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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미술 대사전' 김달진

관리자



글 이무경.사진 권호욱 기자

에피소드 1무엇인가를 모으기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다. 우표, 담뱃갑, 상표…. 새로 나온 우표를 사려고 우체국 앞에 줄을 서서 밤을 새우기도 했고, 담뱃갑을 모으다가 어른들에게 『 어린 것이 무슨 담뱃갑이냐』고 혼나기도 했다. 5남1녀중 막내인 그는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점점 내성적이 되어갔고, 수집하는 취미에 더욱 몰두했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날 여성지에서 「이달의 명화」라는 코너에 소개된 외국의 명화를 보게 됐다. 그때부터 다른 것을 제쳐두고 온갖 잡지에 소개된 그림과 미술관련 글들을 오려 모으기 시작했다.

에피소드 272년 한 고등학생이 보따리 하나를 싸가지고 홍익대 박물관장실을 찾았다. 어렵사리 관장을 만난 그 학생은 보따리를 풀었다. 거기엔 몇년간 온갖 잡지와 신문에서 곱게 오려모아 켄트지에 정리한 자료가 철끈으로 묶여 15권으로 정리돼 있었다. 이경성 박물관장은 「훌륭한 일」이라고 칭찬해주었고 그 학생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학생이 바로 훗날 「걸어다니는 미술사전」 「인간자료실」로 불리게 된 미술계의 기인 김달진씨(44.가나아트센터 가나미술연구소 자료미디어팀장)다. 적어도 한국 현대미술사에 관한 한 그는 「소금」같은 존재다. 화가나 평론가들도 자신이 그린 작품이나 전시회, 비평에 관한 자료를 그에게 묻는 일이 흔하다. 겉으로는 화려한듯 보이는 우리 미술계. 그러나 작가의 이름이나 연보 등 기본적 1차 자료조차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달진씨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현대한국미술사를 정리하는 일을 자임하고 나섰다.

『 81년 국립 현대미술관장이 된 이경성 선생께 다시 연락을 드리고 찾아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절 알아보시고 서무과장을 부르시더니 채용해주셨습니다』

일당 4,500원의 일용잡급 임시직. 현대미술관에서의 김달진씨 첫 직급이었다. 하지만 그는 좋았다.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화장실 청소만 하더라도 좋겠다」는 것이 당시 그의 심정이었다. 전시과에 소속된 그는 미술관의 온갖 자료에 파묻혀 하나씩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또 금요일만 되면 커다란 보따리를 둘러메고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시작해 사간동 인사동 동숭동의 화랑을 돌았다. 하지만 매주 전시장에 나타나 전시회 도록과 전시된 작품을 하나하나 꼼꼼히 비교해 보는 그를 미술계가 금방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 85년 미술계간지 「선미술」에서 일하시던 유홍준 교수의 격려로 「관람객은 속고 있다」는 글을 겨울호에 싣게 됐습니다. 제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의 약력이나 연보 연표 등에 오기와 오류가 너무 많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죠. 일간지에도 소개되는 등 반응이 대단했고, 미술계에서 비로소 저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좀더 미술에 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성균관대 사서교육원,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를 다니며 주경야독했다. 94년에는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에 입학해 공부하는 등 억척을 부렸다. 그 이듬해에는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냈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는 작가, 평론가, 단체, 화랑, 국내외 전시회 등 한국미술계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 이미 출판되어 있는 한국현대미술연감 같은 것이 있지만 충분한 1차 자료의 역할을 할지가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위상학(1913∼1967) 같은 작가는 60년대에는 꽤 알려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 곳이 없거든요』

하지만 14년2개월 동안 근무한 국립 현대미술관을 나와 가나아트센터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그의 직급은 10급 말단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는 딸과 초등학생 아들, 신문배달을 하며 가계를 돕는 부인, 전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17평짜리 서민아파트…. 결국 그는 국립 현대미술관 생활을 접고 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 잘못 표기된 글을 지적하거나 바로잡는 일을 하다보니 일부 인사들에게는 욕을 먹지요. 「너무 편집광적이 아니냐」 「두고 보자」는 등 감정섞인 이야기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격려가 더 많습니다』

누구보다 가족들의 격려는 그에게 큰 힘이 된다. 「나는 가끔 갈매기 조나단과 우리 아빠를 비교한다. 조나단이 친구들의 비웃음으로 고달펐던 것같이 우리 아빠도 미술자료를 수집하며 고달프다. (중략) 조나단이 자신의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해주듯 아빠도 자신의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아빠와 조나단같이 나도 자존심 강하고 의지가 굳고 착하며 약간 바보같은 똑똑이가 되어야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할 것 같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그는 영웅이며 성공한 갈매기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맏딸 영나가 3년전 한 학생잡지에 기고했던 글이다. 그는 이 글을 복사해 책상 한쪽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lmk@kyunghyang.com


<취재수첩> 작가에서 평론가 큐레이터까지 필생의 목표는 '한국미술인 사전'

1. 김달진이 해온 일:96년 가나아트센터로 자리를 옮긴 후 「미술자료 전문가」 김달진은 더욱 바빠졌다. 그는 가장 먼저 2달간의 전시회 정보를 담은 8면짜리 소식지를 발행했다. 인사동 청담동 사간동 동숭동 등 서울시내 화랑지역을 7개로 구분해 지도와 함께 자세하게 실어준 이 소식지는 서울의 140여개 화랑의 위치와 그 화랑에서 여는 전시회가 빠짐없이 실리는 「미술계 게시판」. 1만5천부를 찍어 무료로 배포하지만 매번 모자란다는 아우성에 이번 5∼6월호부터는 2만부로 늘려 찍기 시작했다.

2. 김달진이 막 시작한 일:지금 그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가나아트센터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ganaart.com/). 이달부터 서비스를 시작해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번 들른 네티즌들은 이내 단골손님이 되어버린다.

사설미술관중 가장 많은 자료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김팀장은 『 이 자료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자신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놓을 궁리를 했다. 매일 그가 클리핑하는 일간지 미술관련 뉴스와 미술계 인사의 동정, 교수 초빙소식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갤러리 뉴스」, 가나아트센터의 전시회 교육아카데미 레스토랑 아트숍 셔틀버스를 소개하는 「가나아트센터」, 각종 미술정보 사이트나 문화관련 기관과 연결시키는 「링크」 사이트 등이 있다. 특히 「Dr. Kim's Lab」 사이트는 「today's behind story」 「culture guide」 「search」 「copyright」 「cyber gallery」 「q&a」로 꾸며져 김달진이 꼼꼼히 준비한 미술관련 소사와 문화전반의 소식, 사이버 미술관 관람을 손쉽게 할 수 있다.

3. 김달진이 준비하고 있는 일:내년초 「김달진의 미술판 이야기」라는 책을 낼 계획이다. 그러나 그가 필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한국미술인 인명사전」. 1851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작고작가들을 정리중이다. 내년말쯤 문고판을 내고 이어서 미술평론가와 미술사가, 큐레이터 등 미술이론가들의 인명사전도 정리할 계획이다. 이미 워드프로세서로 작업을 해놓은 종이뭉치가 두툼하다.

- 경향신문 1999.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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