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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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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의 복수

이대범(미술평론가)


01. 제주도에서 자란 이소정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3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초기의 극히 개인적 서사는 이후 개인전을 통해 사회적 관계와의 동일화 혹은 이탈을 반복하며 새로운 형태로 변이했다. 

02. 첫 번째 개인전 <name me>(2005, 우석홀갤러리)에서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절단된 신체의 재조합을 통한 비언어적 서사를 구축했다. 

03. 최종 결과물은 신체의 형상을 지닌 괴기스런 생명체의 탄생을 알렸다. 이와 어우러진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용부호는 작품 자체가 비밀스러운 발설을 하는듯한 묘한 심상을 야기했다. 

04. 두 번째 개인전 <눈밭의 비겁자>(2007, 금호미술관)의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을 배태하고 숙주처럼 자란 괴기스런 생명체의 죽음 혹은 해체를 알리는 듯했다. 다양한 발묵의 우연적 효과는 형상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혈흔처럼 보였다. 

05. 자동발생학적으로 무한 증식하던 신체는 인정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통제하려는 강한 자의식을 지녔다. 이 두 길항의 긴장은 전체적 형상뿐만 아니라 세부 조직의 구성에도 영항을 미치며 작품의 완결성을 성취했다. 굳이 승자를 따지자면 통제하려는 자의식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그 자리를 다양한 발묵의 우연적 효과가 차지했다. 화면의 효과는 극대화 됐으나, 강한 자의식의 발현처럼 보였던 세부조직의 구성은 파괴됐다. 

06. 세 번째 개인전 <낯선 명절>(2009, 갤러리2)에서는 탄생과 죽음을 경험한 괴생명체는 유령이 되었다. 명증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현실에 철저하게 개입한다. (전시 제목은 '낯설 명절'이었고, 전시 개막일은 4월 3일 이었다. 제주 출신인 작가에게 이날은 직접적이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현재의 삶에 개입한다.) 

07. 작품의 큰 변화는 단일한 형상에서 뻗어가던 그림에서 그림이 그림을 배태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괴생명체를 만들어가던 시기에서 괴생명체가 스스로 숙주가 된 시기이다. 변형 논리의 토대는 의외로 객관적 지표인 보슈(bosch) 드릴 '사용설명서'였다. 

08.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의 부분을 취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품으로 상정하고 화면 위에서 조립했다. 그렇다고 '완성'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상위 부품(다음 그림의 뼈대)이 된다. 완성이면서 완성이 아닌 이 모호한 순간은 오른쪽으로 돌리시오, 왼쪽으로 돌리시오, 화살표 방향으로, 주의하시오, 재생하시오, 잠시 멈추시오, 이렇게 여섯 가지의 매뉴얼 부호와 만나 다음 그림의 단초가 된다. 혹은 그 역이 되기도 한다. 

09. 사용설명서에 등장하는 작동, 회전, 역회전, 경고 등의 기호는 작업의 논리이자, 작업 설명의 단서가 된다. 

10. 매뉴얼에 기초하며 자가 증식 하는 이미지를 통제하려는 이러한 의도는 배신당한다. 여전히 즉흥적인 선이 등장하고 상황 상황에 개입한다.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의 시간은 지속되지만 작가는 그 앞에서 불안해하지 않고 유희 한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는 불안. 네 번째 개인전 <매뉴얼의 복수>(2011, 브레인 팩토리)는 이에 대한 작업이다. 

11. 작가는 이전 작업에 기초하여 '원판'을 만든다. 원판의 기본 요소는 '완성'이라는 최종의 단계를 지연시켰던 스스로 자라난 것들과의 싸움에서 획득된 전리품이다. 전리품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 하나의 생명체를 만든다. 이 원판은 다시 해체되어 다시 원판과 만난다. 태어나서 죽고 다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원판의 특질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레이어가 쌓이면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에서 원판의 형질들은 변형된다. 이번 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원판과 원판에서 해체된 부분이 만나는 경계이다. 경계는 있는 그대로 만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형질의 변형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자가 증식하기도 하고 통제하기도 하면서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매뉴얼에 따라 객관적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업과정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지점이다. 유희의 지점이자, '완성'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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