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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석 : 여행-바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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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Nomad)의 삶, 문명(文明)을 탈피(脫皮)한 풍물기행(風物紀行)의 발자취” 

 

 한국화가 석주 박종석 화백은 ‘수묵담채(水墨淡彩)의 풍물과 여행의 기록’을 화첩에 담는다. 그는 농묵과 담묵의 바림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표현하는 데 신묘(神妙)함이 있어 마음과 손의 작용이 하나가 되는 ‘심수일체(心手一體) 또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로 자신의 심상을 토해낸다. 따라서 그가 표현하는 색채는 형식에 얽매인 채색화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어 자유롭고, 10대 중학 시절 학교 미술부에서 서양화의 구도와 색채를 접목시켜 한국화의 현대적 지향점을 미리 예고하였던 혜안이 있었던 점은 호남회화사에서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는 주로 먹의 필선으로 인물이나 풍경의 윤곽선을 먼저 구획하고 채색하는 ‘구륵법(鉤勒法)’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기보다 한참 전에 태동한 ‘선(線)의 예술’인 원시 토기에서도 주로 선택되었던 한국 전통의 화맥을 잇는 자연스러운 행위로 볼 수 있다. 또한, ‘파묵법(破墨法)’을 즐겨 사용하는데, ‘먹으로써 먹을 깨뜨린다’는 설명에 들어맞게 그의 삶도 기존의 것을 깨뜨리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이질적(異質的)이며 자유로운 화풍을 시도해 왔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인 것이다. 

 

고교시절, ‘사서(四書)’와 ‘고문진보(古文眞寶)’를 공부하며 ‘한학(漢學)’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던 그가 늦게 미술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한국화의 스승인 석성(碩星) 김형수 선생, 연진미술원 등의 전통 도제식 교육(徒弟式敎育)을 일찌감치 마친 이력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덕분에 박화백의 청년기인 90년대 초기, 당시 활동하는 남도의 수묵화 선배들과 어깨를 견주며 비등한 대우와 활동 범위를 갖게 되었고, 지역을 벗어난 전시로 꿈을 돌리게 된 계기를 맞게 된다. 

 

특히, ‘세계 여행’이라는 소년 시절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은 약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 ‘남종화(南宗畵)’ 및 ‘사의(寫意)’를 추구하는 ‘문인화(文人畵)의 멋’ 속에서 현대적인 색채와 구도를 가미해 주로 ‘실경(實景)’보다는 ‘인물(人物)’에 대한 삶의 낱낱에 대한 기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깨닫는 깨우침의 시간이 쌓여갔다. 그의 ‘여행 화첩(畫帖)’과 무수한 ‘기행(紀行) 노트’가 그것을 방증한다. <광주매일신문>이나 <사람과 산>에 고정적으로 원고를 넘기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순례자(巡禮者)’의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틈틈이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느라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함과 동시에 국내․외 교류를 다지는 전시가 있다면 언제든지 참여하여 그의 스케줄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기 일쑤인 몇 해를 보냈다. 때로는 콜럼버스처럼 신대륙을 발견하는 ‘탐험가(探險家)의 마음’으로, 때로는 방랑(放浪) 시인 김삿갓처럼 소탈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예인(藝人)의 마음’으로 세계 오지 중에서도 ‘아시아의 험지(險地)’를 두루두루 답사하며 때로는 사진가처럼 풍경을 마주하여 ‘줌-인(Zoom-In)’ 된 인물의 표정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등 오로지 두 발을 디딘 지구 땅 위에서 외로이 ‘사투(死鬪)’를 벌이는 심정으로 현대 수묵화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특히, 그가 여행 중 만난 삶의 다양한 모습들은 얼굴색, 표정 하나 닮지 않은 ‘세계 만민(萬民)에 대한 애정’으로 다작(多作)의 ‘인물 초상화(肖像畵)’를 남기게 하였다. 이것은 궁중 회화에서 ‘왕의 용안(龍顏)’을 세필(細筆)로 그려내는 ‘역사 기록화(記錄畵)’라기보다는, 빠른 필치(筆致)로 단숨에 그려내는 속도감 속에서 마치 달마의 흔적을 만나는 것과 같은 ‘전신사조(傳神寫照)’를 드러내는 데 가까운 ‘인물 초상 퍼레이드(parade)’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충분히 서민적이며, 시․공간을 뛰어넘는 흥취를 전달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 가득하여 박화백의 작품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순간이동을 하여 네팔이나 인도, 미얀마와 파키스탄, 몽골이나 티베트, 히말라야 카일라스 등에 여행 중인 것 같은 설렘과 감동의 아우라를 선사한다. 이처럼 한 인간이 써 내려가는 진솔한 그림일기는 여행길에 쉬이 오르지 못하는 현실에 발목 잡힌 현대인들에게 정신적인 휴식을 안겨주며, 미래 어느 시점에 스스로 여행을 떠날 자유로움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문명의 수혜 속에서 잊고 지냈던 광활한 자연과 ‘영적 명상(靈的 瞑想)’의 세계에 다다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박화백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이해하면서도, 그의 깨달음과 자유, 평등, 평화의 노래를 다시 그만의 방식으로 재탄생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읊는다. 그는 부활자이고, 순례자이며, 이 시대 최고의 노마드(Nomad ; 遊牧民) 시인(詩人)이자, 현대인들의 찌든 마음을 ‘정화(淨化)’ 해주는 ‘소울메이트(Soulmate)’, 가엾은 영혼(靈魂)들의 친구와 같은 부족장(附族長)으로 우리 곁에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갤러리 리채 학예연구실장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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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붓으로 기도하며 ‘길’에서 맺은 인연…문득 돌아보니 ‘영원한 찰나’ 

​지구별 여행은 내가 실존(實存)해서 생동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고 어떤 대상과 만남에서 남는 느낌이자 고독한 사색의 향기처럼 마음에 다가온다. 또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일지라도 곰곰이 음미해보면 삶의 궤적(軌跡)에서 생산된 자국이자 유쾌한 여운을 남겨주는 시간의 흔적이라고 생각된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어두운 하늘에는 희미한 별빛들이 깜박거린다. 

​저자거리에서 친구들과 막걸리 한잔 걸치고 빈 지게의 홀가분함과 함께 마누라와 지식들에게 주려고 한 손에 조기(石首魚) 꾸러미를 들고 한가로운 고샅길을 걸으며 갈지(之)자이지만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는 가난한 나무꾼을 상상해 본다. 진정 아름다운 삶의 여행으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아지지 않는가!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콧물 훌쩍이던 시절, 1960년대의 아련한 기억이다. 새벽마다 트랜지스터에서 흘러나오는 육자배기를 좋아하시던 선친의 마음이 이해되고 한편으로는 그립다. 이제야 아버지의 삶과 족적이 이해되는데 벌써 나도 꼰질꼰질한 나이가 돼버렸다. 

 

어린 시절의 꿈이 당돌하게 세계 여행이었는데, 신념의 마력은 멀어지지 않고 신통(神通) 했다. 그러한 희망사항은 30대 중반부터 힘겹게 시작했는데 어느덧 26년간 오지를 찾는 방랑자가 됐다. 어느 해에는 6개월 동안 집을 떠나 있었으니 역마살이 너무나 많이 낀 팔자다. 

​실천의지와 형편에 맞춰 최저의 경비로 생활하고 여행경비의 10%는 그 나라 빈민을 생각하며 나눔을 실천하자고 다짐했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소박한 오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그림으로 기록하며 사람냄새가 느껴지는 곳을 방문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명의 노예에서 벗어난 자연과 그 범주에서 순응하는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날 수 있었고 티베트 탐험과 히말라야 원정대에 7차례 동행해서 고산병으로 쓰러져 겨우 살아난 부잡(浮雜)하기 그지없는 가장이지만 터키, 네팔, 인도 등…. 

​10여명 양아들의 인연을 맺기도 했는데 1명의 아들만 의지박약하게 만들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는 그러한 여행 공간 안에서는 행복한 화가이지만 문명의 이기와 경제 논리에 익숙한 나또한 그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목마름을 자주 느낀다. 그 이유는 귀국해서 스스로 각박하다고 규정지은 조건과 타협하며 고민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삶의 형태 때문이다. 깨닫지 못한 마음이 원인이다. 문명의 편리함을 모르는 티베트 창탕고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났더라면 아예 불만 없이 일생을 순수형태로 적응하며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설 수 있었으리라 자위(自慰)하며 반문명인들의 삶을 동경하곤 한다. 

 

수 십 개국의 여행 중 아시아권인 동양을 선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관적 관점이지만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믿고 사는 동양이 서양보다는 정신 영역이 심오하고 넓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히 인도, 네팔, 태국, 중국은 수 십 번 방문한 나라다. 프랑스, 이탈라아, 로마, 스페인, 중남미인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인도차이나 반도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폴, 스리랑카, 파키스탄, 일본, 대만, 남아공, 잠비아, 짐바브웨, 몽골, 터키, 그리스, 이집트 등등…. 

​인간이 사는 곳은 어느 나라이던 세계 공통언어로 통하는 것이 있다. 곧 훈훈한 미소와 그림과 손짓 발짓이면 거의 소통된다. 그러나 통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곧 합의 없는 나눔이다. 

​2007년 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번화가, 흑인구역인 시장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떼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강탈당한 일이다. 만델라 전 대통령을 존경하던 마음에 흠이 되는 아픔과 충격이었다. 그러한 상처의 울분(鬱憤)도 낙담, 체념, 달관의 순서로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준다. 

​후일 강도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개죽음을 면하게 한 것만으로도 10여명의 고약한 흑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용서와 화해에 이른다.

​2011년 파키스탄 발토로 빙하에서 길을 잃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다 겨우 생환해서 원정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침묵하며 퇴출당한 일을 반추해 보면 생사는 한걸음 사이에 나눠짐을 실감한다. 그간 히말라야 고산에서 함께 정을 나눈 대원들 여러 명이 하늘나라에 가버려 기억창고가 허전하기 그지없다. 마음 넓은 고(故) 서성호 대원과 함께 걸었던 태양열이 작열하는 사막에서 생의 충실에 전념하는 개미 한 마리가 부럽고 백설기 떡 같은 설산이 도열해 있는 3천m 빙퇴석 호수에서 쉬지 않고 헤엄치는 하찮은 모기 곤충의 율동에서도 생명가치의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인도 정신, 간디의 비폭력과 아름다움과 추함(美醜)의 구분을 뛰어넘는 남인도 폰디체리의 어느 담장아래에서 살고 있는 일곱 식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장(家長)인 라누(LANUA·38)씨와 부인(드레피아·25) 그리고 여덟 살인 큰딸 버비트라, 그리고 여섯 살, 네 살, 두 살, 한 살배기 남동생들이 단란한 가족이다. 

​라누씨는 류마티스 관절 통증으로 걷지 못하고 연약한 부인이 사원에서 청소해서 다섯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데 담장 옆 시멘트 바닥이 그들의 포근한 둥지다. 비가 오면 비닐을 담장에 묶어 대충 피하고 남편은 불편하지만 지나는 사람들에게 울상을 지으며 구걸을 하는데 8살 큰딸이 남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를 가르치는 광경에는 불행의 그늘은 없다. 나는 이틀간을 함께 웃고 작은 나눔을 갖고 헤어지는데 천사들이 순수한 눈길을 끊임없이 보내며 고사리 손을 흔드는 석별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다.  

 

​또 다른 웃지 못할 추억이 있다. 

​후일 화실을 짓기 위해 20년간 소유했던 시골의 땅을 헐값에 팔아 중남미, 체게바라의 체취 순례를 소원했던 2달간 방랑 이야기의 일부다. 

​페루에서 모기의 천국인 아마존 정글을 일주일간 탐험하던 중 채취한 작은 고추의 매섭고 뜨거운 기억이다. 귀환한 이키토스의 재래시장에서 망고 3개를 사서 숙소로 돌아가다 허기가 느껴져서 주머니속의 작은 고추를 무심코 한 개 먹었다. 그런데 순간 위경련으로 사지가 뻣뻣해지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 달콤한 망고 3개를 해치우고 그 껍질을 처리하려고 할 때 지나던 걸인이 껍질을 달라며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한다. 나는 더럽다는 생각에 “노(NO)”하고 풀밭에 던져 버렸는데 그러한 행위는 후회막급(後悔莫及) 한 고정된 관념이었다. 서운하게 반응하는 배고픈 걸인에게는 깨끗함과 더러움이 없다는 것을 순간 깨닫게 해준 청소부 성자였다. 

​이러저러한 다양한 체험은 어린 시절 동경했던 꿈과 희망의 산물이자 세상의 커다란 학교에서 직접 체험하는 학생으로 나 외에 강도나 아이들이나 걸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큰 스승들이라 여겨진다.

​세상은 드넓은 체험과 인식의 학습장이다. 미시와 거시의 안목을 넓혀주고 만물 가운데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반문하게 하는 시험 답안지와 같다. 나의 방랑은 흔적 없는 바람의 노래 소리 같기도 하지만 무지개 넘어 그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하는 이젤 위의 거대한 화폭 같다. 

​나 홀로 느끼는 착각이지만 여행은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 숨은 매력도 포함한다. 2달 정도 방랑하다보면 수많은 예기치 못한 사건과 만남,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역사와 함께 문화적 호기심으로 생각이 확장된 느낌을 받는다.

 


“화가는 붓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어느 선배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그간 여행 중 틈틈이 그린 기도문이 두툼하게 쌓인 결과에는 만족하지만 기록의 문장에는 문필가에게 넘겨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박종석 여행 일기 가운데-

광주매일 화필여로(畵筆旅路) 연재에서 옮겨 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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