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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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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돌을 미디어로 들다


김최은영 | 미학




_당신은 ‘나’를 확언할 수 있습니까?

허리를 조금만 구부리면 속을 다 볼 수 있는 상자가 놓여있다. 다가가보니 상자는 水面을 안고 있는 작은 연못이다. 익명(혹은 ‘나’이거나)의 얼굴하나 얹혀 있다. 들여다본다. 물속에 비춰진 얼굴 하나 보인다. 당신은 지금 한승구가 만들어 놓은 나르시소스의 물가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실상 수면은 디지털로 된 터치스크린이다. 손을 뻗어 스크린의 물결을 건드리니 수면에 반사된 얼굴이 물결의 파장과 함께 일렁인다. 또 다른 익명인(혹은 ‘내’가 아닌)으로 변해 버린다.

다시 말하면, 수면에 비치는 반사된 얼굴이 관람자들 터치로 변화되고 재창조되면서 동시에 기존에 섞여있던 이미지가 있다면 오히려 제자리(얼굴)로 돌아가기도 한다. 여기서 수면에서 비춰진 모습은 나르시스소스의 전형이라 이라고 부른다면 터치스크린 만지는 관람객은 매개자의 역할이 부여되는 것이다.

_‘나’는 누구일까? 내가 바라본 나는 진정한 ‘自我’인가?

굳이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를 수 있는 질문이고 철학의 범주에서만 등장하는 물음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그러하게 된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누군가에겐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벗어나기 힘든 운명 같은 질문이 된다.ⅰ

2006년 란 제목의 첫 번째 개인전으로 한승구는 이러한 질문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나’를 물으며 동시에 ‘내’가 속한 사회와의 관계성 속에서 상실된 자아를 발견하곤 진정한 자아 찾기의 방법으로 정보와 인식의 코드가 되어버린 얼굴을 제거해 나간다. 거세되어진 얼굴에는 익명의 새로운 얼굴이 부여되고, 그를 통해 他者化된 自我를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_나르시소스의 두 얼굴 : 분열된 편집증

타자를 통해 자아를 보려했던 한승구의 시선이 나르시소스로 움직여 새로운 몰입의 국면을 맞는다. 그는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편집증적인 자기보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타인을 바라봤던 것을 ‘편집증’으로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작용으로 등장한 자기애적 바라보기를 통한 자기안의 여러 자아에 대해 ‘분열증’이라 명명하지만 나는 조금 달리 해석해 내고 싶다. 끊임없는 자기 응시를 통해 비로소 발견하게 된 존재성이 곧 ‘편집증’적 증상이며 동시에 그 안에 실존하는 다양한 자아를 다시 ‘분열증’적 목격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석이야 어찌 되었든 그것은 한승구에게 새로운 스팩트럼의 역할을 수행해 냈다. 이제 그는 기존의 얼굴을 거세하지 않은 채 타자의 얼굴과 비순차적으로 교차, 혼재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Nod방식) 게다가 24개의 얼굴이 서로 뒤섞일 때 발화점이 되어 주는 것은 터치스크린을 만져 다른 얼굴로 변하게 만들던 바로 그 관람자(매개자)의 손끝에 달려있다. 즉, 浮彫化된 얼굴화면 앞엔 24개의 전구모양의 球들이 놓여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순서가 정해지는 것이다.

-말거는 타자들 : 인터렉티브
이러한 관람자(매개자)의 행위는 전시작품 전면에 걸쳐 모두 적용된다. “후우~”하고 입김을 불면 자유로드롭이라는 놀이기구처럼 익명인의 얼굴이 담겨있는 모니터가 직각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올라갈 때보다는 느린 속도로 천천히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화면 속의 인물은 올라갈 때 물에 덮혔다가 내려올 때 물이 빠지면서 다른 인물로 변화되어 진다. 여기서 다시 적극적인 인터렉티브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승구의 작품들은 관람자가 곧 매개자면서 동시에 자아를 찾는 개체자이며, 때론 자아에게 말을 걸어주는 타자가 되기도 한다.

굳이 한승구식 자아와 타자의 존재와 분류기준을 살펴보자면 퐁티의 ‘신체성의 자아’와 매우 유사한 구분방식을 갖는다. 내적, 심리적 기준의 경계가 아닌 외적, 신체적(얼굴)으로 보여 지는 구별법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조형예술창작자에게선 너무도 당연한 사유의 방식으로 보여 진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인터렉티브한 코드는 한승구가 애초에 던져 놓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들어내는 행위로 ‘나’와 ‘남’, 서로가 모두 존재해야만 가능한 ‘마주보기’ 속에서의 ‘자아보기’ 정도가 되겠다.





_다시 움직이는 작가의 시선
지름이 2㎜정도나 되려나? 작은 전구들(LED)이 투명한 사각 상자 안에 촘촘히 붙어있다. 불빛. 작은 전구들이 뿜어내는 불빛은 작가의 조작 하에 큰 원이 되기도 하고 작은 원으로 나뉘기도 하면서 율동감있게 움직인다. 빛을 픽셀삼아 만든 ‘빛조각’. 그는 겸연쩍어하며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서 발견한 형상을 빗대어 빛조각을 말한다. 그저 빛이 거기 있었고 자신은 발견했을 뿐이라고.

조금 다른 지점을 향하고 있는 듯한 한승구의 시선은 다시 새로워질 작업에 대한 예고편이며 작가의 마르지 않는 상상력과 조형의지를 보여주는 유쾌한 단초이다. 변했다 또는 그렇지 않다를 논하기에 앞서 그러한 단초들이 수많은 사유와 노동을 통해 전시로 보여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한 후 우리는 그가 얼마나 새로워졌는지, 혹은 그저 말하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인지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_시지프의 돌을 미디어로 들다.
산꼭대기로 올려도, 올려도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치열하나 묵묵하게 옮기는 시지프의 신화 같은 한승구식 사유는 진리라는 가치에 대한 그만의 접근방식인 조각과 미디어로 다시 우리에게 진지한 말을 걸어올 것이므로.




ⅰ한자경 선생의 <자아의 연구:서광사. 2003>를 참조한 표현이다.
ⅱ 작가노트에서 옮겨온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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