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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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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수의 이미지: 미술의 역사 그리고 회화와 자아(Ego)의 협주곡


김승호 (철학박사 | 미술사학전공)


허정수는 정체성을 고집하는 작가이다. 1990년도 독일 뒤셀도르프미술대학을 방문하면서부터 필자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유명세에 이끌려 미술대학을 방문한 본인에게 그녀는 자신의 드로잉과 평면작업을 펼쳐 놓았다. 한 점 한 점 꼼꼼히 작품을 관찰하는 나에게 ‘너무 유심히 보시네요’ 라는 어색한 말투로 말을 건넸고, 어색한 대화는 2006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말주변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자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지속성 때문이었고, 단지 뒤셀도르프에서는 직설적인 단답형이 주를 이루었다면 서울 작업실에서는 서술적인 나열과 설명적인 부분이 첨가됐을 뿐이다. 작가와 환경은 변했다. 시간이 그 변화를 요구했고, 그리고 그 요구에 그녀는 부흥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술과 자아가 어떠한 방식으로 융합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세밀한 관찰과 치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허정수의 예술에 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흔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활동범위가 한국과 유럽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주관심사가 회화와 자아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문맥에서 제외되고 등한시 되었던 자아개념. 동시대미술에서 매체와 기술 그리고 일상의 미학으로 대체된 회화. 그리고 회화와 자아의 융합이 다원주의시대에서 예술작품의 객관적인 조건이 되는 이유와 관조한 현실의 리얼리티가 화면에 가시화 되어 예술의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 등 그녀의 화면은 많은 것을 담고 있어 비평가의 보편적인 역할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평범한 사물의 이미지가 신표현주의적으로 가시화 되어 자아를 형상화 하였다면, 현재의 화면은 자연과 인물을 사실주의적으로 가시화하여 바라보고 대적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이전에는 드로잉이 자연의 이미지를 강하고 거친 선으로 설명하였다면, 지금은 색으로 층층이 겹친 화면의 표피가 긴 머리카락 여인의 얼굴과 먼발치에서 바라본 평범한 자연풍경을 회화적으로 드러낸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전과 지금사이에 자아개념의 층이 두터워 진다. 색에서도 세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이전에는 정열적이고 강도 높은 힘이 어두운 화면과 색의 대비로 분출되었다면, 이제는 푸르고 맑고 풋풋한 풍경이 그녀의 모습을 담아낸다. 모티브를 화면에 가시화 하는 색이 변화를 하였다. 색의 변화는 화면의 이미지에서 읽혀진다. 한쪽이 인간과 주변 환경과의 대화가 거칠고 강하고 어둡고 표현주의적으로 조형화 되었다면, 다른 한쪽은 밝고 맑고 선명한 사실적인 자연과 크고 당당한 사실적인 여인의 뒷모습이 자아의 리얼리티를 가시화 하여 작가의 정체성은 더 구체적이고 폭도 넓어진다. 다시 말하면 자아와 회화가 만나는 지점이 작가의 노정이고, 이 노정이 일상이고, 일상이 회화세계를 이해하는 척도가 된다. 화면의 모티브가 평범하게 보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뒤셀도르프에서 서울로의 변화가 자아의 변화를 요구하였다면, 대화를 풀어가는 방식의 변화는 그 요구에 부흥한 것이 된다. 따라서 요구된 변화는 진행형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작가의 노정도 진행형에 있게 된다. 여기서는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고 새로운 소재를 찾고 새로운 표현기법을 연구해야하는 압박감에서 해방된다. 왜냐하면 일상이 멈추질 않는 한 그녀의 자아행보는 지속할 것이고 이 지속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경험되고, 그리고 바로 이것이 허정수만의 독특한 예술세계이자 그녀만의 대화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술세계에다 무게를 두어야 할지 아니면 대화방식에 중심을 둬야할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이번에 선 보일 허정수의 그림은 1990년대 화면보다 대화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90년대에 자아를 화면에 가두어 나를 표현하고자 고민하였다면, 현재는 자아의 정체성을 화면을 통해서 구현하여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작가의 생명력이 이미지의 창조에서 확인되었다면, 그래서 화면의 이미지로 자아를 지각하고 주체를 의식하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파열로 이것을 비평에서는 투셰(tuché, 실재계)라고 정의한다면, 지금은 자아를 전달하고 분석하는 방법과 기술이 작가가 선택한 모티브와 회화매체의 해석(hermeneutic, 이해의 분석)에서 구체화 되어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빨강과 녹색의 파열로 강한 이미지가 주를 이루었다면, 지금은 초록색이 주를 이루어 일상적인 모티브를 화면 속에 상징화 한다. 종합하면, 투셰와 해석의 주체는 회화매체이고, 이 매체의 주인은 예술가적 자아이고, 허정수의 화면은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창작의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그녀의 이러한 논리가 낮설지 않은 이유는 선택한 모티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미술문맥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일상적인 사진을 색채로 번역하여 작가로서의 자아를 보호하고 회화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t Richter), 자신의 역사와 과거에서 모티브를 찾아 회화와 자아의 관계를 대두시킨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미술사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찾고 창작의 역사를 주장하는 마르크스 류퍼츠(Markus Lüpertz) 등을 들 수 있다. 허정수는 이렇듯 우리에게 동시대미술의 문맥에서 자신의 주관심사를 파악하고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대우주와 소우주의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한 자아에 충실한 대가들의 화면의 구조가 해석의 조건이 되는 반면에, 그녀는 이미지의 상징체계와 색채사용과 방법에서 체계화된 해석을 모색하여 차이가 있다. 또한 회화가 그 대가들에게 창조적인 자아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다면, 허정수의 화면은 상징체계가 회화의 역사를 담아내어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타자를 통해서 자아를 구축한 현대미술에서 벗어나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에서 19세기 초반 뒷모습만을 그린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C. D. Friedrich), 1990년대의 신사실주의 작가들이 이 역사에 자리한다. 이러한 회화의 역사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허정수의 화면은 조심스레 타진하고 있다. 결코 외롭지 않은 역사탐방일 것이다.




미술의 역사는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자아의 현실을 보호하고, 정체성 탐구에 대한 정당성은 회화매체가 준 선물이라고 그녀는 믿는다. 또한 현실의 리얼리티가 작가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지시적(referential)인 이미지는 화면의 실재를 대변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녀의 믿음과 지식은 화면구조의 분석과 이미지 해석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분석과 해석은 미술의 역사가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복합적인 특성이 허정수의 현주소이고 작가로서의 자아를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무엇이 전자이고 후자인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융합하는지 혹은 어떠한 형태의 커뮤니티를 이루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관찰자가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정체성 구현에 힘을 실어준 미술의 역사와 작가로서의 자아와 현실의 리얼리티가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회화매체가 어떠한 도구와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할지는 그녀가 새롭게 짊어질 또 다른 운명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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