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최태훈, 살붙이기가 자소상이 되기까지
김동민 tjsdi1062@gmail.com
20세기 중후반부터 현대조각은 장르 간 구분의 와해와 회화, 사진, 미디어, 퍼포먼스 등 여러 장르와 융합을 이르며 ‘설치(installation)’의 이름 아래 엉성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매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마셜 매클루언(Marshal Mcluhan)의 유명한 명제처럼 디지털매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조각을 비롯한 전통적인 매체는 디지털매체에 비해 낡은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더욱이 이러한 포스트 미디엄에 대한 논의는 사진과 비디오에 집중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조각에 대한 논의는 더욱 뒷전으로 미뤄지고 말았다.1) 결국 조각은 조각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비조각(Not-Sculpture)들을 포괄하며 혼종적으로 그 외연을 넓혀왔으나, 이는 오히려 조각이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감을 키웠다. 이에 조각가들은 스스로 조각적 조건의 탐구 또는 조각의 재정립에 몰두하게 된다.
분명히, 우리는 무엇이 조각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각의 방법론을 공간에 적용하고자 하는 최태훈(Choi Taehoon, 1982-)의 시도는 혼성모방으로 가득한 설치미술의 폐허에서 조각이 바로 설 단초를 제공한다. 작가는 조립 가능한 형태의 DIY 가구 유닛(unit)을 조합하여 자소상(自塑像)의 이름을 붙였다. 가구는 판매 홈페이지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선택되며,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긴 유닛들은 수직-수평의 구조 안에서 조형적 질서를 이룬다. <우드타입> 시리즈는 이케아 목제 가구를 활용하여 <자소상> 시리즈와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데, 주목할 점은 균질하게 자리 잡은 가구 유닛들이 자아내는 수직-수평의 획들이 마치 자소상을 만들 때 무수히 긋게 되는 보조선들을 연상시킨다.
2021년부터 최태훈은 가구를 뼈대 삼아 에폭시 폼을 뿌려 덩어리를 부풀리는 살(SAL) 개념을 고안한다. 자소상 시리즈의 과정에 에폭시 폼을 뿌리는 과정이 더해지면 ‘살-자소상‘, 우드타입 시리즈의 과정에 더해지면 ’살-우드타입‘이 된다. 살 개념은 조각 캐스팅의 전 단계로, 모형제작의 수단으로 오랜 시간 활용 되어온 소조(塑造)와 밀착되어 있다. 소조는 재료를 밖에서 안으로 깎는 조각과 반대로 흙이나 유토와 같이 점성이 있는 재료를 덧붙이며 형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한 의미에서 ‘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조각은 인체 형상을 만드는 것에서 출발하여 근원적으로 인간형태적(anthropomorphic) 속성을 가지기에, 뼈와 살이라는 이미지와 필연적으로 맞닿는다. 즉, 심봉을 세우고 흙을 붙이고 모양을 내는 행위는 기술적 토대(technical support)로써 뼈대에 살을 붙여 만들어지는 자소상으로 추동하는 동력이며, 또한 조각 자체를 본질적으로 지시하는 오토마티즘(automatism)인 것이다. 2)
최태훈의 또 다른 시리즈인 <살-톤> 시리즈는 철재 캐비닛에 에폭시폼으로 덩어리를 낸 작업이다. 여기에서 캐비닛은 조각의 기본이 되는 틀과 같다. 석조/목조의 과정을 상상해 보면, 육면체의 석재/목재에 수직과 수평의 보조선을 그려가며 재료를 안으로 깎아 형태를 만든다. 안과 밖을 채우고 비우는 과정은 소조의 원칙을 따라가며, 캐비닛 안에 그대로 남아 기억 속 조각을 끄집어낸다. 더 나아가 작가는 가구에 뿌리던 에폭시 폼을 창틀로, 공간으로 가져오게 되는데, <살(SAL)>(2023)은 전시 공간인 P21 갤러리의 공간 전체를 소조하며 설치의 형식을 띤다. 그러나 조각의 역사적 관습은 여전히 작품과 공명하고 있기에 ‘살’은 어떤 양태로 변주되든, 여전히 조각이다.
하나 분명히 해야할 것은, 이 자기-지시적인 특성은 마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처럼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상을 조각적으로 바라보고, 집요하게 탐구한 끝에 ‘자동적으로’ 얻게 된다. 최태훈의 작업에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조각으로 이끄는 어떠한 힘(force)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창작 원리는 동시대적 맥락에서 매체에 누적된 현재성을 끄집어내어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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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컨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주목했던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사진으로서의 예술’이었으며,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가 집중한 것은 기술적 환경에서 코드화되어 전환된 ‘이미지’의 당위성이다. 크라우스(Rosalind Krauss) 역시 벤야민과 피터 바이벨(Peter Weibel)의 논의를 따라 사진과 비디오의 나르시시즘적 특성을 분석하며 이들을 예술의 범위로 끌어들였다.
2) 크라우스는 오토마티즘에 대해 매체에 누적된 역사와 자기 지시적인 관습으로 정의한다. 그는 오토마티즘은 “작가가 스스로 전통에서 떨어져 나와 ‘무엇이든 예술이다’라는 말이 횡행하는 영역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고 느낄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오직 그러한 규칙만이 창작 행위에 목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가짜들의 끊임없는 위협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제공해 줄 것”이라 설명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언더 블루 컵』, 최종철 역, (현실문화연구, 2023), 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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