄의 손자이며, 군수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1604년(선조37) 진천현감을 지냈다. 묵매墨梅를 잘 그려서 이정李霆의 묵죽墨竹과 황집중黃執中의 묵포도와 함께 당시의 삼절三絶로 불렸다. 중국인 양호楊鎬도 그의 묵매도를 보고 화격畵格이 대단히 좋다고 하였으며, 다만 거꾸로 드리운 모습이 없어 유감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의 묵매화는 굵은 줄기가 곧게 솟아나는 간소한 구도와 단촐한 형태, 고담한 분위기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조속趙涑과 오달제吳達濟 ㆍ허목許穆ㆍ조지운趙之耘 등의 묵매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특유의 직립식 구도를 비롯하여 묵매화에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고 조선 중기 묵매의 한 전형을 이루었던 화가라 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월매도月梅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매창 조지운 ( 梅窓 趙之耘, 1637~? )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운지耘之, 호는 매창梅窓ㆍ매곡梅谷 혹은 매은梅隱. 선비화가 속涑의 아들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으며, 그림을 잘 그려 중국에 다녀온 바 있다. 참봉으로 있을 때 우의정 허목許穆의 청으로 부채에 그림을 그려준 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안 노론들이 힐난하자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버지의 화풍을 계승하여 선비의 기풍과 심의心意가 가득한 묵매와 수묵화조를 잘 그렸다. 그의 묵매화는 아버지를 비롯한 조선 중기의 묵매화법을 고루 갖춘 그림으로, 주로 직립식과 사선식의 구도를 사용하였으며, 거칠고 성근 필치를 애용하였다. 수묵화조에서도 간결한 구도와 사의적인 분위기 등 아버지의 화풍을 충실히 따랐다. 유작으로는 <숙조도宿鳥圖>ㆍ<매죽영모도梅竹翎毛圖>ㆍ<송학도松鶴圖>ㆍ<묵매도墨梅圖> 등이 남아 있다.

* 출품작 *

. 눈속의 매화, 달 아래 매화, 강가의 매화 등 5점의 각기 다른 매화의 풍취를 담은 매화첩 이 선보일 예정


유산 정학연 (酉山 丁學淵, 1783~1859 )

정학연(1783~1859)은 다산 정약용의 장남으로 다산의 문예 정신을 이어 받아 다산학단의 중심인물이다.

* 출품작 * 

<매화삼십수>는 정학연이 사능시사의 문인인 구행원과 교유하는 가운데 지은 것으로 시사 동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다른 동인 신위도 같은 형식으로 매화 연작시 36수를 남겼는데, 이러한 형식은 중국 당대부터 지어졌던 <매화백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정학연은 이 시에서 매화를 주로 여성으로 묘사했으며 남성 화자와 여성매화 사이의 정감을 농후하게 표출했다. 또 기존에 전형적으로 사용했던 용사를 끌어썼으나 의인화나 의경 전개의 세밀화 등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확보했으며, 매화의 모습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비유해 새로운 미감의 매화시를 창출했다.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 1745~? )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ㆍ고면거사高眠居士ㆍ취화사醉畫士ㆍ첩취옹輒醉翁.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산수ㆍ도석 인물道釋人物ㆍ풍속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이름을 크게 떨쳤다. 또한 51세 이후 원숙기부터는 단원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 대신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만년에 이르러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배인 일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굵고 힘차면서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선이 특징인 그의 도석인물들은 후기에 오면서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 분방한 필치를 띄게 되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났지만 특히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의 작품은 조선시대 우리 문화와 역사를 고찰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동시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작품에는 <자화상(18세기 중반)>,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 <행려풍속도(1778)>,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송월도(1779)>, <꽃과 나비(1782)>, <단원도(1784)>, <사녀도(1784)>, <금강사군첩(1788)>, <연꽃과 게(1789)>,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청앵도(18세기 후반)>, <염불서승도(1804)>, <추성부도(1805)> 등이 있다.


표암 강세황 (豹菴 姜世晃, 1713~179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ㆍ산향재山響齋ㆍ의산자宜山子ㆍ노죽露竹ㆍ표암豹菴 등 시ㆍ서ㆍ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발전과 풍속화ㆍ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 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서화론ㆍ서화평, 대나무 판각화, 사군자를 한 벌로 짝 맞추어 그리는 부분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의 서화가 개성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서화의 정통성과 올바른 방법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즉, 참신하고 독자적인 서화관에 의해 실천적으로 문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추구했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ㆍ속기俗氣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의 경지였다. 그림의 소재는 산수ㆍ화훼花卉를 주로 다루었다. 만년에는 묵죽墨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은 전 시기를 통해 진정한 문인화, 격조 높은 수묵화에 도달하기까지 발전적으로 전개되었다. 공간감의 확대, 담백한 필치, 먹빛의 변화와 맑은 채색 등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현존하는 작품은 상당수에 달하며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아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대표 작품으로는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방동현재산수도倣董玄宰山水圖>,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 <표암첩豹菴帖>,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약즙산수藥汁山水>, <삼청도三淸圖>, <피금정도披襟亭圖>, <난죽도蘭竹圖>, <묵죽팔폭병풍墨竹八幅屛風>, <사군자병풍四君子屛風>, <임왕서첩臨王書帖>, <동기창임전인명적발董其昌臨前人名迹跋>, <제의병祭儀屛> 외 다수가 전한다.


소치 허련 (小痴 許鍊, 1808~1893 )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ㆍ노치老痴ㆍ석치石痴. 조희룡趙熙龍ㆍ전기田琦 등과 함께 김정희 일파金正喜一派에 속한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이다. 초년에는 해남의 윤선도고택에서 윤두서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 화풍을 익혔다. 대흥사초의의 소개로 1839년 상경하여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수업하였다. 김정희로부터 중국북송의 미불, 원나라 말의 황공망과 예찬, 청나라의 석도 등을 배웠다. 그리고 그의 서풍도 전수받으면서 남종 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여 김정희 일파 가운데 남종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로 지목된다. 특히,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ㆍ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담채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산수화 외에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자ㆍ모란ㆍ파초ㆍ괴석ㆍ노송ㆍ연화 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


* 출품작 * <매화서옥도> 이 그림은 허련이 헌종에게 그려 바친 것으로 알려진 화첩의 마지막 그림인 <매화서옥도>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젊은 시절에 그린 <매화서옥도>가 강한 붓 선에 맑은 화면을 가진 반면, 이 그림은 상대적으로 느린 붓 선에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중년의 허련 삶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재 이도영 (貫齋 李道榮, 1884~1933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일仲一, 호는 관재貫齋ㆍ면소芇巢ㆍ벽허자碧虛子. 이름은 도영鞱頴으로 쓰기도 하였다. 서울태생으로 18세 때에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의 문하생이 되어 전통화법을 폭넓게 수업하였다. 특히, 안중식의 화풍을 주로 이어받아 인물ㆍ영모翎毛ㆍ기명절지器皿折枝의 화제畫題에서

온건하고 자유로운 필력을 발휘하였다. 1911년에 은사 조석진과 안중식이 중심적 교수진이 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강습소가 개설되자 그림 전공의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18년에는 동연배의 화우였던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 출신 고희동高羲東이 앞장서서 서화협회書畫協會 조직에 나서자 조석진과 안중식을 위시한 13인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1920년대 이후에는 고희동과 더불어 서화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21년에 첫 서화협회전람회(약칭協展)를 개최함과 동시에 <서화협회회보書畫協會會報>에 <동양화의 연원淵源>과 <동양화의 강구講究>를 연재물로 집필하였고, 1923년에는 미술학교를 목표한 3년 수업과정의 서화학원書畫學院을 서화협회가 개설하면서 동양화부 지도를 맡았다.

그 밖에 1922년부터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대규모로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심사원을 수차 역임하였다. 그러한 많은 화단 활동에 비하여 정작 그의 그림은 명성에 부합되는 높은 경지의 특질성이나 개성적인 작풍으로 발전하지 못하여 전해지는 역작도 많지 않다.


고우 최린 (古友崔麟, 1878~1958 )

호는 고우古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함경남도 함흥 출신.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의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7월 귀국하여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지내고,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도쿄부립東京府立 제일중학에 입학,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09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 1911년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였다. 이어 보성普成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천도교 간부들과 독립운동방안을 논의, 3ㆍ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힘쓰고, 1927년 구미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후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했다. 1950년 6ㆍ25전쟁 중 납북되었다.



내고 박생광 (乃古 朴生光, 1904∼1985 )

호는 내고乃古. 경남 진주 출신. 진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1920년에 경도京都로 건너가 다치카와미술학원立川酸雲美術學院에서 수업을 받았다. 1923년에는 일본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근대경도파近代京都派’의 기수인 다케우치竹內栖鳳ㆍ무라카미村上華岳 등으로부터 고전과 근대 기법의 결합을 시도하는 신일본화新日本畵 를 배웠다. 일본에서 1945년 귀국할 때까지 명랑미술전明朗美術展ㆍ신미술인협회전新美術人協會展ㆍ일본미술원전日本美術院展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광복이 되자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백양회白陽會 창립전에 참가하였다.

1963년 경상남도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67년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하면서 미술 활동을 하였다. 1974년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이 때 동경東京에 거주하면서 일본미술원전의 회원이 되었고, 3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77년 귀국과 동시에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1981년 백상기념관百想記念館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82년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뉴델리인도미술협회에 초대되어 초대전을 열었다. 1985년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에 특별 초대되었다.

1985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86년 호암갤러리에서 1주기 회고전이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다. 초기의 일본화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샤머니즘·불교 설화·민화·역사 소재 등을 주제로 삼아 폭넓은 정신세계를 전통적인 색채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한국적 회화를 현대적 조형성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의 미술사적 위치는 우리나라의 채색화 부분에 새로운 가능성과 활로를 제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주체성을 회화로서 표현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대표작으로는 <무당巫堂(1981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무속巫俗(1983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토함산해돋이(1984년)>(개인 소장) 등이 있다.


월전 장우성 (月田 張遇聖, 1912~2005 )

호 월전月田. 충북 충주에서 출생하였으며, 2세 때 경기도 여주로 이주하였다. 1933년 육교한어학교六橋漢語學校를 졸업하고 1937년 선전鮮展에 입선한 후, 1941∼1943년 연속 특선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1946∼1961년 서울 미술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1963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 1964년에는 미국 국무성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9년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 1970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에 취임하고 그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 그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이 되고, 1971년부터 홍익대 미술대 교수, 동 미술학부장을 역임했다.

작품으로 아산 현충사 및 정읍 충렬사 봉안 <이충무공영정李忠武公影幀>, 바티칸궁전 소장 <성모자상聖母子像>, 경주 통일전 <김유신장군 초상화>, 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 천지白頭山天池>, 예산 충의사忠義祠 <윤봉길의사영정>과 <고사도高士道>, <김유신장군상金庾信將軍像>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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